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④ 저성장시대, 커뮤니티도 너무 크다!

저성장시대를 맞이하여, 사회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재건하고 구성해야 할 목표로 바뀌었다. 협동조합도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을 맞고 있으며, 우리는 모든 면에서 기존 조직방식 자체에 대해 의문시하여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주체-대상, 조합원-활동가, 결사체-사업체의 한 쌍을 새롭게 재편하지 않고서는 이 저성장시대의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없으며, 협동조합은 더 이상 전환사회의 마중물이 될 수도 없다.

. 저성장시대, 커뮤니티도 너무 크다!

1. 관계의 실질화 : 커뮤니티의 기능정지를 넘어서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에서의 사업체의 위기 양상이 찾아오게 된 배경은 소비와 자원의 축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협동조합의 결사체가 관계의 실질화를 이룰 만큼 미세한 생활과 삶에 접근하지 못했던 데도 그 이유가 있다. 관계의 실질화를 위해서는 뒷받침할 커뮤니티가 작동해야 하고, 커뮤니티가 각각의 사람들의 실존적인 관계에 접근할 만큼 미세한 배치와 판을 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차별사회가 전면화되면서, 커뮤니티 역시도 그대로 놔두면 무정형과 무차별의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형태로 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커뮤니티의 미세한 관계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페테르 파르 페르바르트(Peter Pal Pelbart)가 「볼 수 없는 것의 생태학」에서 언급했던 볼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의 회복이 시간의 배열과 관계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죽은 자의 흔적, 미래에 대한 예언과 환시 등 시간의 배열 속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내재하고, 이에 따라 커뮤니티에서의 실존의 의미는 자취를 많이 남기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자취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투명인간이 되려고 하는 방향성으로 향한다. 이런 점에서 저성장시대에서의 협동운동은 미세한 실존적 관계의 판이어야 하고, 투명인간되기의 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차별사회가 전면화되면서, 커뮤니티 역시도 그대로 놔두면 무정형과 무차별의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형태로 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by Mike Chai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842339
무차별사회가 전면화되면서, 커뮤니티 역시도 그대로 놔두면 무정형과 무차별의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형태로 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사진 출처 : Mike Chai

기존 사업체의 방향성은 무차별 사회가 미리 주어져 있다는 환상 속에서 작동했다. 그래서 각 지역별로 생협매장이 운영되었고, 그 속에서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면서 미리 주어진 사회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제 저성장시대를 맞이하여 사회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재건하고 구성해야 할 목표로 바뀌었다. 생협도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기존의 커뮤니티의 조직방식은 결국 무대와 주인공, 관객이 발생했던 대중사회와 메가시티의 방식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능, 역할, 직분 없이 어떻게 조직이 작동하냐는 반응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 조직방식 자체에 대해서 의문시하여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주체-대상, 조합원-활동가, 결사체-사업체의 한 쌍을 새롭게 재편하지 않고서는 이 저성장시대의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없으며, 생협은 더 이상 전환사회의 마중물이 될 수도 없다.

기존 방식의 커뮤니티가 기능 정지하고 있는 증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성론적 관점에서의 커뮤니티의 구성과 생산의 과정도 엄청나게 발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정적이고 생성적인 힘과 활력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을 완성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태이자 진행태로 볼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의 보이는 영역에서의 실물이나 부, 자원, 활동가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관계, 정동, 사랑, 욕망, 의미, 가치 등이 더 중요해졌다.

그렇다고 우리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허상이나 외양이며, 덧없는 것이라는 허무주의에 머물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의 이행과 횡단과 변이의 과정태, 진행태에 더 주목하자는 얘기다. 뜻과 아이디어와 지혜가 모여, 결국 사람이 모이는 과정 자체에 더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실질화가 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일단 관계를 맺어야 뜻이 생기고, 아이디어가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뭔가 하려는 과정형과 진행형의 열정과 욕망이 생기지 않겠는가?

커뮤니티는 일종의 판이며 마당이며 배치이다. 기존에는 판이 크게 깔려야 성공하고 보기에 좋을 때가 있었다. 몇 십 명, 몇 백 명이 모이면 힘이 생기고 흥이 났다. 그러나 아주 적은 수가 모여도 나쁘지 않다.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지고 관계를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계의 실질화는 적은 수를 원한다. 여러 명 모여서 무대와 관객, 주인공이 생기는 것보다 몇 명이 둘러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판과 마당이 저성장시대에는 더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당이라는 플랫폼을 지향하기보다는 작고 미세한 배치와 관계망으로써의 실질적인 관계, 실존적 관계가 절실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티에 침투해들어 온 선수들의 무대가 아니라, 끊임없이 아마추어의 과정형과 진행형밖에 없는 배치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티의 기능정지는 사실상 선수들의 무대의 기능정지일 뿐, 영원한 아마추어의 판은 이제야 깔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세밀화로 : 근대적인 결사체를 넘어서

어소시에이션은 결사체의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에게는 미래사회를 어소시에이션의 연합로서의 미니교환시스템이자 리버테리안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을 전망하고 있다. 일단 그 의미로 들어가 보면 호혜적인 씨족공동체 사회에서 약탈과 재분배를 중심으로 한 세계제국으로, 이로부터 상품교환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로 차례로 이행해 왔으며, 그 다음을 어소시에이션 사회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어소시에이션은 공동체성과 생태시민성의 중간교집합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일단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칼 폴라니(Karl Paul Polanyi)의 구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2009, 길)에서 ‘모아서 나누는’ 국가,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 ‘선물을 주고받는 공동체’라는 삼원구도가 그것이다. 어소시에이션이 핵심 구도가 되는 미니교환시스템에서는 이 세 가지 영역이 모두 작동하면서도, 호혜적이고 증여적인 공동체의 작동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으로 이행하게 된다.

고진이 미래사회를 전망할 정도로 어소시에이션은 그 의미가 깊지만, 그것은 근대적인 결의결사의 의미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고진에게서는 근대적인 책임주체로서의 시민사회가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전환이나 시스템의 이행을 추구하는 거대담론으로서의 어소시에이션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소시에션 사회는 더 적극적으로 미니교환시스템으로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 거대담론처럼 사회 전부를 장악한 다음에 미세한 미니교환시스템을 설립하는 집중과 수렴의 방향성이 아니라, 미니교환시스템 자체가 아주 국지적인 영역에서의 유효성이 입증됨으로써 비로소 사회로 확산되는 분산과 민주적 방향성에 입각하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의 실존과 관계, 정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효능좌표를 제시하는 어소시에이션 개념으로 재창안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적인 패러다임의 특징은 사회, 인간, 공동체가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라는 점에 있다. 마치 철학에서의 칸트철학처럼 선험적으로(a priori)라는 인식론적인 구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간, 사회, 공동체가 미리 전제되어 있고, 이러한 판 위에서 그것을 포착하고 발견하고 가공하면 된다는 판과 구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근대성을 넘어선 패러다임은 인간, 사회, 공동체가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이며, 구성, 생산, 이행의 과정에 있음을 응시하는 것에 있다. 그런 점에서 책임주체의 결의결사는 미리 주어지는가? 책임, 의무, 당위, 믿음, 기능, 역할, 직분, 정체성은 미리 주어져 있는가? 이런 질문이 던져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취약하며 연약하며 위태로운 시기가 바로 저성장시대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회의(懷疑)하고 의심하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는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업체의 위기, 어소시에이션의 기능 저하와 기능정지의 상황은 바로 현실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미리 생각했던 전제조건이 구성과정과 생성과정이 없이 미리 주어져 있다고 나이브하게만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판을 깔고 관계를 형성하고 정동, 사랑, 욕망을 유통하고 순환시켜야 할 상황에 와 있다. 그렇지 않고서 어소시에이션이 생각한 결사체를 이루는 책임주체도 형성될 수 없다.

관계의 실질화는 오히려 적은 수를 원한다. 여러 명 모여서 무대와 관객, 주인공이 생기는 것보다 몇 명이 둘러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판과 마당이 저성장시대에는 더 절실하다. by Nathan Dumlao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6VhPY27jdps
관계의 실질화는 오히려 적은 수를 원한다. 여러 명 모여서 무대와 관객, 주인공이 생기는 것보다 몇 명이 둘러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판과 마당이 저성장시대에는 더 절실하다.
사진 출처 : Nathan Dumlao

그러므로 우리는 더 미세한 현미경으로 삶의 내재성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삶의 내재성은 실존에 대한 긍정, 자기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법, 자기에 대한 테크놀로지 등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삶의 자기원인과 타자원인과의 끊임없는 조우와 마주침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존에는 삶의 자기원인의 영역은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결사체가 타자원인의 영역은 사업체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근대적 방식의 구도이며, 책임주체의 딱딱하고 기능적이고 역할이 명확한 형태이다. 그러나 삶의 자기원인은 사실 어소시에이션을 구성해내는 정동, 사랑, 욕망, 돌봄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삶의 타자원인은 문제설정으로서의 사물, 생명, 소수자, 자연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애와 환대의 협동조합의 구도를 재구성해야 한다. 이는 완전히 다른 양상 즉 사회가 기능 정지되고 작동하지 않는 저성장시대의 국면에서, 사회, 인간, 공동체,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창안과 구성의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더 미세해져야 하며, 우리 자신조차도 구성과정에 있다는 점을 긍정해야 할 것이다.

3. UTB전략 : 집단적 배치로부터의 실존적 강건함의 재건

UTB(Base Therapeutic Communities)과 같은 치료그룹전략은 정신질환자가 마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집합적 배치를 조성함으로써 강건함을 갖게 하는 심리치료 프로그램이다. 일단 정신질환자가 가게에 간다고 한다면, 망을 보는 사람, 곁에서 머무는 사람, 주위에서 돕는 사람들이 팀을 짠다. 그러한 팀의 배치가 그 사람에게 위기를 강건하게 만들 수 있는 부드러운 내부환경을 조성함과 동시에, 외부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집합적 배치는 가장 열악하고 어려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공동체 관계망의 효과이다. 마치 힘든 상황에도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 몇 명의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면 어두운 밤거리도 휙휙 용기 내서 걸어갈 수 있고, 무슨 호기를 부려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집합적 배치는 군사적인 맥락조차도 가질 정도이다. 유목민의 경우 10명 단위의 십인대를 조직하여 그 집합적 배치 속에서 팀워크 형태로 전투에 임하게 했다. 더불어 백인대, 천인대 등으로 확대시키면서, 집합적 배치가 갖는 강건함을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UTB전략은, 철학자이자 심리치료사인 펠릭스 가타리의 사상적인 맥락 속에서 소개되었다. 시위에 혼자서 참여하려고 한다면 쉽게 빠져나가버리겠지만, 팀을 짜서 함께 임한다면 끝까지 남게 되는 원리를 제시한다. 집합적 배치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관계망의 강건함의 힘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미리 주어진 무차별사회는 그 동전의 양면에 원자화된 개인과 관계한다. 사람들은 저성장시대에 더 직접적으로 사회의 기능정지와 마주하게 된다. 이에 대응하여 개인들의 아우성과 절규, 고독과 소외 등은 심화되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그러나 작은 UTB단위는 개인들의 실존을 구성하는 판의 역할을 한다. 즉, 둘, 셋, 넷만 있어도 왠지 힘이 나고 용기가 생기고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집합적 배치 속에서 유한한 자신의 역할과 배치, 자리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집단이 무언가를 해냈고, 나 자신도 함께 속해 있었다는 느낌, 작은 사건과 소동을 만들어냈고, 그 주변에 그 배치 곁에 자신도 수줍게나마 서 있었다는 느낌 등이 큰 힘이 되고 강건한 실존의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UTB는 결사체가 아니라, 모두가 주변에서 서성이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배치와 관계망을 통해서 비로소 강건하게 용기를 갖는 팀짜기의 판이다. 의미와 가치, 결의와 결사로 책임과 역할이 분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가 주변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왠지 모를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되어 발언하고 행동하고 관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의 주인공이 있어서 판을 주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모두가 머뭇거리면서도 뭔가 해보자는 강렬도 속에서 그 관계가 좋아서 하게 되는 것이 UTB의 특징이다. 물론 결사체와 UTB전략의 결론은 비슷할 수가 있다. 이를 테면 파도가 거세게 치는 바다를 향해 모두가 눈을 가리고 서로의 등에 손을 얹고 꼭 달라붙어서 다가가는 것이 UTB이며, 그 결속력과 강건함은 엄청나다. 반면 책임주체들로 이루어진 결사체는 한 사람은 눈을 가리지 않고 나머지는 눈을 가리고 가는 꼴이기 때문에, 의존도가 더 높아지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바닷가에 도달하는 결론은 같지만, 그 과정은 사실상 엄청나게 다른 셈이다.

저성장시대에 직면한 협동조합이 집합적 배치와 그 재배치의 미시정치에서 문제 상황의 해결의 단서를 찾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전략적 지도제작일 수 있다. 집합적 배치의 강도, 온도, 속도, 밀도에 따라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나 스타 등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 집합적 배치가 사라지면 다시 평범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 배치의 미시정치가 갖는 특징이다. 동시에 배치의 주변과 곁, 가장자리에서 더 많은 아이디어와 지혜가 나온다는 점에서, 주변을 살피는 것이 바로 배치를 재배치하는 미시정치의 특징이다. 홀연히 등장하는 주체성에 따라 돌발흔적처럼 따라갈 수 있는 것이 UTB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바로 심리적, 정서적, 영성적 지지대와 실존적인 강건함을 집합적 배치 속에서 찾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를 통해서 색다른 주체성 생산의 가능성과 전망이 제출될 수 있다.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은 기능정지 상태에 빠진 사회, 인간, 커뮤니티를 재건하고 구성하기 위해서 먼저 초극미세전략으로서의 배치와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한 그 배치는 실존의 유한성, 끝, 죽음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가운데 설립된 관계망이어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을 말하면 정말 따뜻함과 실존적 강건함, 용기가 샘솟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하고, 출발해야 한다.

4. 모듈(module)화 전략 : 초극미세단위 결사체의 촛불을 켜자!

모듈화전략은 여러 가지 집단적 배치에 힌트를 준다. 그러나 그 집단적 배치가 여러 사람들의 ‘약한 상호작용’에 따라 설계된 것이 아니라, 극소수의 사람들의 ‘강한 상호작용’에 따라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이를 테면 90년대 미국의 석유금수조치 이후로 국가기간산업이 마비되고 체력저하와 기근에 휩싸였던 쿠바에서 2인조의 모듈형태의 팀을 짜서 유기농혁명에 나섰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2인조는 굶주림과 함께 전망상실과 체력저하의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심리적인 지지대 역할을 하면서 함께 농사를 지었다. ‘모듈처럼 강한 결속은 세상에 없다’라고 할 정도로 모듈은 결사체의 궁극적인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2인조, 3인조 등 두세 명의 배치는 가장 강건하게 자신의 일을 해낼 수 있는 기본단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실존이나 삶의 내재성을 2인조, 3인조의 모듈 속에서 찾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기능적으로 완결된 단위를 추구함으로써, 2인조 이상의 어셈블리 속에서의 결사체의 형태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모듈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기능적으로 완결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재미와 놀이모델보다는 의미와 일모델에 더 적합하며, 두세 명 사이의 관계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협력과 협동의 의미가 단지 넓은 커뮤니티의 판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바로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한다는 직접적인 형태를 띠는 것도 특징이다. 모듈화전략은 UTB전략과 마찬가지로 초극미세전략의 일종이지만, 결사와 결의, 의미, 가치, 기능, 역할 등에 따른다는 점에서 결사체의 특징을 온전히 갖고 있는 배치이다. 이는 광명YMCA의 등대생협에서의 커뮤니티 조직화 행동양식에서도 나타났다. 광명 등대생협의 특징은 한동안 매장이 없이 각자의 지정된 집에서 물품을 받아서 다른 집에 전달했기 때문에, 물품을 받는 날이면 주변 조합원 가족들이 함께 모여 마을, 육아, 교육, 보건위생 등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활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공유했다. 이는 모듈단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고, 광명 등대생협 조합원들이 2000년대 초반 촛불시위의 첫 포문을 열었고, 이 촛불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듈화전략은 초극미세전략의 일종이다. 공동체가 차이와 다양성의 판위에서 설립되어 생태계를 이루는 특징과 더불어, 직접적인 관계의 깊이와 잠재성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창안하는 특징을 갖는 것 중에서 모듈화전략은 후자의 영역에 해당한다. 즉, 마르틴 부버의 지적대로 ‘나와 너’는 나와 그것(it)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떠나 실질적인 관계성의 회복으로 향한다. 그리고 서로를 뻔하게 바라보면서 규정하는 방식의 관계가 아니라, 둘 사이의 사랑, 정동, 욕망의 흐름에 따라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기나긴 탈주선을 그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듈은 커뮤니티 단위가 갖고 있는 생태계적 특징을 갖지는 못하지만, 강한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을 끊임없이 시추하고 발견하고 발명할 수 있는 무의식적인 행렬을 그려낸다. 옆에 한 사람이라도 자신에 대해서 얘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주고 지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살맛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지혜를 모으는 생태계적 질서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실존적인 관계가 와해되고 해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두 사람의 앙상블은 강한 결속의 결사체의 기본단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모듈화전략은 관계의 실질화에 가장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초극미세전략의 일종인 모듈화전략이 지나치게 의미와 가치에 기반하고 있고, 기능적인 완결성을 추구하는 결사체라는 점은 느슨한 네트워크를 추구하는 도시사회의 현재의 상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너무 크기 때문에, 관계를 실질화하고 실존적인 관계로 향할 수 없었다는 기존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적절한 전략적인 대응일 수 있다. 또한 결사의 의미를 개인에서 공동체로 바로 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수많은 모듈을 둠으로써, 공동체의 다양성에도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를 통해 협동조합에서 만난 사람과 밤새 토론과 작당모의, 프로젝트 등을 할 수 있는 모듈단위가 있는 것은 커뮤니티를 복원할 수 있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특히 저성장시대와 같이 무차별사회의 기능 저하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커뮤니티 자체의 기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능의 최소 단위인 모듈단위가 요구된다고도 할 수 있다. 초극미세전략은 미시적인 것을 모두 하나의 기획 속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미시적인 단위들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더욱 극대화하여 커뮤니티가 생태적 관계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판짜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커뮤니티가 성립되던 단계의 1세대를 갓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관계망과 배치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5. 컨비비움(convivium) 전략 : 공생공락과 흥, 재미의 윈윈 전략으로 향할 것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의 초극미세전략은 활력 있고, 사랑, 욕망, 정동, 재미, 흥이 가득 찰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컨비비움 전략이이다. by Zachary Nelson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98Elr-LIvD8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의 초극미세전략은 활력 있고, 사랑, 욕망, 정동, 재미, 흥이 가득 찰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컨비비움 전략이이다.
사진 출처 : Zachary Nelson

컨비비움 전략은 세계슬로푸드협회(Slow Food International)가 각국의 슬로푸드 관련 커뮤니티와 동아리, 지역단체 등에게 컨비비움 인가를 주어 지부로 승인하는 방식에 기반한다. 마치 소농의 술자리와 같이 슬로푸드를 시식하고 얘기를 나누고 흥과 재미를 추구하는 조직방식을 컨비비움이라고 한다. 컨비비움은 ‘공동의’라는 뜻의 con과 ‘발랄한’의 vivid의 결합어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공생공락(共生共樂)의 단위라고 할 수 있다. 공생공락의 철학적인 기반은 네덜란드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기쁨의 민주주의의 구도에서 찾을 수 있다. 기쁨의 민주주의의 구도는 스피노자가 생존했던 시기 자유도시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국가주의 전통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일단 자유도시의 전통은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윈윈(win-win), 즉 기쁨의 상태를 기반으로 한 거래관계나 정치체계가 구성된다. 그러나 국가주의 전통에서는 나의 기쁨이 너의 슬픔이 되는 방식 즉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좋으면 다른 사람은 뺏기게 되어 나빠지는 상태에 처한다는 구도를 그린다. 그런 점에서 자유도시의 전통과 국가주의의 전통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고, 스피노자의 기쁨의 민주주의의 구도는 바로 자유도시의 전통에 따른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정동의 기하학에 따라 기쁨에 의한 슬픔의 영원한 승리 즉, 자유도시가 국가주의에 대한 영원한 승리와 해방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도시의 전통이 바로 컨비비움의 조직구성 원리인 공생공락이며, 자유도시는 협동조합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제조합을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소농의 술자리와 같이 흥과 재미, 기쁨의 공유에 기반한 컨비비움 전략의 조직방식은 수많은 장점을 갖는다. 일단 대부분의 조직과 모임, 동아리에서는 컨비비움이 바로 뒤풀이 자리에서 출현한다. 본 행사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던 사람이 뒤풀이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듯이, 컨비비움은 수많은 숨은 만담꾼과 재주꾼 등을 출현시킨다. 여기서 컨비비움이 뒤풀이와 다른 점은, 바로 뒤풀이 분위기의 조직양식이 본 행사가 되는 전도된 형태라는 점이다. 일단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 듯 얘기하고 재미와 흥에 따라 이야기주제를 바꾸는 것이 기본이다. 책상 위에 올라온 음식이나 주류며 안주 등은 회의의 딱딱한 구조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잡담하고 수다를 떨고 뒷담화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의 긴장감을 이완시키고 보다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얘기할 배치가 형성된다. 컨비비움의 회의구조에서는 웃자고 하는 얘기들이 허용되며, 웃음이 터지고 그저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의 대화법도 환대된다. 그래서 쉽게 이해하자면 뒷풀이가 아닌 앞풀이를 전면배치한 것이 컨비비움이라고 할 수 있다.

컨비비움처럼 소농의 술자리와 같이 느슨한 네트워크 유형의 배치 역시도 초극미세전략의 일종이다. 사람들이 딱딱하고 경직되게 ‘네가 맞느니, 내가 맞느니’를 따지기보다 자연스레 풍부하고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추구하는 방식의 배치가 설립되면, 마치 비공식적인 자리처럼 생각되어 수많은 아이디어와 지혜가 출현할 판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의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딱딱한 회의구조에서는 정동의 흐름보다 틀이나 구조가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오히려 컨비비움은 조합원이나 활동가들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비공식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협동조합의 대소사를 얘기함으로써, 삶의 내재성과 괴리되었던 공식적 발언들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컨비비움을 조직형식은 수많은 앞풀이와 뒷풀이의 창안을 통한 기쁨의 공유 즉, 공생공락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있다.

세계슬로푸드협회 등이 채택하고 있는 컨비비움의 조직형태는, 각각의 단위가 컨비비움을 인가하고 승인하는 방식으로 그 자리의 판을 공식화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를 통해서 컨비비움 인가를 통한 공식성은 컨비비움의 느슨한 배치와 흥, 재미, 기쁨 등의 공감대에 최소한의 격조와 틀, 결정사항과 공동의 목표를 부여해준다. 이는 각각의 컨비비움 간의 인가와 인증, 증식, 파급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에 따라 협동조합은 마치 작은 단위의 파티나 후원회, 클럽, 모임, 동아리 등의 컨비비움등의 연합체와 같은 형태를 띠게 되어, 그 조직구성 단위를 더 미세하고 관계를 실질화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에 따라 협동조합 자체는 컨비비움들의 연합체, 즉 메타네트워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며, 삶의 현장과 살림의 현장으로 협동조합은 재미와 흥을 가지고 스며든다.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의 초극미세전략은 아직 출발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대강의 윤곽과 틀을 통해서 그것이 굉장히 활력 있고, 사랑, 욕망, 정동, 재미, 흥이 가득 찰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전략이 바로 컨비비움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6. 모듈과 컨비비움의 이중전략 : 외연=1, 내포=무한의 초극미세전략

모듈화전략과 컨비비움전략의 상호 호완가능성에 대해서 관심이 뜨겁다. 사실 모듈화전략과 컨비비움 전략은 모듈이 기능적 완결성과 결사체적 성격을 갖는 데 비해, 컨비비움이 재미와 흥을 추구하는 느슨한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어떤 면이 호환 가능한지는 상상하게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듈에서 컨비비움으로, 또는 컨비비움에서 모듈로 역전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초극미세전략이 동시적으로 활성화할 배치의 재배치 전략의 일종의 지도제작이 가능하다. 일단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본 마당에서는 모듈을 채택하고 뒷풀이나 앞풀이에서 컨비비움을 채택하는 방식의 기계적이고 선형적인 배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듈 내부에서 끊임없이 컨비비움의 요소를 끌어들이고, 컨비비움 내부에 끊임없이 모듈의 요소를 도입하여, 혼재면(混在面)을 형성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기존의 커뮤니티는 무정형적이고 무차별적인 관계망과 배치 하나만 있으면 그걸로 해결이 가능했다면, 이제 저성장시대는 그대로 놔두면 기능이 정지되고 활력이 사라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커뮤니티를 재건하고 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연=1’로 나타난 협동조합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부에 무수한 모듈과 컨비비움이 무한히 작동하고 있는 양상이어야 협동조합이 기능 정지로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초극미세전략은 그 내부에서의 무수한 작동을 기반으로 하여, 전체적인 윤곽과 조직구성이 지속가능하게 되는 형태를 띤다. 동시에 모듈로서 출발했다가 컨비비움으로 갈아타고, 컨비비움에서 모듈의 기능이 분화되는 등의 무수한 내부의 미시정치가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커뮤니티 내부에서 관계의 실질화는 바로 초극미세전략을 통한 모듈과 컨비비움 등의 육성과 살림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기존 소모임과 동아리와 무슨 차이를 갖느냐는 질문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존 소모임과 동아리, 클럽 등은 사실상 커뮤니티의 아들과 딸처럼 비슷하게 그것을 작은 단위에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유기적인 전체 생명으로서의 협동조합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하거나 작동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모듈이나 컨비비움은 공통의 판 위에 있지만, 아주 독특한 작동양상을 통해서 커뮤니티를 하나의 생태계로 만들 여지를 준다. 또한 모듈과 커뮤니티를 협동조합 자체의 초극미세전략으로 공식적으로 채택한다면, 사실상 정동, 돌봄, 살림, 모심 등이 저성장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색다른 해결책일 수밖에 없음을 승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외연=1, 내포=무한’의 작동양상에 따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협동조합은 근대적인 결사체에서 정동의 연합체로의 점차적인 이행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기서 의미・일 모델과 재미・놀이 모델의 구분을 모듈과 컨비비움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의미와 재미 사이에는 무수한 초극미세전략으로서의 미시정치의 판이 깔려 있다. 모듈에서 컨비비움으로, 컨비비움에서 모듈로의 자유로운 이행과 통제를 추구하는 협동조합의 미시정치가 입장에서는 재미와 의미 사이의 무수한 횡단선들을 오히려 자율성과 활력의 요소로 보게 된다. 저성장시대는 분명 협동조합 운동에게는 색다른 계기일 수도 있지만, 그대로 놔두면 기능 정지될 것이라는 엄혹한 현실에 대한 확인일 수 있다. 큰 틀에서 협동조합간 협동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수 있지만, 협동조합이라는 판과 배치 자체를 실질화하는 초극미세전략을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차별사회가 아닌 간(間)공동체사회로, 모듈과 컨비비움을 통한 공동체의 실질화로 끊임없이 미세한 작동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라야 비로소 외연으로서의 협동조합이 지속 가능성을 담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다. 엄청난 부와 성장,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 초극미세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작고 미세하고 소박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관계 맺기의 방식을 바꿈으로써, 각자가 직면한 현실과 세상을 재창조하고, 협동조합의 판과 배치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려는 것이 초극미세전략이다. 우리는 더 세밀한 우리의 삶의 영역과 정동, 욕망, 사랑에 대해서 더 주목할 때, 성공과 승리 대신 한계와 끝을 가진 삶의 진정한 의미에 접속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2019 한살림 생명협동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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