포스트코로나 19시대와 구성적 인간론 ②

근대 인식론의 주체란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전제로 이해가능하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은 인간은 미생물을 포함한 자연 전체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유기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간의 주체성은 외부와 분리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사회는 개인의 밖에 늘 존재한다는 전제는 기각된다. K방역의 성과는 개인과 사회제도의 협치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봐야 한다. 기후위기시대는 기존 성장주의 관점에서 볼 때 비관적인 물질적 조건을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탈성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주체성’과 ‘더불어 가난한 사회’의 협치를 통해 관계, 돌봄, 정동이 풍요로운 시대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3. 근대적인 인간론의 소멸

임마누엘 칸트는 초월적인(transcendent)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선험적인(transcendental) 인간의 인식론적 질서로의 이행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근대적인 책임주체에 대한 기본 구도는 칸트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미리 제시된 전제조건과 같은 선험적이라는 주체양상은 근대사회의 초석이 되었던 책임주체의 근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상은 근세의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의 잠재성을 재발견하자는 문예부흥운동의 맥락을 넘어서,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유, 즉 인간중심주의로의 이행을 뜻한다. 이를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한다. 그러한 근대의 선험적인 주체는 인식론, 존재론, 논리학 등을 통해서 생명과 자연과 구분되는 명확한 인식질서의 주인공임을 의미한다. “인간은 어떻게 자연대상을 아는가?”라는 인식론과 “인간은 어떻게 자연대상과 분리된 존재가 되는가?”라는 존재론, “인간의 논리는 자연을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근대의 삼종 세트인 인식론, 존재론, 논리학은 사실상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의미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인 현재 인간 내에 서식하는 미생물, 자연, 생명, 기계, 사물 등은 책임주체의 인식론적인 전제조건을 뒤흔들고 있다. 인간은 자연, 사물, 생명, 미생물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코로나 19 사태는 보여주었다. 이제 선험적인 주체양상이 말하는 정상인, 성인, 백인, 엘리트 등의 근대적 형상은 아주 옹졸하고 편협한 인간상을 그려낼 뿐이며, 오히려 이로부터 벗어난 생명, 자연, 소수자를 말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팬데믹 상황은 이러한 선험적인 인간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국면인 기후위기 시대의 전야(前夜)에 선 인류의 상황을 의미한다.

근대사회는 사회 자체를 미리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예를 들면 헤겔의 경우에 인륜적 공동체가 즉각적으로 미리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동일성, 통일성의 상황을 설파하는데, 이는 공통감각(common sense)에 따라 감각의 수준에서 서로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적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표상적 수준에서의 감각이 통일성의 원천이라는 언변이며, 이는 우주되기가 모든 감각의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낭만적인 인식의 발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공통감각이 모든 오류의 원천이라고 하면서 헤겔의 변신론과는 확실한 선을 그으며, 대안으로 신체변용에 기반한 공통개념(common concept)을 제시한다. 헤겔이 바로 이러한 동일성의 철학을 구사했기 때문에 사회는 늘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순, 갈등, 소외, 대립 등도 사회의 성숙으로 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 시리아, 수단, 예멘과 같은 죽은 국가, 죽은 사회가 등장하는 현실을 바라볼 때, 갈등과 모순은 사회분열과 사회와해로 향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사회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양상에서 분열되고 해체되고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의 동일성 철학은 더 이상 유효성을 상실한 상태이다. 동일성 철학의 사회양상은 무차별사회이며, 성장의 떡고물로 인해 저절로 자동적으로 성립되어 소모하고 소비하는 관계망이다. 그러나 팬데믹은 상황은 사회가 미리 주어져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는 간(間)공동체 사회로의 이행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기존 사회의 붕괴를 더 빈번하게 목격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는 의식적으로 구성해야 존재하며 탈성장의 새로운 주체성으로 더불어 가난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난민 캠프의 삶보다 낫다.  by Ahmed akacha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4959227/
기후위기 시대에는 기존 사회의 붕괴를 더 빈번하게 목격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는 의식적으로 구성해야 존재하며 탈성장의 새로운 주체성으로 더불어 가난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난민 캠프의 삶보다 낫다.
사진 출처 : Ahmed akacha

근대의 인간론이 기반하고 있는 근대이성의 최종산물이 파시즘이라는 연구는 호르크하이머를 위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연구의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생명과 자연을 도구화했던 도구적 이성이 바로 나치의 발호의 기반이라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연구결과물은 근원적인 문명 자체에 대한 파문을 남겼다. 1) 도구적 파시즘 : 생명과 자연을 도구화하면 신체로 연결된 인간을 도구화하여 이주민을 혐오하고, 소수자를 차별하고, 장애인을 분리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등의 도미노 현상으로 현현한다. 그러나 2) 에코파시즘 : 이제 파시즘의 양상은 인간을 지구에 붙은 벼룩으로 보는 에코파시즘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인간 자체를 혐오하는 방향이며, 생명 중심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전환적 사유를 근본주의, 원리주의, 극단주의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기후위기 상황에 대해서도 인류의 멸망을 당연시하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논리 역시도 등장하는데 이는 에코파시즘이 일상으로 내려와 있고 암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또한 3) 기술파시즘 : 포스트휴먼 등의 논의를 통해서 신인류의 탄생과 인간의 역할이 끝나고 인공지능, 로봇, 사이보그 등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논리 역시도 기술파시즘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와 같은 사람이 『호모 데우스』(2017, 김영사)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인류는 신과 같은 불사의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는데 이는 첨단기술과 첨단의료 등의 발전의 혜택을 입는 소수의 1세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상황이며, 나머지 제 3세계 민중들과 기후난민 등은 배제하는 기술파시즘의 양상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4) 분리주의 파시즘 : 트럼프와 유럽의 극우세력 등의 ‘분리주의, 고립주의, 폐쇄경제’를 통해서 기후난민을 배제하는 분리주의 파시즘 등도 나타났다. 이러한 미시파시즘의 역습은 사회적 관계망이 사라진 자리에 암적으로 증식하고 증오와 차별, 혐오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인간을 비하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미시파시즘에 맞서 구성적 인간론의 도전이 필요한 상황이다.

팬데믹의 시대는 근대적인 책임, 의무, 당위, 믿음 등에 의해서 움직이는 주체(subject)양상에서 정동, 사랑, 욕망, 돌봄 등에 움직이는 주체성(subjectivity)으로의 이행이 필요한 때임을 의미한다. 주체성은 너와 나 사이에서의 구획과 구분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 ‘나일 수도 너일 수도 있는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의미한다. 이는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주체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기능과 역할은 저절로 생긴다는 근대적인 “의미화=가치화=표상화=기능화”라는 자동주의적인 질서를 벗어나 너와 나 사이에서의 공통성(commons)과 사이주체성(Inter-subjectivity)을 기반으로 하여 자발적인 자율적인 주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과제이다. 특히 팬데믹 이전에는 가게만 열면 우발적으로 고객이 찾아오고 공지만 띄우면 청중이 저절로 모여드는 양상이었다면 이제는 판을 짜고 도모하고 양육하는 등의 판짜기의 노력이 없다는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너와 나 사이의 중간현실로서의 주체성 양상은 그 일을 해낼 사람이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조율, 협동, 연대, 판짜기 등을 통해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근대적 주체가 명확히 의지와 의식을 가진 자아(ego)로부터 시작한다면 주체성은 관계망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관계망과 판은 미리 주어진 책임이 아니라, 모두가 판짜는 사람인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주체성의 파급효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팬데믹 상황은 통치(統治)나 관치(官治)가 아닌 협치(協治)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제 통치와 관치체계에 따라 부두인형처럼 움직이던 국민들의 상황은 끝이 났다. 이제 제도(institution)는 관계망을 필요로 하고, 관계망에 의해서만 유효해질 수 있다. 제도에서 관계망으로 향하는 의식의 무의식화 상황과 관계망에서 제도로 향하는 무의식의 의식화 상황둘 다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협치의 판이다. 협치는 권력 자체가 유동적이고 민감하고, 네트워크적인 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상 전 지구적인 협치와 마을공동체의 협치 등 규모와 범위 면에서도 다양한 협치의 판이 열리고 있는 상황이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얼마나 관계망에서의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실천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제 제도를 정해놓고 따라오기를 바라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K-방역은 사실상 시민들의 협치가 만들어낸 전자적인 통제에 대한 감내(堪耐)라는 협치의 산물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협치는 “공공이 할 일을 민간에게 떠넘긴다”라는 방식이 강했다면, 생명 위기 시대의 협치는 아래로부터의 협치, 위기에 강한 협치, 구성적 협치로의 이행의 과정에 있다.

팬데믹 상황은 더불어 가난의 시대, 탈성장의 시대를 예감하게 했다. 여기서 빈곤은 개인이 직면하는 돌봄과 관계의 부족이 실물적인 결핍, 부족, 결여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가난은 관계의 풍요, 돌봄의 풍요, 정동의 풍요 속에서 나타나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삶의 형태이다. 맑스가 빈곤은 “어떤 경우에도 빈곤은 찬양될 수 없다”라고 그의 저서 『철학의 빈곤』(1989, 아침)에서 일갈했듯이 빈곤은 필사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은 성장 이후의 저성장 뿐만 아니라 탈성장 전환사회의 목소리 역시도 사회 곳곳에서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된다. 특히 정부가 주장하는 탄소중립 2050플랜과 같이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감축과 탈성장이 소급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의 확산이 탈성장 화두를 대안세력들이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탈성장 라이프스타일은 더불어 가난, 함께 가난, 연대의 가난 속에서 사람들은 보다 삶과 실존의 의미를 더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결핍과 정동의 부재와 같은 빈곤은 언제나 극복되어야 할 명제이지만, 팬데믹은 더불어 가난을 통해서 탈성장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 다음편에 계속…

신승철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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