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①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지금까지 협동조합운동은 대안적인 가치를 제시하면 사람들이 자동으로 모이는 형태의 운동을 지속해 왔다. 하지만 무차별사회, 저성장, 기후위기 국면에서 기존 형태의 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제 협동조합운동은 정동을 통해 사회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시리즈는 2019년 봄에 진행한 〈한살림재단 생명협동연구〉의 결과물로서, 총 9회로 나누어 재게재될 예정이다.

.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1. 협동조합, 사업체와 결사체간의 긴장감과 위기의 전이

우리가 익히 아는 협동조합은 협동과 연대의 가치와 1인 1표의 민주적인 운영의 방식에 따라 작동하는 내부 결사체가 작동하고 있고 동시에 이에 따라 주식회사와 같은 기존 법인의 형태와 다른 사업체가 작동하고 있다. 주식회사는 주식지분을 얼마를 갖느냐에 따라 권력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주식을 얼마 갖느냐와 무관한 협동조합의 민주적인 운영방식과는 차이를 갖는다. 결사체를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고 일컬으며 이로부터 대안사회의 전망을 탐색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2012, b)라는 연구과정도 있을 정도니, 협동조합의 잠재력은 대안사회와 전환사회의 마중물이 되고, 복지, 일자리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길 만하다. 그러나 최근 저성장시대의 도래로 인해 협동조합에서 사업체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저성장시대는 자원의 감축과 활력의 상실, 고객의 소멸, 수익률의 감소뿐만 아니라 결사체의 응집력까지도 축소시키고 있다. 기존에 미리 전제된 것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기능 정지되는 느낌조차도 든다. 성장주의 시대 때는 모델링(modeling)이나 “~은 ~이다”라고 의미화를 하면 그 틀 내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던 모든 것들이 과정에 대한 개입과 관리가 없다면 자율성을 갖지 못하는 국면에 처한 것이다.

저성장 국면에서 사회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재건하고 만들어가야 할 행위의 결과물이 된다. 출처: Brian Merrill@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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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국면에서 사회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재건하고 만들어가야 할 행위의 결과물이 된다.
사진 출처 : Brian Merrill@Pixabay

일찍이 사회가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었던 때가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자상한 부모님과 안락한 집에서의 풍요로움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성장 시대에 사회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헤겔이 인륜적 공동체는 미리 주어져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립과 모순이 사회의 성숙으로 향한다는 변증법(Dialectics)의 구도를 선보였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칸트가 근대의 미리 주어진 선결조건으로서의 인간, 즉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를 상정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도 인간도 공동체도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구성하고 만들어나가야 할 과제가 되었다는 진단은 탈구조주의자들인 쥘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구성적 인간론(=주체성 생산)으로부터 제기되었다. 이제까지의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는 사실상 미리 전제된 사회를 소모하고 소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성장주의의 화신이었다. 성장주의 하에서는 사회는 당연하고 자동적인 것이고 미리 전제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원의 확장의 전망 속에서 사회는 풍부한 자원-에너지-부에 기반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동적으로 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사회는 풍요로운 자원에 기반한 일종의 사교적이고 문화적인 장일 수도 있었다. 시민들은 공통감각(common sense)에 따라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공감대와 합일, 일체감을 갖는 것이 언제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통감각이나 상식의 차원에서, 사회 곳곳에서, 사람들이 마주치는 가게에서나 지나치는 길거리에서 즉각적으로 사회와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은 낭만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저성장 국면에서 사회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재건하고 만들어가야 할 행위의 결과물이 된다. 사람들은 절박하게 사회를 요구하지만 사회는 미리 주어지지 않고, 저기 저편으로 멀어져 있고 와해되어 있고 해체되어 있는 것이 저성장 국면이다. 그래서 더욱 협동조합의 구성적 실천이 요구되는 상황이 바로 저성장 국면이다.

기존 협동조합의 사업방식이 사회를 미리 전제하고 이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면, 이제 협동조합이 사회를 구성하고 창안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런 점에서 기존 방식의 사업체는 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를 미리 전제로 한 상태에서 기능적이고 자동적인 방식으로 사업체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장 시기 사업체는 자원-부-에너지의 풍부함에 따라 기존 법인들과 다른 대안적인 가치와 의미만을 부여해도 사람들을 이끄는 유인(誘因)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협은 다양한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서 간주되었다. 일종의 문화로서 생활양식(Lifestyle), 소비양식이나 대안적인 가치, 의미와의 접속지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은 ~이다”라는 의미화를 통해 바로 가치화와 자본화를 이루었던 것이 성장주의 시대의 모델링을 통한 사회적 자본의 형성의 공식이었다. 뜻 깊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틀 내로 자원-부-에너지가 외부에서 들어오고, 그 의미와 가치를 기능, 작동과 결합시키기만 하면 하나의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사업체의 위기는 바로 사회 자체가 기능 정지에 빠졌으며, 자원으로 간주되던 생명과 자연의 소재(material)가 생태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협동조합의 위기 국면은 결국 자동주의적으로 전제된 사회에 대한 사유체계가 끝났으며, 자연과 생명의 소재가 외부에서 무한히 주어져 있다는 신화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회를 어떻게 구성하고 재건해야 할까? 바로 정동(affect)과 돌봄, 살림, 모심, 섬김, 보살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서만 사회가 구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구성적인 활동의 부수효과로 사업체도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정동이라는 개념이 생소하기 그지없다. 정동은 스피노자의 『에티카』(1996, 서광사)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정동의 종류로 기쁨, 슬픔,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감정은 우발적인 사건과 표상에 따라 발생하지만, 정동은 사건과 사건, 표상과 표상, 정서와 정서를 연결하는 변환양식이며 자기원인이 있다. 삶, 살림, 사랑 그 자체가 자기원인이다. 그래서 정동은 지도제작이 가능하다. 냅킨과 컵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고 하자. 정동을 발휘해서 살림을 하는 사람은 컵이라는 문제설정과 책상이라는 문제설정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하고 횡단하면서 정돈하고 닦고 아끼는 돌봄과 살림, 모심을 수행할 것이다. 그 횡단면에서 등장하는 정서변환양식이 정동이다. 우발적인 정서와 정서, 문제설정으로서의 표상과 표상 사이를 연결 짓는 변환자로서 정동이 존재한다. 협동조합의 결사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동과 살림의 거대한 사회라는 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당연하게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적 실천과 예술, 창조,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할 과제가 된다. 활동이 사업체의 부수효과인 것이 아니라, 활동의 부수효과가 사업체인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의 결사와 의지, 의미, 가치가 작동하기 위해서 전제된 사회라는 판 위에, 정동과 돌봄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한 국면은 사업체와 연결된 결사체의 위기로 다가온다. 협동조합의 내적 역동성은 사업체와 결사체 사이의 낙차효과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사체는 사회가 미리 주어져 있다는 근대적인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동과 돌봄, 살림은 미리 전제되어 있어서 결사나 의지, 의식적인 활동 등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저성장의 국면은 결사의 시대가 아니라 정동의 시대의 개막을 의미할 것이다. 결사체의 작동방식의 토대가 되었던 정동과 살림, 돌봄 등 이전에는 당연시 되었던 것들이 이제 미리 전제되어 있지 않고 재건하고 구성해야 할 과제가 된다. 정동은 양자적 흐름이나 삶의 지속에 따라 무심결에 흘러가는 무의식의 행렬이 아니라, 차이를 낳은 차이, 차이의 미세화에 따라 더욱 미시적이고 섬세한 결과 무늬를 갖는 정동의 구성주의의 실천적인 과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자율주의는 자연주의적으로 몸에 털이 자라듯 저절로 치유되거나 생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진행에 대한 섬세한 개입과 관리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다. 저성장시대의 결사체는 ‘정동의 연합체’의 재건과 구성 이후에 가능할 것이며, 그 구성과 재건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시정치와 초극미세전략의 섬세한 실험과 실천의 과제가 된다.

이런 점에서 사회가 갖는 의미는 간(間)공동체 사회이자 메타네트워크(Meta-Network) 사회의 의미밖에 없다. 공동체와 공동체, 마을과 마을, 네트워크와 네트워크를 횡단적으로 연결할 때 사회는 발생한다. 거리를 지나칠 때 풍경이나 광경으로 마주치게 되는 사회는 이미 작동정지의 상태에 빠져들어 있다. 미리 주어진 사회는 무차별사회로서 기능정지에 빠졌고, 이와 연결된 원자화된 개인들은 무기력지층에 빠지거나 권리주의의 감광판과 같은 요구와 이해에 머물고 있다. 협동조합의 사업체의 위기가 결사체의 위기로까지 변모하는 현재의 국면은 다가올 ‘정동의 연합체’로서의 협동조합에게 색다른 과제를 요구한다. 공동체적인 관계망들을 구성해내는 실천, 구성적 실천이 결사체의 핵심적인 과제가 된 다. 그런데 기존처럼 기능 분화에 따라 판을 짜면 결의와 의미,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모이지 않는다. 더 섬세하고 미세한 미시정치의 판이 개방된 것이다.

정동은 자기원인을 갖는 정서의 양상이기도 하다. 그 자기원인은 삶의 내재성, 살림, 모심, 사랑이다. 그래서 정동은 재귀적이다. 정동의 자기원인이 다시 정동이 되는 함입(introjection), 재진입, 순환논증이 여기서 발생한다. 성장의 풍요에 기반해서 효율성과 기능성, 자동성의 측면을 통해서 판을 짜려는 시도는 기각되어야 한다. 오히려 정동, 살림, 돌봄의 시각에서 판이 설립되는 모든 과정에 커뮤니티가 함께 참여하고 개입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재귀적인 정동의 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두가 선수이면서 모두가 아마추어인 판이 협동조합이다. 모두가 판짜는 사람으로서의 선수이면서, 모두가 막상 처음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한 판의 난장(亂場)이 정동의 판에 더 어울린다. 결사, 의미, 가치라는 결사체의 형태와 기능성, 효율성, 자동성의 사업체의 형태라는 동전의 양면을 가진 근대성의 구도로는 사회를 재건하고 구성하기 위한 커뮤니티의 판을 짜는데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저성장시대에 협동조합에게는 우선 ‘정동의 연합체’로의 거대한 전환이 요구된다.

2. 협동운동, 다기능적인 관계의 위기와 기능 분화된 현장의 위기 사이에서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사회시스템의 작동과 양상을 기능 분화와 이에 따른 복잡성으로 사고한다. 그는 복잡한 사회시스템을 제어하기 위한 사이버네틱스의 방법론은 2차 복잡성을 띤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복잡성 감축’이라는 개념의 구도를 『체계이론입문』(2014, 새물결)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사회의 기능분화는 소농의 어소시에이션의 해체와 도시화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소농은 다기능적인 정동노동을 통해서 자연생태계의 순환과 재생과정, 둘레환경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정동노동은 다기능적이면서도 단순하다. 그리고 그 단순함은 사실상 다성음악적인 둘레환경과 생명으로부터의 화음에 따라 만들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은 복잡하면서도 하나의 상품화모델에 따라 획일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데 비해 소농의 어소시에이션은 단순하지만 오히려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도시사회에서 재코드화된 소농은 점원, 직원, 간호사, 광부 등 다양한 주체성으로 기능 분화되었다. 그래서 마치 별천지와 같은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도시사회의 경우에도 메가시티의 경우에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데 비해, 자유도시의 경우에는 단순하지만 다양하고 이질적이라는 점에서 현대 도시에서의 경우의 수의 감축이 있다. 그리고 소농의 다기능적이면서도 단순하고 다양한 정동과 돌봄의 과정의 흔적과 자취는 우리의 정동, 살림, 보살핌, 섬김 등의 ‘관계’ 그 자체에 남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은 복잡하면서도 하나의 상품화모델에 따라 획일화되어 있다. 출처: serenasampson@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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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시스템은 복잡하면서도 하나의 상품화모델에 따라 획일화되어 있다.
사진 출처: serenasampson@Pixabay

협동조합 관계망의 돌봄과 정동의 유통과정에서 다기능성이 드러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동은 비교적 단순한 관계망을 통해 여타의 모든 것들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정동은 경우의 수를 늘리며 다양해지지만, 기능은 산술적 수를 늘리면서 복잡해지기를 원한다. 기능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동은 다기능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테면 가정에서의 살림과 돌봄은 다기능성에 따라 문제설정으로서의 사물과 사물, 생명과 생명을 매끄럽게 연결시키고, 여러 의미와 여러 모델을 넘나들고 연결시키는 비스듬한 횡단선에 따라 하나의 활동이 다른 활동을 연쇄시킨다. 그것이 관계가 갖고 있는 치유, 돌봄, 살림의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관계가 갖고 있는 단순성은 촌스럽게도 보이고, 정동의 순환과 유통 측면에서 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에는 냄새, 색채, 음향, 몸짓, 이미지, 맛 등 다채로운 기호작용이 들어가 있으며, 그러한 다채로운 기호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말을 더듬고 촌스럽다고 평가된다. 진정으로 차이와 다양성을 원한다면 일단 관계망과 배치가 성립된 이후의 문제일 것이다. 혼자서 기계장치들의 복잡한 기능의 매뉴얼을 다 알려고 한다 해서 차이와 다양성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가 갖고 있는 다성음악적이고 다극적이면서 다중적인 화음에 몸을 실었을 때, 차이와 다양성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도시사회의 기능 분화된 현실은 효율성, 속도,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정작 점점 더 관계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고립무원으로 개인을 이끄는 경향이 있다.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 관계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소식과 정보를 접하고,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벽 하나를 맞대고 살아간다. 문제는 협동조합이 사업체를 운영할 때 다기능적인 관계를 통해서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기보다는 기능 분화된 현실을 내부에 장착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위생적이고 탈색된 도시사회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기 위한 대처법일 수도 있다. 소농들의 다기능적인 정동의 방법론보다 기능 분화에 따라 활동가를 배치하면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기능적이고 자동적인 영역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율성에 기반한 관계망과 배치의 판 위로 기능적인 영역이 자리 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그 기능이라는 것이 다기능적인 정동의 역할을 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커뮤니티에도 촉진자(facilitator)가 있듯이 협동조합에도 살림꾼이나 이야기꾼, 촉진자, 상담자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한 때 공공에서 일자리와 복지의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회적 경제를 꼽기까지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노동, 고용, 일자리의 창출의 긍정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기능 분화의 영역에 활동의 영역이 배치되고 있을 뿐, 협동운동이 기반하고 있는 정동과 돌봄, 살림의 다기능적인 관계의 구성요소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저성장시대의 위기는 관계의 위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역으로 기능 분화된 현장의 위기까지 함께 찾아온다. 커뮤니티 비즈니스(Community Business)는 우발적인 고객이 없는 현재의 상황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해주지만, 관계 자체의 위기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상황에 처해 있다. 관계를 복원하고 재건하기 위해서는 기능 분화된 현장에 관계의 구성요소를 집어넣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내재적 차원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사회라는 전반적인 판과 구도 자체가 관계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외재적 차원에서 사회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양한 관계의 지점을 창안하고 만들어나가고 구성하는 과정에 협동조합의 판이 놓여야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복잡하고 기능 분화된 시스템의 도입이 아니라, 단순하지만 다양한 정동의 관계망의 설립과 관련되어 있다. 누군가가 협동조합에 문을 두드리고 한번 찾아와서 발언하고 어울리는 등의 행동, 그것은 일종의 돌발흔적처럼 찾아오는 실존의 순간이다. 프랑스 철학자 쥘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고깃덩어리와 같은 회화작품이 돌발표시를 우발적 실수로 간주하지 않고 힘과 에너지를 부과하는 입구로 보는 특이한 작업과정을 소개한다. 이처럼 돌발흔적이 특이점이 되는 과정, 즉 우연히 찾아온 손님이 그 일을 해낼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 바로 다기능적인 관계의 재건이 해낼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일들이다. 그 속에서 단순한 관계의 차원은 다양성 생산의 차원으로 전진배치될 수 있다. 사실 매장에 들어와서 물품을 주고받는 가장 단순한 관계에는 엄청난 다성음악적인 화음과 표정의 미묘한 변화선과 시간의 수평선 위로 아로새겨지는 생명과 자연의 리듬 등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더 어렵고 힘들고 더 고도로 조직된 교육이 요구된다.

관계 자체가 갖고 있는 다기능성은 루만의 개념의 구도인 복잡성 감축에 따라, 문제설정을 기능 분화하여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 동시에 단조롭고 비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쥘 들뢰즈의 『비물질노동과 다중』(2014, 갈무리)의 「정동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된 구도처럼 문제설정으로서의 사물, 표상, 상황을 넘나들면서 그 잠재성과 깊이를 서로가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즉, 실존적 사건과 이야기구조가 발생하는 원천이 된다. 서로의 실존의 깊이와 잠재성이 갖는 풍부함과 다채로움은 울음 섞인 포옹과 미소 띤 마중, 환대의 악수, 서로의 표정의 뒤섞임 등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지점은 관계를 맺는 현실 자체가 복잡계임을 승인함으로써, 복잡한 기능과 내용을 가진 하나의 의미화의 모델에 관계를 꿰맞춘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우리를 위치 짓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관계에 내재한 다성음악적인 화음을 응시하면서 여러 의미를 넘나드는 메타모델화(meta-modelization)로서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메타모델화는 펠릭스 가타리의 개념으로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하나의 모델로서의 정신분석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호흡법, 명상법, 정신분석, 인지치료, 선수련, 행동요법 등 여러 모델을 넘나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모델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여러 모델을 품고 있는 복잡계로서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의 다성음악적 구성에 따라 지금-여기-가까이의 실존의 사건성이 재건되고 생성될 수 있다. 생협매장에서의 물품을 주고받는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순간이라는 점, 그리고 바로 앞에 선 사람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을 홀연히 깨닫는 과정일 수 있다. 이는 실존 즉 유일무이성 다시 말해 특이성(singularity)의 두 가지 차원을 의미한다, 사건으로서의 유일무이성과 존재로서의 유일무이성이 그것이다. 그것을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98, 까치)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실존의 찰나는 『금강경』(2009, 갑을패)에서 말하는 흐름의 초극미세과정처럼 사람들에게 어떤 모종의 질문과 파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관계의 복잡미묘하면서도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측면이 개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계로서의 현실에서 맺는 관계가 갖고 있는 다기능성, 단순함, 다양성의 구성요소를 갖는 정동 즉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에 대해 노동, 작업, 기능, 역할, 직분이라는 근대적 정체성의 구도는 낡은 것, 오래된 것, 퇴락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처럼 실존은 본질에 앞서고, 특이성은 정체성에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협동조합의 결사체가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의 논리는 결국 그 동전의 반대편에 기능 분화를 추구하는 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확하게 기능, 역할, 직분으로 의미화하고 정의내릴 수 있는 현실은 잠재성과 깊이를 가진 다기능적인 실존적인 관계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 역시 사회를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 보는 행위양식임에 분명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인간도 사회도 공동체도 자동적으로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계를 회복하고 재건함으로써 잠재성과 깊이에 접속하는 배치로서 협동조합이 위치하려고 한다면, 협동조합의 결사체와 사업체라는 의미양상과 기능양상의 근대적인 이중 결합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은 생명과 살림의 판을 설립하여야 한다.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의 『앎의 나무』(2013, 갈무리)에서의 생명의 우발적인 표류가 갖는 길거리 예술가의 모습 즉, 깡통, 철사, 나뭇가지, 비누 등을 모아 브리꼴라주(Bricolage)의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같이 여러 모델과 의미를 횡단하고 이행하는 관계의 다기능성을 회복해야 한다. 생명이 가진 잠재성의 판과의 접속을 통해서만, 사회가 구성되고 재건되고 창안될 수 있다.

3. 양적 경제의 축소와 수축사회의 전망 앞에 서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무척 좋은 얘기처럼 들리지만,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목소리를 배제한다는 맹점이 있다. 소수자를 향한 사랑과 정동의 흐름이 아니라, 다수집단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하면, 결국 소수자와 연결되어 있는 나 자신도 소외되고 배제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동시에 정동과 사랑, 활동 등이 모두 다수의 이익과 이득, 이해로 번역되고 환원되는 것이 공리주의다. 이는 여러 모델을 넘나드는 분자적인(molecular) 것으로서의 욕망, 사랑, 돌봄을 하나의 모델로 수렴되고 집중되는 몰적인(molar) 것으로서의 계급이익, 이해, 요구 등으로 환원하는 방향성을 갖는다. 동시에 다기능적인 정동과 욕망을 하나의 기능이자 모델인 이익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방향성이기도 하다. 공리주의는 정확히 성장주의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배태할 수밖에 없는 집단이기주의를 내재하고 있는 셈이다. 오죽했으면 제러미 벤담은 그 유명한 판옵티콘과 같은 원형감옥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한 주변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시설물을 구상하였겠나?

성장주의는 공리주의가 갖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분리의 구도처럼 난민, 이주민,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면서 이미 미시파시즘으로 수렴되고 있다. 출처: StockSnap@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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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주의는 공리주의가 갖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분리의 구도처럼 난민, 이주민,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면서 이미 미시파시즘으로 수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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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저성장이 본격화되면서,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와 같은 양적 경제는 끊임없이 축소되고 있다. 이는 공리주의의 맥락 즉, 다채로운 활동이 이득이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의 축소를 의미한다. 이전까지는 자원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의 부수효과로 활력이 찾아오는 상황이었다면, 이제 활력과 정동이 먼저 달려가고 그 부수효과로 자원이 미약하게 찾아온다. 저성장의 국면에서는 그동안 공리주의적인 잣대로 봤던 모든 것들이 기능 정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성장주의 세력은 성공주의, 승리주의, 자기계발, 자기관리, 지기통치 등과 같이 개인에게 과도한 책임, 권리, 의무를 부과하던 신자유주의 담론으로 무장했다. 동시에 성장주의는 공리주의가 갖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분리의 구도처럼 난민, 이주민,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면서 이미 미시파시즘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는 외부효과의 소멸에 직면하여 우리 안에 외부를 만드는 파시즘의 전략과도 공명한다.

미셀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의 구도에 따르면 문명의 판과 구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내부에서는 잘 살도록 하면서도 유독 외부에 대해서는 증오와 차별의 배제의 네트워크 잠금을 수행한다. 저성장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꿈꾸는 세력들은 이미 차별, 배제, 분리를 통해 외부를 생산하는 방향성으로 향하고 있다. 이주민이나 소수자들에게 자신의 몫을 뺏긴다는 것이며 이들을 배제해야 파이를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이의 양적인 측면은 소수자나 이주민 때문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생명위기에 직면하여 명백히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양적 경제의 축소의 국면에 대해 대안적인 삶의 방식과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양적 경제의 축소와 수축사회의 기억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일은 인류 역사 상 단기적으로 간혹 있었지만, 거시적으로 경제가 성장을 하고 자본주의적 진보를 이룬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경제(economy)와 살림(oikos)이 분리된 이후로 경제의 영역은 살림의 관리와 통제 밖에서 멋대로 커지고 성장하고 증식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살림은 주도권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살림의 주도권 하에서 경제활동이 재편되는 국면이 저성장시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랏자라또가 『기호와 기계』(2018, 갈무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과 맺은 관계’, ‘자기에 대한 테크놀로지’, ‘실존에 대한 긍정’, ‘자기에 대한 배려’, ‘삶의 내재성’ 등과 같은 살림의 기본 구도가 더 중요진 것이 저성장의 국면이기 때문이다. 이제 경제는 살림을 외면한 채 겉에서 증식하고 커졌던 것에서 살림의 통제권 하에서 수줍고 부끄러운 거래와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노동이라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삶을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경제라는 구도는 이제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노동(Labor)이라는 허구상품에 대해 방점을 찍었던 성장주의 시대의 운동양상과 이데올로기는 낡은 것이 되었다. 대신 살림의 활동이 삶을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기본원천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저성장사회, 즉 수축사회는 기회의 상실, 경우의 수의 소멸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화를 내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대표적인 감정의 양상은 좌절감이나 우울감이다. 좌충우돌하면서 기회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사람들은 결국 좌절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면서 고립된 채 우울감에 젖어 감정에 스펀지처럼 빠져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한 좌절의 영역은 철저히 경제활동의 영역이다. 오히려 살림의 영역에서는 더욱 활발하게 정동과 돌봄, 사랑을 발휘할 계기들을 찾게 된다. 자기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는 살림의 영역이지, 경제의 영역이 아니다. 우발적인 고객이 외부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 자신의 문제라고 여기면서 더욱 철저히 자기를 관리하려는 자기통치, 자기관리, 자기계발과 같은 개인책임의 경제의 논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오히려 살림은 자기 자신과 자기 내부의 타자간의 관계 맺기를 돌봄과 섬김, 모심, 보살핌 등의 정동의 행위양식에서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살림의 영역에서의 돌봄과 정동의 능력은 오히려 우리가 선택할 경우의 수 하나하나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정동(affect)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국가주의의 논리는 나의 좋음으로서의 부와 자원, 에너지가 다른 사람의 나쁨으로서의 갈취와 약탈로부터 기인하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슬픔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우리의 뇌리에 뿌리박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분배와 재분배의 문제에 등장하며, 자원과 부의 한계로 인한 소수자와 이주민, 기후난민에 대한 혐오의 원천이다. 그러나 윈윈(win-win)이라는 자유도시의 논리, 즉 나의 좋음이 타자의 좋음이라는 기쁨의 민주주의가 바로 정동의 논리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1996, 서광사)에서 바라보았던 내재적 민주주의, 즉 기쁨의 민주주의는 바로 자유도시, 도제조합, 공화정, 자유인 등의 핵심 키워드를 품고 있다. 협동조합은 역사적으로 자유도시의 기반위에서 성숙해 왔던 도제조합의 전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피노자 역시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의 도제조합의 장인으로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해 나갔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동에 기반한 기쁨의 민주주의 자체가 수축사회의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협동조합은 천연덕스럽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금욕을 권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협동조합은 정동과 활동을 통해 서로의 한계와 자원의 제한성, 시간의 유한성 등을 고려한 기쁨의 최대치를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의 욕망의 결과 무늬가 어디에 있는지를 고려한 욕망의 미시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사랑, 정동, 욕망이 반복되면 그것은 특이점(singularity)이 된다. 양자 물리학에서 특이점은 에너지의 반복이 물질이 되는 포인트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타리에게는 특이점이 하나 더 추가된다. 기호의 반복이 에너지가 되는 지점으로서의 특이점 말이다. 수축사회에서 경우의 수의 축소와 상실은 결국 정동의 반복을 통해 특이점을 설립하여 그것을 선택지로 만드는 것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와 살림의 분열의 양상에서 주목할 점은 성장주의와 자본주의가 지속되었던 과정 역시도 계속 살림이 기반이 되어서 경제가 작동해 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살림의 역할과 위상을 깎아내리기 급급했고, 부불노동(不拂勞動)이나 재생산노동과 같이 격하해 왔다. 저성장시대는 경제활동의 허상과 외피는 축소되겠지만, 살림활동은 영역을 넓히고 더욱 강건해지고 더 확대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양적이고 외양적이고 실물적이라고 여겨졌던 경제에서 질적이고 관여적이고 내포적인 살림으로의 이행은, 수축사회가 절망과 좌절이 아니라 어느 때보다 정동과 욕망, 돌봄의 살림이 활성화된 사회임을 의미한다.

협동조합은 살림의 코디네이터가 되어야 한다. 탄소살림, 가정살림, 시간살림, 일살림, 제작살림 등에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코디네이터 역할은 살림이 소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생활양식으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소비와 소모의 방식이 아닌 순환과 재생의 방식으로 생활양식의 전환을 촉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저히 경제의 논리가 장악하지 않도록 만드는 이유는 수축사회, 즉 저성장 사회에서 살림의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설립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 작은 소득이나 자원도 함께 만들어나가면서, 그 살림의 과정 속에서 사회와 공동체를 재건하고 구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저성장시대는 정동과 살림으로 더욱 바빠진 시대를 의미할 것이다. 또한 그 바쁨은 노동이나 기능이 아니라, 살림과 돌봄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보일 것이다. 이를 통해서 “모두가 활동가다”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저성장시대가 될 것이다. 여기서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신체의 에너지를 모두 정동과 활동에 쏟아 붓고 피로의 상태로 향하는 방향성과 미래적 가능성의 고갈로 인한 소진으로 향하는 방향성이 있을 것이다. 피로는 이롭되 소진은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협동조합은 활동을 연결접속하고, 소진되지 않도록 북돋고 양육하며, 조그만 성과물이라도 공유할 수 있는 판과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색다른 미시정치 즉 끊임없는 가능의 경우의 수를 설립하는 살림의 가능태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저성장의 국면은 협착(狹窄)과 폐색(閉塞)의 우울한 삶의 양상이 아니라, 활력과 생명에너지로 가득 찬 형태가 되어야 그 해결의 단서와 힌트, 아이디어를 돌발흔적처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4. 무차별 사회와 간(間)공동체 사회의 사이에 선 협동조합

사람들은 메가시티 안에서 낯선 익명의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며,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무정형, 무차별의 대중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와사부로 코소(Sabu Kohso)의 『뉴욕열전』(2010, 갈무리)에서는 뉴욕 거리에서의 치마타(巷)라는 교류와 소통의 행동양식을 소개한다. 이는 길거리에서 서로에게 눈인사를 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걸고, 안부를 묻는 등의 행동양식이다. 이는 메가시티에서 군집적인 신체로서의 민중이 거리를 전유하고 관계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동과 실천 과정의 결과물이다. 코소 역시 정동의 도시로서 뉴욕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뉴욕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메가시티는 무차별 사회의 주체성으로서의 대중(mass)이 갖고 있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일방향적인 미디어 등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은 동질적이이고 균질하고 덩어리진 사회 즉 무차별사회를 배태한 케인즈주의와 포디즘 시스템의 유물(遺物)이다. 도시에서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고,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과 벽을 맞대고 살아가는 삶이 조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메가 시티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마주치는 사회는 대중사회, 무차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출처: Pexels@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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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메가 시티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마주치는 사회는 대중사회, 무차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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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메가 시티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마주치는 사회는 대중사회, 무차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이라는 무정형의 덩어리는 그 내부에 무수한 차이와 다양성에 따라 사회생태계를 조성할 수 없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대중사회 즉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누군가는 얘기한다. 그러나 그 조차도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원자화된 개인에게 달라붙어 무차별사회의 형태로 여전히 건재하다. 앵무새와 같이 떠드는 미디어, 모든 욕망과 정동을 소비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 똑딱거리는 일과 휴식의 시간, 낯선 익명의 사람들과 거리에서의 마주침 등은 이러한 무차별사회, 즉 대중사회의 건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중사회의 이면에는 고독, 소외, 무위, 외로움, 정동의 소외와 빈곤에 처한 개인들의 상황이 숨어 있다. 그러나 통속(stereotype)화된 삶의 방식 속에는 소외와 고독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사회의 기능정지는 점점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균열과 파열, 침식 등에 따라 의고주의적인 퇴행의 길로 향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개인은 분자적인 것(the molecular)으로 나아가 관계에 따라 특이성(singularity)을 갖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이 특이성을 발휘할 때는 자신의 유한성과 유일무이성이 드러날 수 있는 관계망과 배치가 설립되었을 경우이다. 분자는 물질 속성의 최소단위이다. 그래서 분자적일 경우에는 유한하지만, 자신의 특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2001, 새물결)에 따르면 질량의 최소단위인 몰적인 것(the mole)이 하나의 모델에 수렴되고 집중되는 성장과 양적 경제의 단위인데 비해 분자적인 것은 여러 모델을 넘나들고 이행하고 횡단하고 변이되는 지극히 유한한 단위 즉 특이성의 단위다. 분자적인 것이 활성화될 때 차이와 다양성은 더욱 만개할 것이고, 이에 따라 사회생태계로서의 사회 즉, 간(間)공동체 사회가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분자적인 것으로서의 특이성이 생산되는 것이 먼저인지, 이를 생성시킬 관계망의 설립이 먼저일지는 논쟁의 소지가 있다. 개인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는 균질하고 동질적인 사람으로 간주될 뿐이지, 특이하고 유일무이한 실존적인 의미가 부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특이성 생산은 동시에 관계망 창발이기도 하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식을 띤 사업체의 작동양상 대부분이 사실상 무차별사회가 미리 전제된 상태에서 소모하고 이용하고 활용하는 유형으로 구성되어 왔던 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미리 전제되지 않은 상태 즉, 무차별 사회를 설정하지 않고 사회는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평화롭고 사회적 실천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다. 얼마나 낙관을 가질 수 있었냐 하면, 사회가 기능정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동체에서 불쑥불쑥 우발적으로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져 활동가와 조합원들이 일부러 판을 짜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리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저 활동가는 소식을 알리고 연락하는 선에서 작업만 해도 자발성의 판에서 반응이 오고 사람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모였고 조용히 참여하거나 시끌벅적한 상황을 만들었다. 참 낭만적인 시대의 이야기이다. 사회가 기능 정지되기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무차별사회를 맞았고, 그러한 낭만적인 시대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 생태주의는 자연주의와 선을 그어야 한다. 몸에 털이 자라듯이 저절로 치유되고 자발적으로 움직인다는 자연주의의 판은 기능정지에 빠지고 정체되었다. 그 이유는 위축과 경우의 수의 축소로 향하는 저성장시대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제 사회를 재건해야 할 때이다. 간(間)공동체, 메타네트워크를 통해 사회를 재건하고 구성하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협동조합 구성원들 중에 활동하지 않는 사람들,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이 선택할만한 것을 협동조합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협동조합 내에 이들을 씨줄날줄로 강건하게 엮는 그물망이나 관계망이 없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우리가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저성장시대를 맞이했지만 사람들의 대응과 대처법은 여전히 사회가 미리 주어져 있다는 나이브한 사고방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무차별사회의 양상 속에 그대로 두면 개인들은 점점 더 원자화되고 고립되는 방향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개인들이 직면하는 공동체와 사회의 기능정지에 대한 느낌은 우울감과 좌절, 분노와 화로 향할 수 있다. 이러한 해체의 원심력에 빨려든 사람들은 점점 미디어와 SNS로 더 바빠지고 삶은 더욱 피곤하고 소진되어 있는 상태다. 근대적인 결사체에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면, 원자화된 개인으로 대답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사회생태계 속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특이한 분자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결국 간(間)공동체 전략은, 관계의 실질화를 통해 사회를 재건하고 구성의 판을 짜는 사람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미리 주어진 자원의 수축과 위축에 따른 사회의 기능정지와 무차별사회의 등장과 같은 전반적인 상황은 기존 사회에 기반을 두었던 사회주의 이념이나 사회적 가치, 사회적 자본 등의 퇴조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 영향으로 사회적 경제 그중에서도 협동조합은 더욱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협동조합운동은 사회를 재건하는 판을 짜기 위한 섬세한 노력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5. 기후위기와 문명의 전환의 문턱에 선 협동운동

기후위기의 등장은 지속적인 감축과 저성장/역성장 기조가 전반적인 상황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기후위기 상황이 인류문명 전반의 절멸의 위험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 협동조합운동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적 상황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올 수도 있으며, 문명이 선택할 경우의 수를 급격히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문명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나 신축성, 유연성 등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협동조합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해서 문명의 전환을 이루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동안 협동조합이 추구해 온 의미와 ‘전환사회’라는 전망은, 이제 그저 평면화된 의미와 가치의 명제가 아니라, 현실을 직조하고 실제 판을 짜는 논리로 더욱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언적인 수준의 담론이나 의미, 가치의 차원을 떠나 생존의 명제에 부합할 수 있도록 더욱 치열하게 협동조합의 역할과 그것이 제시하는 대안사회의 삶의 유형 등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의미, 가치, 이념 등의 의미화방식이 아닌 삶과 생활양식을 재편하고 재건하고 구성할 정도로 더욱 미세한 차이와 다양성이 내재해 있는 제도의 설립이 필요하다. 근대에는 “~은 ~이다”라고 의미화하면 대중과 시민이 그 틀이나 스키마 내로 모여들게 되어 있다는, 다소 나이브한 이념형 사회의 구상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의미화 방식으로 제도화를 수립하는 방식은 낡은 것이 되었고 지도화를 통해 삶이라는 양자적인 흐름과 지속의 과정에서 더욱 미세한 차이의 지절을 펼쳐 나가는 것이 중요해졌다. ‘의미화=제도화’ 방식에서 ‘지도화=제도화’ 방식으로의 이행은 삶의 미세한 이야기구조와 방식에 대한 색다른 참조점을 요구하는 기후위기 시대에서는 더욱 절실해진다. 더욱 미세한 제도와 도식,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것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나의 실존적인 준거양식으로써 요구되는 상황인 것이다.

기후위기는 향후의 우리의 삶을 좌우할 핵심변수이다. 협동조합운동은 기후위기를 거치면서 대안적인 삶의 유형으로 전진배치될 수 있는가, 아니면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는 사업유형이 될 것인가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어떤 하나의 답이나 하나의 모델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여지는 거의 없다.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설정 앞에서 무수한 경로와 탈주로, 행렬, 지혜와 정동으로 이루어진 지도제작을 함으로써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은 ~이다”라고 단정내리고 정의내리는 이론가나 사상가가 기후위기 시대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와 모델을 서로 비교하고 실험하고 실천하는 방향에 있는 실천가와 활동가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 지도제작은 결국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실험과 실천을 위한 다채로운 경우의 수를 설립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협동조합은 다양한 경우의 수와 그것을 넘나들 수 있는 지도제작의 방법론에 따른 조합원들의 실험과 실천의 판과 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후위기에 생협과 협동운동 등이 대응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막대한 물적, 인적, 비물질적인 차원의 노력과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은 살림과 돌봄, 정동의 뜻과 가치로 모인 관계망일 뿐, 구체적인 정책결정을 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가 이 막대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인류는 이미 끝났다”라는 쉬운 선택으로 향하여 “될 대로 되라”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과 커뮤니티, 사회 등에 대한 선택과 관리, 개입의 자율성을 더욱 극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자연주의적으로, 혹은 자동주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을 끝장내고 공동의 노력과 협동, 연대의 배치와 관계망이 끊임없이 개입하고 관리하는 색다른 유형의 자율주의를 등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대로 두면 잘 될 것이라는 자연주의적인 관점은 자율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미세한 영역에 대한 배치와 관계망의 개입과 관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차이를 더욱 미세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자율주의는 초극미세전략으로서의 자율주의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민감성을 확산시키고, 제도와 시스템과 거대계획, 거대프로그램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아래로부터 발흥하는 구성적 협치의 방법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각 지자체에서 벌어지는 마을공동체와 공공영역의 교섭과 교직처럼, 협동조합의 ‘관계망’과 공공영역의 ‘제도’간의 교호작용을 일으켜 끊임없이 제도 창안과 시스템 혁신이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구성적 협치, 즉 아래로부터 협치의 방향성이다. 이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수많은 협치 단위를 만들어내는 협동조합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것을 생명민회라고 부르든, 생명네트워크라고 부르든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조직체가 갖고 있는 이념이나 조직구성의 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화학적인 변화를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협동조합은 기후위기가 초래한 마음의 위기를 공유하고 공감함으로써, 서로간의 지혜와 정동을 나누는 배치로서 작동해야 한다. 출처: Gerd Altmann@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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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은 기후위기가 초래한 마음의 위기를 공유하고 공감함으로써, 서로간의 지혜와 정동을 나누는 배치로서 작동해야 한다.
사진 출처: Gerd Altmann@Pixabay

기후위기 시대는 결국 저성장시대가 그저 방법론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원이라고 간주해왔던 생명과 자연이라는 토대적인 차원의 심원한 문제임을 의미한다. 현 시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감축과 수축은 예상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자원-에너지-부의 감축을 의미할 뿐, 주체성이나 자율성, 정동의 영역에서는 더욱 활력 있고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이 개방될 것이라고 전망해 볼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는 주체성 생산의 입자가속기로서 작동해야 한다. 저성장 국면은 단지 성장이 안 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 배후에 기후위기라는 가혹한 현실을 내포하고 있다. 기후위기라는 핵심적인 사안을 염두에 두면서 협동조합의 경우의 수와 자율성, 가용가능한 자원, 비물질적 자산 등을 총동원하여 전환사회를 향한 대안적인 삶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에 전념해야 다. 협동조합의 내부에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가 조성된다면, 그 판 속에서 놀랄 만한 특이점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돌발흔적에 대해 끊임없는 민감성을 가지고 이를 확산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초석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기후위기가 진정한 위기로서 작동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마음의 위기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후변화국제회의 등에서 심리학자를 배석시켜서 이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 서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서식하는 성좌와 같은 배치와 관계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기후위기 상황에 대해 공유하고 지혜를 나눌 수 있는 배치와 관계망으로서 협동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이 위치해야 한다. 협동조합은 기후위기가 초래한 마음의 위기를 공유하고 공감함으로써, 서로간의 지혜와 정동을 나누는 배치로서 작동해야 한다. 문명의 위기는 문명의 종언, 이미 떨어지기로 예정된 비행기에서의 태도와도 같다. 비행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들이 요행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탐색하고 세련된 정보와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조종간을 끝까지 놓지 않고, 모두가 죽는 경착륙 즉, 인류멸망이 아니라, 모두가 사는 연착륙, 즉 문명의 전환으로 향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개 안 남은 조종간 중 하나이다. 협동과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 결사체가 나서서,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설정에 직면하여 어떻게 우리의 삶과 활동, 정동을 투여하여 색다른 지평을 개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 탐색, 사색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협동조합이라는 조종간을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의 성좌, 관계망과 배치인 협동조합이 이제 전환사회로 향하는 조종간 역할을 해야 한다.

이 글은 〈2019 한살림 생명협동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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