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두루미의 비행 시동

3월 둘째 주 서산에서 만난 흑두루미들은 아지랑이 속에서 사람이 뿌린 먹이를 먹고 볕을 쬐고 노래하고 있었다. 힘을 비축하는 것처럼 보였고 먹이터 두 곳을 번갈아 날아다니며 비행 시동을 거는 것도 같았다. 대이동을 앞둔 수천 마리의 흑두루미들이었다.

3월 둘째 주 흑두루미를 보러 갔다. 정오께 도착한 서산의 어느 논, 그들은 아지랑이 속에서 사람이 뿌린 먹이를 먹고 볕을 쬐고 노래하고 있었다.

사진제공 : 한승욱
사진제공 : 한승욱

흑두루미의 별명은 수녀두루미다. 수녀 가운 같은 빛깔의 깃털을 지니고 있다. 두루미나 재두루미와 “뚜루뚜루” 하는 언성은 비슷하지만 (보다 몸집이 작아서일지) 흑두루미의 노랫소리는 더욱 귀엽고 수다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수천 마리 흑두루미들이 모여 논길에 뿌려진 곡물을 쪼아 먹고 있었다. 밀집도가 상당했는데 저마다 끊임없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며 별 불편은 없어 보였다. 납작하게 끼어 가는 출근길 지하철을 떠올리면서, 협소한 공간 각자 행동해도 무리 없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제공 : 한승욱
사진제공 : 한승욱

호기심 많은 개체였는지 흑두루미 한 마리가 무리에서 이탈해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도 했다. 그는 멀뚱멀뚱 우리를 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바람에 누운 갈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우수에 잠겨 있는 듯하다가,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횡으로 느릿느릿 걸으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마음껏 자태를 뽐내다가 날아갔다.

순천(월동지)에서 날아와 서산에서 며칠, 대이동을 준비하고 있는 흑두루미들이었다. 힘을 비축하는 것처럼 보였고 먹이터 두 곳을 번갈아 날아다니며 비행 시동을 거는 것도 같았다. 해가 저물어가고 잠자리로 가기 전에 흑두루미들은 점호를 하며 서로를 확인하려는지 처음 있던 먹이터로 모여들어 도열하듯 앉았다.

학춤 추는 몇몇을 쌍안경으로 관찰하고 있을 때,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흑두루미 대열을 따라 뒤편 가까이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걸어가던 그는 곧 어딘가로 숨어들었는데 주변을 보니 저편에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한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흑두루미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전체 비행, 잠자리로 가는 것은 아니었고 놀란 듯 공중에 맴도는 모습이 숨어 있던 그가 날린 것 같았다. 저편 사람들은 한참 사진을 찍었다. 비행이 잦아들고 도로 앉기 시작할 때 즈음, 새들을 날린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사진을 찍던 사람들 곁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만족스러운 듯 하이파이브를 했다.

흑두루미들은 몇 개체씩 푸르스름해지는 하늘을 날아 잠자리로 가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가 서로 이야기하며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날고, 앉았다가 다시 날고, 순서가 있는 듯 차례로 걷기도 하면서, 두렁을 넘어 무논으로 이동했다.

사진제공 : 한승욱
사진제공 : 한승욱

자연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심증뿐인데도 분하고 심란했다. 어둠은 빠르게 내렸다. 뚜루우 뚜루우, 뚜루우 뚜루우 캄캄한 어둠 속 흑두루미들은 오래도록 밤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인사는 못 하겠고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돌아오면서 안녕을 바라면서 미안해했다.

이동을 앞둔 철새들은 힘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훼방 한 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매년 찾는 지역이라도 위험한 곳이라 인식하면 다른 곳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이미 그들에게 터전은 매우 부족하며 한정적이다. 한정적 터전에 따른 종 밀집도 증가는 전염병과 포식자 등에 의한 떼죽음 가능성을 높인다.

탐조 활동의 기본 정신은 자연 존중과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적정 거리를 지키고 자연에 방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위협해 날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가까이 접근하거나, 새끼를 위협하거나, 둥지와 둥지 부근을 훼손한다거나, 그들의 영역을 에워싸는 등 위해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연 관찰을 즐기는 이라면 무릇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지혜롭겠다.

한승욱

회화를 중심으로 글쓰기, 사진, 영상, 도자, 등을 다루며 창작하고 있습니다. 예술강사 활동을 했고 동료 예술가들과 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환경 활동을 하고, 탐조를 즐깁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간사로 일하며 창작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댓글 2

  1. 담백한 문장과 소박한 인상으로 그려지는 탐조활동의 풍경을 간접 참여한 듯 즐기고 있었는데, 조심성 없는 방해꾼들의 만행에 제삼자에 불과한 저조차도 눈살이 찌푸려지는군요. 휴일을 깨뜨리는 불의의 방해에는 누구보다도 예민할 텐데요. 쉬어야 하는 이들을 쉬지 못하게 하는 고약한 짓은 좋지 않지요.
    두루미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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