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보고서의 현재적 의미와 대안

[9.21 기후행동 특별판] 호주보고서의 현재적 의미와 대안

지난 2019년 5월, 호주기후복원센터에서 발표한 정책보고서, 일명 《호주보고서》의 예상 시나리오는 참으로 비극적이고 절망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나리오인 만큼, 우리에게 좌절하고 주저앉지만 말고 필요한 조치를 즉각적으로 단행하자는 제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우리가 ‘탄소배출경제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지속하거나 확대할 경우’라는 단서를 둔다. 또한 이 시나리오에 따라서도 우리는 지금 당장은 아직 ‘돌이킬 수 없는 곳’ ‘파국적 임계점의 끝’에는 도달하지 않았으며, 길진 않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10-20여 년의 시간이 남아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에게 어떤 대안, 어떤 행동이 필요할까?

이 글에서 거론할 호주보고서는 《호주 기후복원센터》(단체 이름은 ‘돌파구’ ‘저지선의 파괴’ ‘터널이나 관문의 통과’ 등을 의미하는 브레이크쓰루breakthrough이다)가 편찬한 여러 편의 기후위기 보고서 중 2019년 5월에 발행한 「실존적인 기후관련 안보 위기-하나의 시나리오」를 말한다.

짧지만 의미심장한 이 기후보고서의 주제는 크게 3가지인데, 각각 첫째,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최근의 기후관련 보고서들이 가진 관점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 둘째, 현재의 지구온난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서의 ‘팻-테일’ 가능성을 도입하는 것, 셋째, 향후 30년 간 전개될 미래 기후위기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 발표에서는 이 각각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이러한 ‘팻-테일 리스크’(살찐 꼬리 위기 이론)를 발생시키는 사회․정치적 조건을 오늘날의 변화된 자본주의의 지형 위에서 이해하며,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통적인 것’의 가능성과 ‘민회’의 힘에 주목하고자 한다.

삶-안보와 기후통계의 한계

「실존적인 기후관련 안보위기」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기후’를 ‘안보위기’의 관점에서 제기한다는 데 있으며, 또한 이 위기를 당장 우리의 삶 안에서 펼쳐지는 ‘실존하는’ 문제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는 통상 기후위기를 이상기온과 해수면 상승, 농작물 피해 등 자연생태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환경 요인으로만 다루곤 하는데, 그보다는 생활의 위기, 정치․경제적 위기, 문화적 위기와 같은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위기 상황을 기후변화와 연결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안보’는 대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 일국의 군사적․이데올로기적 체제유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보고서에서 확인되듯 오늘날 기후위기는 생태계파괴, 식수 및 농업용수 부족, 이주 및 난민문제, 농업 및 축산물생산, 관광산업, 출생률감소, 국제정치, 문명의 보존, 환경운동들의 저항, 정치적 의사결정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총망라하는 인류 전체의 자기보존과 연동된 ‘생명의 안전보장’, 즉 ‘삶-안보’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위기는 현재 실재로 진행되고 있으며, 나아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불길한 신호들을 통해서 확인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호주보고서》는 삶-안보의 관점에서 “인류와 우리의 행성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관해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폭로”하고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 생명이 멸종”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 인류로 하여금 즉각적인 환경실천에 나서게 하기 위한 섬뜩한 경고문이자 절박한 선언문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기후관련 보고서들이나 기후과학들은 이런 ‘실존하는’ 위기를 (너무 파국적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혹은 예측을 벗어날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은 채 기존에 알려진 정보들 중에서도 반복적이고, 평균적인 수치만을 선별해 적용하는 ‘안전한 추론’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통계학에 기반한 기후과학의 여러 지식들은 너무 “보수적”이고 “조심스럽다.” 문제는 이러한 보수성과 지나친 조심스러움이 현재의 기후위기를 직시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오히려 큰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전세계 곳곳에서 범상치 않은 징후들(태평양을 떠다니면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쓰레기섬과 그에 따른 해양오염, 각종 생물군의 멸종, 해수면 상승, 이상기후, 잦은 지진 발생, 극지방의 빙하감소 등등)이 매일같이 확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견딜만하다고, 그러니 기후대책은 ‘실업대책’, ‘부패방지’, ‘외교분쟁’, ‘경제성장’과 같은 문제 뒤로 미뤄두자는 식의 사실상의 무대책상황을 방치하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

예컨대 UN 산하의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발간하는 《기후 평가보고서》들은 일반적인 기후모델에 의존하다보니 파괴적이고 수량화하기 어려운 결과들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수록 돌발적이거나 급격한 변화들은 평균을 벗어난 예외적인 사건으로 처리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화 이후의 피드백들이 가져올 파급효과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미국의 국방부나 정부기관들이 발간한 여러 형태의 보고서들이 2100년경에는 해수면이 적게는 2m에서 많게는 2.5m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한 반면, IPCC의 2014년 《제5차 평가보고서》는 그것에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0.55-0.82m 상승에 그칠 것이라고 ‘안전하게’ 예상한 바 있다. 크게 차이나지 않는 기초자료들을 확보한(그리고 서로 공유할 법한) 기관·단체들 간에 왜 이런 결과예측의 차이가 크게 발생한 것일까?

결국 주어진 자료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문제일 텐데, “개연적인 범위 이상의 해수면 상승은 신뢰할 만한 수준의 평가치는 아니다”라는 IPCC의 보충의견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하겠다. 얼마나 많은 그리고 다방면의 전문가들의 의견들을 반영할 것인가? 평균값을 추출하는 역사적 범위를 어디까지 둘 것인가? 기원 후에만 한정시킬 것인가, 아니면 지구 안에서 일어난 거대한 지질학적․기상학적 격변기까지 그래서 신생대나 고․중생대까지 확대해서 비교할 것인가? 국지적인 영역에서 발생한 이례적 기상현상을 통계에 중요지표로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기후를 예상한 결과는 큰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또 다른 사례로 IPCC의 《1.5°C 보고서》가 있다. IPCC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20년 뒤인 2040년 경 산업화 이전 대비 1.5°C 상승에 도달한다고 보았지만, 여기에는 인류의 탄소배출이 근래 수십 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대기 중의 구름이나 안개량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것, 최근 급변한 해양 순환조건(해류의 속도, 상승된 해수면, 기상이변에 따른 해류흐름 변화) 등등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더 많은 변수들을 고려한다면 IPCC의 예상 혹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어떤 기후학자들은 1.5°C는 10년 이내(즉 2030년)에 넘어서고, 2045년에는 2°C 이상 증가할 수도 있는 것으로 예측하기도 한다.

‘팻-테일 위기(살찐 꼬리 위기론)’

이러한 문제는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온난화 예측, 즉 80년 뒤인 “2100년경에는 지구온도가 3°C 이상 상승한다”에서도 확인된다. 이 수치 역시 근래들어 전례없는 규모와 속도로 확산되는 산업생산 및 탄소배출경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는데, 이를 반영한 데이빗 스프렛과 이안 던롭은 2100년경에는 그보다 훨씬 높은 5°C 상승에 이르고, 3°C 상승은 30년 뒤인 2050년 안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산업화 이전과 비교했을 때 지구온도의 3°C 상승은 인간생명활동에 “파국”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았는데, 상당수의 인류는 그 이전에 이미 (식량난, 열사병 등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 알려진 기후보고서들과는 달리 《호주보고서》와 그 연구자들의 기후예측이 이렇게 크게(심지어 상반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는)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주 기후복원센터》가 주목한 것은 ‘팻-테일 리스크’인데, 그들이 이 모델을 도입하는 이유는, 기후변화는 안전하고 조심스러운 예측에 머물러 있기에는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나 크고 치명적이며, 또 그것이 지구 전체를 무대로 펼쳐지는 거대한 변화이기에 고려해야 할 변수(세계 각 지역의 생태계상황 및 지형적 특성, 산업발전정도, 대기권의 변화, 해수면 상승분, 극지방의 얼음량, 사막화 정도, 강수량 등등)가 무한하게 산재해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예측모델로서 추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ClubStreetPost(CSP)
출처 : ClubStreetPost(CSP)

팻-테일 리스크(fat-tail risk), 즉 ‘살찐-꼬리 위기론’은 통계학의 정규분포의 양끝 부분이 예상치 못하게 두껍게 나타나는 현상을 지시한다. 정규분포란 평균값을 중심으로 종모양으로 배치돼 평균값이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꼬리(tail) 부분이 적어야 평균값의 의미가 강해지고 통계적 예측범위가 좁아져 예측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게 되는 데 반해, 꼬리가 두터워지다 보면 평균값의 의미가 떨어져 예측력이 낮아지게 된다. 어떤 특정한 사건들은 통상적인 통계 분포 상에서는 발생가능성이 희박하고 예측이 어렵지만 일단 발생하면 파국적인 피해를 낳는 경우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 가능성을 애써 무시하거나 심지어 전혀 발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대안을 마련하려는 노력조차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팻-테일 리스크는 바로 그렇게 예측되기 어렵고, 확률이 낮아 애써 무시했던 사건의 발생가능성이 기존의 평균값의 경우보다 높게 나타나는 현상을 위기형태에 반영하는 모델이다.

최근 이것은 주로 전지구적 금융시장의 예상치 못한 시장조건 및 주식시장 전개를 설명하고 관리하기 위해 등장하곤 하는데, 그 밖에 온난화에 따른 이상기후, 태풍․폭염․가뭄․지진․화산폭발 등의 자연재해, 이상기후 등으로 인한 전력량 및 에너지 소비의 폭발적 증가, 핵발전소 및 위험물보관 시설의 관리, 인구증가 및 인구감소 등과 같은 인간의 구체적 생활조건 전반에서 나타나는 위기형태들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팻-테일 리스크’ 상황은 오늘날의 전지구화(그리고 그로 인한 전지구적 네트워크망의 형성)와, 산업화에 따른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를 그 근본조건으로 삼는다. 즉 전지구화의 상황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생태 등등이 국지적인 어느 한 분야에서의 작은 변화에도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따라서 과학과 통계분석으로 쉽사리 예측되거나 파악될 수 없는 이상현상을 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세계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기’ 상황은 기존의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통계적․과학적으로 예측하곤 했던 향후 전망이 점점 더 높은 확률로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그 피해규모나 기간, 파급력을 한정된 분과적 지식으로는 산출하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준다.

이안 브레머와 프레스톤 키트에 따르면, ‘팻-테일 리스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위기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 위험을 단순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박한 위기상황이 발생될 때까지 왜 위기는 무시되는 것일까?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첫째 “리스크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예측이 불가능”하며, 둘째, ‘리스크를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존에 축적된 데이터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셋째, ‘리스크에 대한 대처는 규범이나 법규에 의존하곤 하는데, 이러한 리스크를 관리하도록 강제할 법이나 규범은 부재하거나 심지어 논의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

이 점에서 ‘팻-테일 리스크’에 대한 관리와 대안은 기존에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하되, 그러한 데이터의 평균적 결과에 안주하거나 평균치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는 선입견을 제거할 때 도출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팻-테일 리스크’에 대한 유용한 대안은 결국 평균값 역시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결과 예측의 범위를 가능한 최대치로 확대한 뒤 도출되는 가설을 세우는 것, 즉 가상의 시나리오 모델이 된다. 미래를 예측하는 시나리오 모델은 가상의 것이지만, 기존 자료의 최대 예상치의 한계 내에서 도출하는 만큼 비합리적인 공상과는 구별되며, 나아가 이 시나리오가 인류의 삶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올 것이라 예상되는 대상을 다루는 만큼, 그러한 위기와 위협을 준비하고 예방하는 방향으로 사고의 전환을 이끌 것이며, 그래서 이후에는 법과 규범, 행동규칙을 마련할 준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호주보고서》에 따르면, 실존적인 위기들에 직면할 때에는 “실수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다른 유형의 위기를 관리하는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발전된 제도들과 도덕규범들 또는 사회적 태도들에 의존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관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위기를 관리하는 접근법이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중도적인 확률을 평가하는 대신, 전에는 경험한 적 없는 최대치의 확률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2

《호주보고서》는 ‘팻-테일 분포’를 ‘기후관련 위기’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진단하는데 아래의 표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림. 기후관련 위기 도식, (a) 사건의 개연성(likehood), (b) 영향력 산출, (c) 위험도. 확률 분포의 최대치에서는 더 낮은 개연적 사건들이 최고도의 위험도를 띤다. (Credit: RT Sutton/E Hawkins).
그림. 기후관련 위기 도식, (a) 사건의 개연성(likehood), (b) 영향력 산출, (c) 위험도. 확률 분포의 최대치에서는 더 낮은 개연적 사건들이 최고도의 위험도를 띤다. (Credit: RT Sutton/E Hawkins).

가장 왼쪽표에서는 기후반응이 오른쪽으로 갈수록(도표의 6.0-7.5) 평균치보다 더 일어날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영향력이나 위험도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높아지거나 최대치로 치솟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호주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극지방의 빙하층과 그에 따른 해수면 변화, 영구동결표층, 여타 탄소저장량과 같은 잠재적인 기후 임계점과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 이때 기후 임계점은 인간의 시간규모에서는 되돌릴 수 없는, 기후체계에서의 큰 변화를 야기하는 임계문턱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가진 과학지식으로는 이 임계점에서의 “지구온난화의 충격”이 충분히 고려대상으로 파악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2050년 시나리오

《호주보고서》가 예상한 2050년 시나리오를 간략히 살펴보자.


2020년-2030년: 정책입안자들은 현재의 《IPCC 보고서》나 《파리기후협정》의 방향이 2100년까지는 3°C 온난화에 묶여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삼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탄소 제로배출 경제를 세워 온난화를 2°C 이하로 유지하자는 견해를 무시한다. 2030년경 이산화탄소 수치는 437ppm, 온난화는 1.6°C에 달한다.

2030년-2050년: 탄소배출이 2030년에 정점에 이르고 이제는 하강곡선에 접어든다. 그만큼 에너지 집약도는 이전보다 떨어지며 그에 따른 효과가 나타난다. 2050년경에는 온난화가 산업화 이전에 비해 2.4°C 증가하는데, ‘얼음 및 구름 반사율에 따른 피드백’을 적용하면 0.6°C 더해져 총 3°C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극단적인 수치가 아니다. 쉬와 라마나단은 온난화의 주변효과가 상승작용을 일으킨다고 가정했을 때 최악의 경우는 3.5-4°C 상승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되기도 한다.

2050년: 3°C 상승 이전에 이미 이상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승인된다. 기온이 1.5°C 뜨거워지기 전 남극의 빙하층은 시스템 임계점에 도달했고, 북극의 여름에는 빙하가 없어진다. 2°C 전에는 그린란드의 빙하층이 시스템 임계점을 넘어서며, 2.5°C에 이르면 넓은 영구동토층이 유실되고, 아마존에는 대규모 가뭄과 고사병이 발생한다. “온실지구”가 현실화되며, 지구는 다른 수준의 온난화 상황을 향해 나아간다. 해수면은 0.5m 상승하고, 파도의 높이는 전례에 비춰봤을 때 25m 이상으로 치솟을 것이다. 지구 육지의 35%, 지구 인구의 55%가 생존이 불가능한 치명적인 태양열 조건에 1년 중 20일 이상 노출된다. 제트기류의 불안정화는 멕시코 만류의 유속을 느리게 만들며, 아시아와 서아프리카의 장마의 강도와 지리적 분포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유럽의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 북아메리카는 들불, 폭염, 가뭄, 침수 등의 이상기후를 겪는다. 중국의 여름 장마기가 망쳐지고, 히말라야 얼음층의 1/3 유실로 인해 아시아의 큰 강들에 흘러들어가는 유수량이 심각하게 감소한다. 안데스 산맥의 빙하유실이 70%에 달하고,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강우량이 절반으로 떨어진다. 반(半) 영구적 엘리뇨 현상이 만연한다. 세계의 지표면의 30% 이상에서 건조지대화가 나타난다. 남아프리카, 지중해 남부, 서아시아, 중동, 호주 내륙, 미국 남서부 전역 등에서는 극심한 사막화가 일어난다.

2050년 이후: 산호초 생태계, 아마존 우림지대, 북극 등을 포함한 여러 생태계들이 붕괴한다. 자국 주민들에게 인위적으로 시원한 환경을 제공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나라들과 지역들은 독자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치명적인 태양열 조건이 서아프리카, 남미의 열대지방, 중동, 동남아시아 등에서 1년에 100일 이상 지속한다. 이는 열대지대에 살던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을 난민으로 내몬다. 위도가 더 낮은 지역(건조한 열대지방, 아열대 지역)에서 식수와 농수로 이용가능한 물이 급격히 감소한다. 전세계 2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에 영향을 받는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식량 생산이 현저히 감소하고, 폭염, 홍수, 태풍과 같은 극단적인 기상 이변들이 증가한다. 식량 생산은 전지구의 주민들이 먹고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으며, 식량 가격이 급등한다. 이것은 주요 식량 생산 지역들에서의 곡물 수확량의 1/5 감소, 식량의 작물 영양 성분 감소, 곤충 개체수의 파국적 감소, 만성적인 사막화, 우기실패, 물부족이 나타난다. 메콩강, 갠지스강, 나일강과 같은 농업적으로 중요한 삼각주의 하류지역들이 침수되고, 첸나이, 뭄바이, 자카르타, 광저우, 톈진, 홍콩, 호치민시, 상하이, 라고스, 방콕, 마닐라 등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일부 도시들의 주요 지역들에서 사람들이 떠난다. 몇몇 작은 섬들은 거주가 불가능해진다. 방글라데시의 10%가 침수되고, 1500만 명의 사람들이 난민으로 내몰린다. 2℃의 온난화로도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주할 필요가 발생하며,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우리가 수치화할 수조차 없는 파괴가 일어날 것이며, 이때 인류 문명은 종말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국가 안보: 지구 환경에서의 거대하고 비선형적인 사건들이 거대하고 비선형적인 사회적 사건들을 발생시킨다. 세계 곳곳의 국가들은 유행병과 같은 치명적인 도전들과 변화의 규모에 의해 압도될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국가들은 중압감에 시달릴 것이며, 이는 이민의 극적인 증가뿐 아니라 농경방식과 가용 수자원에서의 변화가 야기한 결과이다. 나일강과 그 지류들 등지에서 자원을 둘러싸고 국가들 간의 무력 분쟁이 발생하며 핵전쟁도 가능하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급력은 종교적 맹신의 증가에서 전면적인 혼돈까지 걸쳐 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기후 변화가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에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호주보고서》의 이러한 예상 시나리오는 참으로 비극적이고 절망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하나의 시나리오인 만큼 우리에게는 좌절하고 주저앉지만 말고 필요한 조치를 즉각적으로 단행하자는 제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우리가 ‘탄소배출경제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지속하거나 확대할 경우’라는 단서를 둔다. 또한 이 시나리오에 따라서도 우리는 지금 당장은 아직 ‘돌이킬 수 없는 곳’ ‘파국적 임계점의 끝’에는 도달하지 않았으며, 길진 않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10-20여년의 시간(시나리오는 현재 상태로 30년이 지속된다면 파국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이 남아있는 셈이다.

어떤 대안, 어떤 행동이 필요할까? 《호주보고서》는 바로 이러한 긴급함과 절실함에 기반해 전쟁시기에 준하는 인력과 자원을 “전사회적으로 긴급 동원”할 것을 주장하며, 그만큼 일사분란하게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리더십이 위계적이고 수목적인 명령 구조 속에서만 발견될 것이라는 점을 이들이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현재의 전지구가 도달한 정치적 수준을 고려했을 때, 실현될 수 없는 대안이다. 어느 국가의 어떤 시민도, 이들이 생각하듯 정보 및 안보기관이 주도하는 위계적이며, 심지어 군사적이기까지 한 그런 리더십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강대국 미국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은 《파리기후협정》조차도 자국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탈퇴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UN이나 국제노동기구, 혹은 WTO나 IMF와 같은 국제기구들 혹은 유럽연합이나 G20과 같은 국가연합이 그것을 담당할 수 있을까? 국제기구들과 국가연합체들이 대안적 기후정책에 일정한 관심을 보일 수는 있으나, 초국가적 국제기구들은 미국과 같은 특정 국가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 이용되거나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며, 국가연합체들 역시 장기적인 대안을 수립하기에는 당장의 자국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그때그때 막기에도 벅차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가능한가?

오늘날 자본의 추출주의

대안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호주보고서》가 가진 한계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호주보고서》는 전지구적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안보기관에 역할을 강조하며, 결국 전시상태에 준하는 대책을 수립해 일사분란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고 그러다보니 기후위기와 ‘민주주의’가 연결될 수 있는 상상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인구와 자원을 총동원하고, 탄소배출경제를 중단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이들의 견해를 비틀어서 리더십이 꼭 소수의 정치엘리트나, 정당, 국가기관이 발휘하는 것이 아닌, 전지구인들의 결집,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탄소배출경제에 항의하는 시민들, 다양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오늘날의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에게 돌려줄 방법은 없는가? 즉 여성들, 청년들, 학생들, 노동자들, 프리랜서들, 예술가들이 서로 수평적으로 결집된 민주적 다중의 리더십은 어떨까?

이러한 리더십이 다중에게 종속되어야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지구와 생태계들은 인류 중 누구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공통적인 것으로, 우리 모두가 그것의 손상과 파괴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적소유나 국가의 이해관계의 논리가 그것들을 보존할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지구를 공통적인 것으로 다뤄야 하며, 그래서 지구와 생태계 및 우리의 미래를 돌보고 보장하는 집단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오늘날의 생산자들이자 오늘날의 주체성은 비물질적인 부의 형태들(즉 아이디어, 코드, 이미지, 문화생산물들 등)을 서로 자유롭고 협력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소유형태로 묶어두려는 자본의 운동에 저항하면서, 전지구인들의 공통된 인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거리에 모이는 무수한 사람들(설혹 가장 극단적인 보수주의적 목소리를 낼 때조차)은 국가관료나 정치인들에 의해 내려지는 결정의 이면에서 그러한 결정의 본질적이고 집단적인 힘으로 기능한다. 셋째, 탄소배출 경제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자본과 기업이지만, 그들의 온갖 상품들은 바로 우리 자신인 다중과 시민들에 의해 소비되며, 결국 이러한 경제를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실행할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임을 파악한다면, 기후위기를 극복할 가장 적극적이고 실행가능한 대안은 위로부터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요구하는 힘들의 민주적 의사결정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탄소배출 경제 속에서 구축된 커뮤니케이션 도구들, 전지구적 네트워크망, 소비양식, 공유능력 등이 그러한 탄소배출 경제를 극복할 가장 극적인 대안으로 기능하며, 그때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 소비, 생산, 소통(교류)을 재검토하면서 우리 안에서 대안을 향한 길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과 생태계를 지키고 방어하기 위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데 반해, 오늘날의 자본(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추출자본주의로 발전한 오늘날의 자본)은 우리의 욕망과는 달리 늘 이윤동기로 움직여왔고, 현재도 그러하다. 이윤동기로 움직이는 자본이 오늘날의 기후위기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자본의 이윤추출 형태가 오늘날 산업자본보다 더 강력하게 생태파괴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자본의 이윤‘추출’ 형태 속에서 파악해보자.

산업자본이 공장노동자의 노동력을 임금형태로 구매해서 강제로 생산시킨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이윤을 증식했던 데 반해, 오늘날의 자본인 금융자본은 레닌이 말한 바 있듯이, “산업자본 혹은 생산자본으로부터 분리되며, … 금융자본에서 얻은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는 금리생활자는 기업가와 분리되며, 직접적으로 자본의 경영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과 분리된다.” 금융자본(그리고 자본의 축적전략)의 열쇠는 생산현장이 아닌 대지의 부와 사회적 협력 및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부를 어떻게 추출하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날 전반적인 자본의 이윤전략이 산업생산에서 금융수익(이른바 ‘지대’ 형태)으로 이행함에 따라, 추출의 중요성은 점점 사회 전분야의 지배전략으로 확산된다. 자본이 생산과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원격적으로(추상적으로) 이윤을 추출한다는 점에서, 토지로부터 추출되는 에너지 자원들은 금융자본의 좋은 수익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추출의 여러 얼굴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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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지구와 그 생태계(석유, 산림, 강, 바다, 대기)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성경에서 말하듯 인간들이 “모든 대지를 … 지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돌봄과 지속 가능한 사용의 관계를 함께 수립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통상 지구의 표층과 심층에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추출하는 것은 불의(不義)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심지어는 파국적인 파괴의 전망을 낳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과 상품화는 오랫동안 파괴적 영향을 미쳐왔다. 추출주의는 오늘날 어떤 점에서는 이 파괴의 과정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본 대 지구, 둘 중 하나만 생존할 수 있다. 둘 다 생존하지는 못한다. 추출산업, 특히 에너지 산업이 환경과 사회를 파괴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해양굴착에 따른 대규모 유출 및 운반사고는 석유산업의 항구적인 부작용이었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구 곳곳에 점을 찍으면서 점점 그 파괴의 크기와 빈도가 증가할 뿐이다. 멕시코 만, 우즈베키스탄, 쿠웨이트, 앙골라 등등. 석탄채굴과 금속채굴 방식은 광부의 건강과 광산 주변의 환경을 계속적으로 파괴했다. 추출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페르시아만의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여러 나라들이 화석연료 회사처럼 행동하게 됨(그들의 사업전망이 석유가격을 상승 및 하락시킨다)에 따라 어떤 측면에서는 경제의 ‘재시초화(reprimarization)’(채광, 석유, 목축과 같은 1차 부문이 다시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것은 추출주의 전선의 극적 확대이다. 지구의 어느 구석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테크놀로지 산업에서 금속이 지닌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초소형 배터리를 위해 볼리비아의 소금평지에서 리튬광산을 개발하고, 다양한 디지털 및 하이테크 장비를 위해 중국에서 희토류 광산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지구 전역에서 자본의 쟁탈전이 벌어진다. 더욱이 기술발전에 따른 이윤경쟁과 높은 석유가격은 석유, 가스, 광물 추출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캐나다 앨버타의 타르샌드 유정, 미국의 프랙킹/수압균열법(셰일 가스의 시추방식)과 같은 방법은 새로운 지진 지대를 발생시키고, 대기와 지하수를 오염시킨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방법보다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또한 대규모 농업도 여러 측면에서 추출 산업이 되었다. 대규모 농장에서 자란 옥수수나 콩이 식품이나 사료로의 숙명을 거슬러 에탄올과 플라스틱의 생산에 직접 투입될 때, 옥수수 밭이나 콩 밭은 유정이나 광산과 다르지 않게 된다. 추출산업은 땅으로부터 추출해서 얻은 부의 형태인 에너지와 농업·광업자원을 흡수한다. 삼림파괴에서 농약의 사용까지 이것들이 가져오는 환경파괴의 수준은 이전의 산업자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나아가 추출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기후변화의 전망에 의해 한 등급 더 높아진다. 과거에는 사고로 인해, 유정과 탄광으로 인해 생기는 오염과 파괴가 비교적 지역에 국한되고 잠재적으로는 역전 가능한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반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괴의 전망이 내재한다. 지구 기온이 평균 2°C 이상 치솟지 않으려면 석탄 및 석유 매장량의 80%가 땅 속에 그대로 묻힌 채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추출주의는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에 저항하는 것의 긴급성을 극대화시킨다.

이러한 추출주의는 생태계와 대지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인간 신체로부터의 추출(유전자 정보 추출), 데이터 추출(구굴의 페이지랭크와 같은 검색엔진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의 만들어낸 지식에 가치를 부과하고 포획하는 방식으로 부를 추출한다), 사회적 영토/부동산에 대한 추출(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공통적인 가치, 예술적 감성, 혁신을 통한 특정 도시 지역의 가치상승은 오늘날 자본의 추출의 좋은 먹잇감이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 바로 이것이다.) 협력형태와 문화적 가치 추출(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아이디어들, 새로운 소통방식, 놀이형태, 사랑의 방식, 춤, 노래 등등에 대한 저작권 설정이나 재상품화) 등등.

오늘날 추출은 산업과 달리 상당한 정도로 자본의 관여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부의 형태들에 의존한다. 자동차는 공장에서 생산되지만, 석유와 석탄은 지구 속에 이미 존재한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가 부과하는 시간표와 규율에 따라 협력하지만, 오늘날은 가치가 자본에 의해 직접 조직되지 않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협력을 통해 생산된다. 오늘날 자본 운동의 초점은 이윤에서 지대로 그 중심성이 이행했다. 산업자본가들이 이윤을 위해 노동을 훈육하고 착취하는 데 반해, 지대소득자는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며 생산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기존의 부를 축적한다.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다중의 리더십

다중의 리더십은 세상에 없던 어떤 것을 새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지난 수십 년간 만들어왔고 또 발휘해왔던 무엇이다. 대형재난과 생태적 재난(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포항지진)이 있었던 곳, 산업자본의 개발사업(그리고 오늘날에는 점점 더 금융자본이 주도하는)에 맞서는 투쟁(천성산과 새만금,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투쟁, 강원도 골프장 건립반대 투쟁 등) 군사기지 건설과 무기배치에 맞서 국가와 싸웠던 투쟁들(강정마을, 사드반대 투쟁), 핵발전소 관련 시설에 대한 반대투쟁(부안과 경주)이 있었던 곳에서 사람들은 함께 투쟁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을 통해 그들 자신의 삶의 안전을 방어하고자 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시기 동안 공통적인 것을 방어(산림, 농경지, 고향, 해안가, 지역 등과 포함하여 자기 자신과 가족의 생명)하면서 동시에 바로 자신들을 공통적인 것 자체로, 공통체로 구성하면서 자본과 국가의 정치엘리트들의 결정에 지성과 협동력으로 맞섰고, 그 과정에서 민주적 참여를 통한 의사결정의 모델을, 즉 연대하고 나누고 싸우고 결정하는 인간들 집단을 구성했다.

싸우면서 사랑하고, 반대하면서 구성하며, 자본과 국가의 리더십을 무너뜨리면서 생명과 다중의 리더십을 건설하는 이 상반된 방향의 몸짓이 지금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분명하다. 온난화와 기후변화로 나타나는 생태적 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만 불균형하게 당하는 생태적 폭력은 거의 언제나 조용히 발생하며, 안개 안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레이트 오스트레일리아만 심해 석유탐사에 따른 생태파괴와 ‘태안 기름 유출 사건’와 같이 언론이 주목한 사건들도 문제지만, 그 이면에서 상대적으로 언론의 관심을 덜 받는 무수한 생태적 재앙들은 아주 명시적인 책임관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대체로 자연세계의 이상적인 움직임 정도로만 비추어졌다.(포항지진을 일으킨 원인에 지열발전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도 무수한 시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해보자!) 생태적 재앙들은 조금씩 지구와 그 생태계를 오염 및 파괴하며, 강과 호수에는 독극물을, 해양에는 다량의 폐플라스틱을, 숨쉬기 어려운 공기, 발암물질로 가득한 토양을 남겨놓는다. 보이지 않은 이 다양한 형태의 생태적 폭력을 가시적으로 만들려는 도전은 이중의 어려움을 겪는데, 그 효과가 대체로 지연되며 천천히 느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적 지연으로 인한, 하지만 위험하고 치명적인 폭력! 기후변화는 생태적 폭력의 복잡한 시간성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그 효과가 결국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싸울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완전히 닫히기 때문이다. 생태파괴와 생태변화의 폭력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빈자(그리고 아이들, 노인들, 여성들과 같은 권력위계의 하위에 있는 이들)와 농업생산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땅에 가장 직접적으로 의지하고 또 방어력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지구와 그 생태계를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이 환경파괴의 결과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이용의 기회를 공유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전지구 사회가 우리가 지구와 맺는 관계를 관리하고 지구를 돌보기 위한 민주적 구조를 발전시키길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기업들이나 국가 통치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기존의 재앙들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다른 사례의 현장으로는 과학적 지식과 문화생산물을 공유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부를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 이미 관리 메커니즘들이 수립되고 있다. 모든 사회적 부의 형태들은 사적소유의 지배와 국가통제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그래서 공통적인 것의 형태에 개방될 수 있다.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공유하면 할수록 우리 모두는 더욱더 풍요로워진다.

‘오픈액세스’와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관리에 대한 요구 또한 널리 퍼져 있다. 오늘날 사적 소유는 지구와 그 생태계를 보호하기는커녕 그 파괴를 촉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적 소유는 지식,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형태의 부를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촉진하지도 못한다. 신자유주의적인 추출 경제는 소수를 위해서는 이윤을 성공적으로 창출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회발전에는 족쇄가 되었다. 모이고 협동하고 사회적 삶을 같이 생산할 자유에는 모든 형태의 공통적인 것을 지속 가능하게 돌보고 사용할 수 있는 관계들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은 사회적 생산에 필수조건이며 그 미래는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일단 우리가 생산을 삶형태의 창출로서 사회적으로 이해한다면 공통적인 것에의 권리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수단을 재전유할 권리와 중첩된다. 우리 자신은 공통적인 것이며,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을 위해 싸우고, 그 과정에서 다시 우리 자신을 공통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새롭고 안전한 삶을,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 말이다!

  1. 이언 베르머․프레스톤 키트, 『팻테일』, 한상석 옮김, 현대경제연구원, 2010, 23-24쪽.

  2. 또한 《미국 진흥회의 보고서》도 이러한 기후위기의 ‘팻-테일’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부분의 기후 변화 이론들은 앞으로 온실가스 배출량, 기온 상승, 해수면 상승 등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 추정한다. 일정 정도의 온실가스는 일정 정도의 기온 상승으로 이어지고, 다시 일정 정도의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후와 관련한 지질학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기후를 구성하는 한 가지 요소의 지극히 미미한 변화가 기후 시스템 전체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진 순간들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기온이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예측할 방법도 역전시킬 방법도 없는 엄청난 파괴력과 대규모 충격과 함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그 단계에 들어서면 인류가 더 이상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과정들이 전개될 것이다. 기후 급제동에 따른 통제 불능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후 문제와 그로 인한 파급 효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 과학 진흥회의 보고서》(2014년)를 보라.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자본주의 대 기후』, 최재천 옮김, 열린 책들, 2016, 16쪽 재인용.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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