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⑦ 사랑이 시작됐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철학자 스피노자, 문인 카프카는 절절하게 사랑을 바치는 여성이 있었음에도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자유를 속박당할 것이 두려워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일상을 영원한 시간으로 만드는 힘 또한 사랑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물쭈물했던 부끄러운 순간들

결혼 2년차, 맞벌이부부였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맞벌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저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출강하는 시간강사였고, 아내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요. 사실상의 가장이었던 아내는 살림과 경제활동을 하느라 녹초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고, 저는 시간강사 자리 하나 가지고 남는 시간은 책을 읽으며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는 전쟁 같은 시절이었겠지만, 저는 공자왈 맹자왈 책에 파묻혀 지냈던 것이지요. 언젠가부터 아내는 부쩍 힘겨워 보였습니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고, 슈퍼우먼 같은 삶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저는 딱 한마디를 하고 싶었습니다. “당장 직장 때려치우고 같이 공부하자!”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우물쭈물 미루면서, 도망치듯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엎치락뒤치락하며 생각에 빠져들었지요. 저로서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이지만, 아내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저는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났지요.

1년이 지나자 갑자기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때 저는 연구 프로젝트며 책이며 논문이며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때 우물쭈물했던 저 자신이 무척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지요. 어느 날 저녁 아내에게 술 한 잔 하자고 말했고, 우리 두 사람은 오랜만에 웃으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지요. 저는 아내에게 “우리 함께 연구실에 나가서 공부하자, 직장 그만둬”라고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내는 당장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사직서를 냈지요. 그날 이후로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걸어서 연구실로 출근했습니다. 지금까지 6년째이지만 그렇다고 제 우물쭈물이 우쭐로 바뀌지는 못했습니다. 살림 걱정, 세금 걱정, 집세 걱정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내와 저는 함께 공부하면서 그 어려운 과정을 이겨냈습니다. 아내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와 가타리를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처음으로 함께 쓴 책이 스피노자와 관련된 책이기도 합니다.

결혼 앞에서 우물쭈물했던 철학자

사랑은 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던 철학자.
사진 출처: MarinaPanina

스피노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지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약혼을 세 번이나 하고, 파혼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같은 사람이랑 말입니다. 그가 우물쭈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약혼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나 그는 가슴 절절하게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편지도 많이 썼다고 합니다. 그런 그를 망설이게 한 이유는 바로 결혼제도입니다. 당시는 봉건제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결혼은 가문과 명예, 사업, 재산, 지위 등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로서는 약혼녀를 사랑하면서도 결혼이 불러올 자유에 대한 억압을 고심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유를 선택했습니다. 그가 약혼녀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결혼은 하지 않았던 데는 그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담은 『에티카』의 집필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던 것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에티카』의 정교한 기하학적 내용으로 짐작해볼 때, 소박하고 단순한 삶 말고 스피노자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이유도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약혼녀 입장에서 세상에 스피노자처럼 나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 편지를 통해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스피노자는 자유를 얻었지만, 약혼녀는 사랑과 젊음과 노력을 소진했다고 말한다면 이상하게 들릴까요? 물론 약혼녀는 스피노자와 결별한 후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혼생활이 행복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검약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신조로 삼아 외로이 집필에 매진해야 했던 고독한 철학자와의 결혼생활보다는 안정적이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스피노자는 약혼녀와 자신의 사상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그녀를 놔주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스피노자처럼 약혼과 파혼을 반복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체코의 문학의 특이자 프란츠 카프카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 펠리체 파우어와 약혼했다가 파혼하기를 두 번 반복합니다. 카프카는 결혼제도 속에서 당대를 지배했던 관료주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혼이 보장하는 안락과 안정된 삶에서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 예속되는 삶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성과의 결혼에 대해 고민도 방황도 모색도 많이 했습니다. 카프카가 스피노자처럼 약혼과 파혼을 반복했던 이유는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카프카는 약혼녀 펠리체 파우어에게 무려 545통의 편지를 씁니다. 그만큼 가슴 절절한 사랑도 없을 겁니다. 스피노자도 약혼녀에게 편지를 많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카프카와 스피노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토록 많은 편지를 주고받고,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면서도 끝내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결혼제도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방황하고 배회했던 것일까요?

사랑한다는 것은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 것.
사진 출처: Mylene2401

저는 여기서 사랑에 대해서 변호를 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오히려 자유를 선물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 앞에서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사랑할 자유를 빼앗긴 사람만큼 노예상태와 예속상태에 빠진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자기원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스피노자는 ‘자유인’이라고 봅니다. 반대로 예속을 영예로 알고 복종을 사랑하고 욕망하는 사람은 ‘예속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인과 예속인의 갈림길에는 사랑할 자유를 갖고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척도인 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에 있습니다. 결혼제도는 자유로운 사랑을 제도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집안, 가문, 명예, 재산, 양육과 같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타율적인 방향으로 향하도록 유도합니다. 그 결과 자유롭고 자율적이었던 사랑의 강렬함은 비루하고 똑딱거리는 일상으로 포섭되어버리는 셈이지요. 스피노자의 방황에 대해 살짝 공감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목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봉건적 삶은 자유로운 현대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히려 스피노자가 영원한 현대인이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무의식에는 미래가 없는가?

무의식(unconsciousness)을 발견한 사람이 프로이트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처음 창시한 사람은 스피노자입니다. 프로이트보다 300년 전 사람인 걸 고려하면, 정말 놀라운 사실이지요. 그러나 스피노자는 무의식을 개인이 품고 있는 관념이나 내면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배치와 관계망에서 서식하는 마음이라고 보았는데, 그 내용은 스피노자의 정서의 기하학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꿈을 가지고 심리상담을 한다면, 꿈의 내용을 유심히 듣는 것이 아니라 꿈의 배치, 꿈자리에 대해 더 주목하는 방식이지요. 스피노자를 계승한 21세기 사상가 펠릭스 가타리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 엄청나게 망상적인 꿈을 꾸고, 심리치료사인 장 우리 박사를 찾아갑니다. 장 우리 박사는 꿈 내용을 열심히 듣는 듯하다가 “어느 쪽으로 누워서 자나요?” 하고 묻습니다. 가타리가 오른쪽으로 누워 잔다고 하자, 장 우리 박사는 왼쪽으로 누워 자보라고 말합니다. 이 경험이 이후 가타리의 ‘배치(agencement)’ 개념의 단서가 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장 우리 박사는 꿈 내용에 대해 말하는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꿈자리에 대해 말하는 거의 완벽한 스피노자주의자입니다.

21세기는 미디어에 의해 대량으로 무의식이 생산되는 시대입니다. 시청자들의 무의식을 자극해서 더 많은 소비를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 중 하나니까요. 그래서 스피노자가 창안한 무의식이 현실이 된 시대이기도 하지요. 문제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에서 대량 발신되는 무의식이 어떤 배치와 자리, 관계망에서 생산되는지를 묻지 않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무의식을 대중이 소비하고 향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서의 기하학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가 소비하고 향유하는 미디어라는 무의식의 배치가 자신을 소외시키고 구경꾼으로 전락시키지는 않는지 사유할 필요가 생깁니다.

스피노자는 거머리나 벌레가 서로 엉켜서 싸우는 장면을 보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조금 잔인하게 느껴지겠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고, 미래가 아닌 지금-여기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들의 생각을 잘 관찰해보면, 그들에게는 지금-여기의 무의식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동물은 현재라는 시간에서만 산다는 의미입니다.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은 무의식의 특징은 무시간성, 무역사성, 무장소성라고 말하지요. 무의식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수신됩니다. 그것은 서로 어긋나고 모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무의식의 좌표는 원인과 결과의 시간차에 따라 나타나는 논리적인 것이나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무의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을까요?

어떤 점에서, 스피노자의 해법은 역사의 흐름과 같은 장기기억을 가진 인간에게가 아니라, 동물과 같은 단기기억을 가진 존재들에게나 어울릴 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좌표, 즉 무의식의 좌표는 욕망의 자기원인에 따라 작동합니다. 즉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는 욕망의 질문에 따라 우리는 미래로 향하고 있는 셈입니다. 현재라는 지금-여기는 어떤 일관된 미래의 방향성으로 향하는 여정 중 하나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미래로 향하는 욕망, 사랑, 변용, 정동의 흐름에 따라 무의식 문제의 해법을 말하고 있지요. 무의식의 무시간성, 무역사성, 무장소성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욕망과 사랑의 흐름을 타고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가 더 중요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구도에서는 미래진행형적 무의식, 즉 역사적 무의식이 가능해집니다. 역사적 무의식은 욕망의 방향성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여기의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은 이 순간을 영원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rihaij

아내와 함께 출퇴근하며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연구실 앞 길냥이급식소의 단골손님이던 대심이라는 고양이를 연구실 안으로 들일 것인가의 여부였습니다. 대심이의 애교 섞인 재롱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대심이 얘기만 나오면 우리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지요. 대화 주제도 대심이가 사료를 다른 고양이에게 양보했다거나, 대심이가 끈을 가지고 놀았다거나 그런 소소한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슬며시 “대심이가 우리 연구실에서 살면 어떨까?” 하며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아내는 번번이 퇴짜를 놓았지요. 아내는 하나의 생명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습니다. 길냥이로서 충만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녀석을 좁은 연구실에 가두어두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판단도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심이는 연구실의 지금-여기를 만들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연구실에서 작업하다가도 가끔 대심이 어디 갔나 찾아보고, 대심이 무얼 하나 알아보고, 대심이랑 놀아야 할까 등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아내와 함께 출근하는 길에 대심이가 인근 중학교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녀석의 특기인 ‘발라당’을 선보이며 재롱을 피우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화단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지요. 꽃과 길냥이와 아내라는 세 존재가 저에게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들 생명과 자연의 일부이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욕망의 존재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참 기쁜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의 사랑과 욕망의 능력은 내 안에 있는 자연과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에, 생명과 자연과의 접속은 사랑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것만 같습니다. 대심이를 연구실 식구로 만들겠다는 저의 소원은 길냥이로 지내던 대심이가 그해 여름 방광염을 심하게 앓으면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픈 녀석을 더 이상 밖에서 생활하게 둘 수 없다는 판단이었지요. 그 후로 대심이는 연구실에서 ‘발라당’을 하면서 제 곁에서 잠들고, 제 손이나 키보드, 마우스를 가지고 장난하며 소일했습니다. 그 시간은 지금-여기라는 찰나의 시간을 풍부하고도 충만하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아내와 저의 시간은 대심이와 합일되어 세상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찰나의 사랑이라는 순간이 되었지요. 그 순간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개방하다

사랑은 ‘지금-여기’의 순간을 개방합니다. 그것은 특이점(singularity)으로 미래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그것을 영원성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특이점은 사랑이 개방한 색다른 차원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삶의 시간들이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지속되는 반면, 사랑이 개방한 새로운 특이점은 색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를테면 대심이에 대한 지금-여기의 사랑의 시간이 대심이를 우리 삶으로 깊숙이 끌어들인 색다른 삶의 차원을 개방한 것도 그런 예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나타난 지금-여기의 순간은 우리를 심원한 변화의 미래로 이끕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여기의 순간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즉 동물처럼 현재만 산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고, 오히려 더 미래지향적일 수 있는 셈이지요,

어떤 이는 이 대목에서 발끈할지도 모릅니다. 욕망, 무의식, 감각의 존재인 동물처럼 지금-여기의 시간에 충실하게 산다면, 어떻게 미래를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지금-여기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외에 미래를 개방하고 문명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지금-여기들이 모여 미래를 만들어내니까요. 그러므로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지금-여기라는 사랑의 특이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은 “네가 원하는 게 뭐지?”라는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현실을 바꾸어나가는 순간에 마주치는 것이 지금-여기의 순간이지요. 욕망이 현실과 합일되는 지금-여기의 순간은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비루한 시간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고 기억되는 시간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인생의 첫 번째 책을 탈고하던 날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6개월 동안 써오던 책의 마지막 단락,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담배 한 개비에 이제 막 불을 붙인 상황에서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술자리에 나오라는 지인의 갑작스러운 전화였습니다. 그렇게 예정에 없이 불려나간 술자리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지요. 저는 그 순간이 바로 지금-여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더불어 아내에게 느끼는 사랑과 애정이 사라져버릴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지금-여기의 차원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지금보다 훨씬 자존감이 높았고, 자신감도 있었지요. 그래서 사랑의 자기원인에 따라 색다른 차원을 개방할 능력이 있었고, 색다른 차원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와 처음으로 마주쳤던 순간, 즉 지금-여기의 순간은 우발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개방하는 색다른 차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원인을 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 즉 특이점의 순간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사랑은 무능함이나 예속이 아니라, 자유, 유능함, 지혜에 가깝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6개월 동안 열애하다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무작정 짐을 싸서 아내 집으로 찾아갔지요. 아내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달리 하는 일 없이 지내던 반백수 상태였지요. 저는 아내가 출근하면 집에서 혼자 이것저것 모색하며 놀았습니다. 막연하게 환경, 생태, 생명과 관련한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에 한 작은 공동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공동체 ‘초록정치연대’는 한국에 녹색당을 만들어보겠다고, 몇몇 시민활동가들이 만든 단체였습니다. 아내에게 이런 곳도 있다던데 내가 활동하면 어떨까, 하고 말을 꺼냈지요. 아내는 저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라며 면접 잘 보라고 새 옷까지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최종 합격되자 제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외식을 하면서, 활동가가 된 저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소박하고 따뜻한 응원이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완전히 다른 차원과 접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또한 사랑이 개방한 색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저는 그 공동체가 갖는 가치와 윤리, 미학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꾸준히 생명운동, 환경운동, 녹색운동 등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처럼 새로운 의제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이지만, 지금-여기를 만들었던 사랑의 순간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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