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무음곡을 기반으로 하는 분배 정의 추구를 만나기 – 기후 위기 속에서 『예기』 「악기」 읽기

사람들이 입이나 눈이나 귀 등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이나, 사람들이 각자의 기호를 추구하려는 것을, 세상이 용인하고 나아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또한 지금 여기에서, 그런 욕망의 만족과 기호의 추구를 성찰함이 없이, 기후 환경 위기에 대한 대처와 탈성장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음악이론으로 알려져있으나 정치론의 색채를 강렬하게 띠고 있는 『예기』 「악기」을 한 번 읽어볼만 하다.

예를 바탕으로 행하여지는 가무음곡(歌舞音曲)은 차원높은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

「악기(樂記)」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를 이루고 있는 여러 글 가운데 하나지만, 하나의 유교 경전으로 존중되어 『악경(樂經』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순자(荀子)』 「악론(樂論)」은 『예기』 「악기」의 일부분이다. 『사기(史記)』 「악서(樂書)」와 『예기』 「악기」는, 문장 배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예기』·『순자』·『사기』에 실려있는 음악 이론들이 내용 상 유사하면서도 『예기』 「악기」의 내용이 가장 원형적이면서 풍부하니, 『예기』 「악기」를 중국 고대의 대표적 음악 이론으로 보고 『악경』으로 대접하는 관습이 생긴 듯하다.1

예악(禮樂)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중국에서 예와 음악은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무음곡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중국에서 춤과 음악은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음악이 노래인 경우 그 노래의 가사도 춤과 음악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고대 중국에서만 그러다가 만 것도 아니다. 지금도 춤·음악·노래·가사가 하나로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또한, 그때도 지금도, 음악이 예와 밀접히 연관된 상태에서 쓰이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국경일에 행하여지는 의식 속에 춤과 음악을 적절히 배치하지 못하면 정권이 욕을 먹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춤과 음악과 예 뿐만 아니라 정치도 서로 밀접히 연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예기』 「악기」는 가무음곡과 정치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대체로 음악의 발생을 생각하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음악의 원리는 인정에도 사물의 도리에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소리는 알아도 악음(樂音)을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라 금수인 것이다. 악음은 알아도 음악의 뜻을 모르면 군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며, 오로지 군자만이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음성의 이치를 밝혀서 악음의 이치를 알고 그에 의해 음악의 이치를 알며 그에 의해 정치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으로 이렇게 해야만 치세(治世)의 길이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음의 이치를 모르는 자와는 함께 악음의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악음의 이치를 모르는 자와는 함께 음악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음악의 이치를 알면 예(禮)의 이치를 알기 쉽다. 예와 악(樂)을 함께 익힌 자를 유덕(有德)한 사람이라 칭한다. 덕(德야)이란 득(得)[식득(識得)·체득(體得)]을 뜻한다.”2

음악의 원리[樂] – 인정[倫] – 사물의 도리[理]는 상통하는데, 그것을 아는 자 만이 치세(治世)의 길[治道]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음악의 이치를 알면 예(禮)의 이치를 알기 쉽다”고 하였다. 이는 치세의 길보다 예의 이치가 고차원적이라고 보는 관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예와 악(樂)을 함께 익힌 자를 유덕(有德)한 사람이라 칭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치적 지배자[악을 익힌 자]가 예를 익혔다면 그를 덕 있는 군자라고 해 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예교를 중시하는 유교문화 속에서 가무음곡이 정치와 관련하여 어떻게 자리매김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예를 바탕으로 행하여지는 가무음곡은 차원높은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선왕지도(先王之道)는 호오를 공평하게 하는 일[平好惡]

이어서 『예기』 「악기」는 예를 시행하는 것이 선왕지도의 관계있음을, 가무음곡을 포함시키면서, 역설한다. “이런 관계로 음악의 최고 목적은 좋은 음(音)의 극치(極致)를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향연의 예의 최고 목적이 아름다운 맛의 극치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종묘(宗廟)의 제사에 「청묘(淸廟)」의 시(詩)가 연주될 때 그 슬(瑟)의 현(絃)은 주색(朱色)이며 바닥에 실구멍이 있어 기(氣)를 통하며 [음은 그다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혼자 노래하고 세 사람이 탄상(嘆賞)할 정도의 것이지만, 이는 선왕(先王)의 음악이었던 관계로 존중되는 것이다. 또 종묘(宗廟)의 대례(大禮) 때의 제물로는 현주(玄酒)[물]을 최상으로 치고 생선을 조(俎)에 올려놓으며 국에 양념을 섞지 않으나, 이것이 선왕의 밥상에 대한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존중되는 것이다. 선왕이 예악(禮樂)을 마련함에 있어서는 그에 의해 입이나 눈이나 귀 등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인민에게 호오(好惡)를 공평하게 하는 일[平好惡]을 가르쳐서 인도의 바른 데[人道之正]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기』 「악기」는 가무음곡을 기반으로 하는 분배 정의 추구의 원칙과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한 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출처 : DALL·E
『예기』 「악기」는 가무음곡을 기반으로 하는 분배 정의 추구의 원칙과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한 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출처 : DALL·E

선왕지도를 따르고자 하는 정치에서, 가무음곡이 지향한 바는 최상의 공연이 아니었으며,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에서는 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종묘 제례에서, 노래는 겨우 세 사람의 박수를 받도록 연주되었으며, 맹물과 생선 그리고 조미가 별로 되지 않은 국이 올려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왕 시대의 음악을 재현하고 선왕의 밥상을 기억하는 것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 선왕이 예악(禮樂)을 마련할 때 목표로 한 것은, 사람들이 각자의 기호(嗜好)를 추구하는 데 지나치게 몰입하는 추세를 되돌려[反], 동류의식(同類意識)이 약화되지 않는 상태가 유지[平好惡]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지, 입이나 눈이나 귀 등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성장의 한계를 예측한 것인가?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선왕지도는 사람들이 각자의 기호를 추구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주목하는 것 같다. 선왕지도의 이러한 면은 유가의 수양론의 바탕이 되어준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이러한 평가에 주목하면서, 현재의 사회풍조가 지나치게 이기주의적이라고 보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유가의 수양론이 그러한 풍조에 수반할 수 있는 폐해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동류의식이 약화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사람들이 각자의 기호를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는 면을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와 정반대의 지향성이라 할 수 있다.

‘선왕지도’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보면, 선왕지도라는 이름이 생겼을 때, 그 이름이 붙여진 정치론은 이미 현실성을 잃은 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선왕지도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시기에 사회 변화 속도는 꽤 빨랐을 수 있으며, 오늘날 팽창·성장·발전·진보 등으로 평가하는 변화와 유사한 일이 그 사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에 수반되는 부작용을 크게 염려하면서, 그러한 부작용의 치유책으로 예치(禮治)를 제시하였고, 가무음곡은 그러한 예치에 밀착되어 있으면서 예치의 구현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 혹은 분위기로 부가되었던 것인 듯하다.

이러한 정치기획은 논리적으로 복고(復古)의 성격을 확연하게 띄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지나간 시대에 어떤 이상이 있었다고 설정하고, 그것과 비교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논리는 꽤 많은 사람들을 수월하게 납득시키는 실적을 보장하였을 듯하다. 지금도 이러한 정치기획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시대’에 그 기획이 가졌던 설득력은 훨씬 컸을 것이다. 혹시 그 기획의 창안자 혹은 창안 세력은 ‘성장의 한계’를 내다보기라도 한 것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 시대에도 변화는 있었고, 변화에는 부작용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유교에 대하여 비평하고 평가하려 한다면, 유교가 정치론임을 인정하여야 할 듯하다. 그리고 특정 정치론을 다룰 때는 그 정치론이 어떤 원칙과 방도를 가지고 분배 정의를 추구하는지를 반드시 다루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정치론은 분배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곧 갈등관리라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자원과 기회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 만큼 중요한 관리 대상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컨대 『춘추』 3전에서 주류를 이루는 화제들도, 분배 문제와 연결되는 듯하다. 대일통(大一統)은 단일한 권력 계승의 공고화에 다름 아니다. 권력 계승이 불안하면 사람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자산과 기회의 일부를 잃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남기가 어려워질 확률이 높아지는 시대가 대일통이 강조된 시대였다. 지배집단 내의 예양을 강조한 춘추필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이기고 사양하는 마음을 키움[극기복례(克己復禮)]”이 가능함을 설득하는 데로 나아갔지만 그 필법은 지배집단 내의 골육상쟁(骨肉相爭)부터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골육상쟁을 저지른 지배세력들은 자기를 망쳤을 뿐만 아니라 지배집단에 속하지 않은 아주아주 사람들의 삶을 쉽게 망가뜨렸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부정의한 분배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예기』 「악기」는 『춘추』 3전보다 더 선명한 분배 기획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각자의 기호(嗜好)를 추구하는 데 지나치게 몰입하는 추세에 대한 걱정은 더 큰 욕망 더 많은 생산 나아가 더 빠른 성장에 대한 우려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우려는 동류의식 달리 말하자면 인인애(隣人愛) 즉 이웃 사랑의 약화에 대한 우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각자의 기호를 추구한다는 것은 성장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극단적으로 권장되는 것이다. 지금 자본주의는 에너지나 지식정보 분야의 혁신 못지않게 입이나 눈이나 귀 등의 욕망을 만족시키고자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하면서 유지되고 있다. 『예기』 「악기」에는 이런 바람에 대한 우려도 포함되어있다. 그러니 『예기』 「악기」가, 세세한 분배 전략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분배 정의 실현을 위한 원칙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예기』 「악기」는 가무음곡을 기반으로 하는 분배 정의 추구의 원칙과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한 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원칙과 방도가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비평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후환경 위기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바탕에 깔려있는 탈성장 이야기들과 비교하여보면, 『예기』 「악기」에 보이는 분배 정의 추구의 원칙과 방도가 더 원리적이며 과격해 보일 수도 있다.


  1. 李相玉[譯註], 『新完譯 禮記』 中, 明文堂, 1985, 208쪽 참조.

  2. 李相玉[譯註], 『新完譯 禮記』 中, 明文堂, 1985, 212~123쪽.

  3. 李相玉[譯註], 『新完譯 禮記』 中, 明文堂, 1985, 123쪽.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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