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과 공동체, 새로운 주름에 대하여 -『리추얼의 종말』을 읽고

한병철 교수의 『리추얼의 종말』을 읽고 현재를 다시 고민한다. 실상사 공동체 체험을 바탕으로 리추얼의 의미를 찾아본다. 나아가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된 리좀과 나무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 고립될 수밖에 없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리추얼의 재정립 가능성에 대해 살펴본다.

1. 자기 추앙의 시대

한병철 저 『리추얼의 종말』, (김영사, 2021)
한병철 저 『리추얼의 종말』, (김영사, 2021)

잠자리에 들기 전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잠들기 전 세상에 무슨 변고가 생겼고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 새로 리스트에 올라왔는지 확인해야만 잠이 온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켠다. 내가 잠든 사이 세상에 무슨 변고가 생기진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마치 의례를 치루는 듯 매일 같은 시간에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왠지 신성한 의식과 같다. 하지만 이것은 루틴이다.

이것은 리추얼이 아니다. 한병철 교수는 『리추얼의 종말』(김영사, 2021)에서 이러한 강박과 강제에 의해 하는 행동을 루틴이라고 부르며, 계속적인 반복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는 리추얼과 구별한다. 루틴에 안정감은 없고 불안과 강박만 존재한다. 불안과 강박은 새로운 경험만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핸드폰을 여는 사이에도 나는 새로운 뉴스를 기대한다. 새로운 상품을 기대한다. 새로운 그 무언가를 기대한다.

반대로 반복에는 새로움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반복으로 자리 잡은 리추얼은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 혹은 그 시간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침대처럼 리추얼은 낯설지 않고 나의 밖에 있으며 나와 소통하지 않는다. (소통할 필요가 없으므로) 이러한 것은 어떠한 소모도 없이 존재한다. 이것이 리추얼이다.

이런 리추얼이 현대의 강제된 생산과 강제된 진정성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즉 개인은 각각의 공동체에서 쫓기듯, 홀로 분절되고 단절되며 자신만을 소비하는 나르시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추얼이 자리 잡을 곳은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소비는 강제되고 감정은 과잉되고 창의성을 존중하는 개인의 삶에서 각자는 분열되고 원자화된다. 개인은 한없이 약한 존재로 뒤바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과소비와 나르시시즘은 절편화된 개인을 만들어낸다. 홀로된 개인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창의성과 개성은 개인의 진정성을 선발대로 삼아 자기 스스로를 추앙하게 만든다. 즉 우리는 자기 추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기 추앙의 시대에 공동체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자기 추앙에 바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없다. 이렇듯 자기 추앙은 공동체를 소멸시킨다.

여기저기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2. 리추얼의 종말

“죽음은 삶이 특별하게 끝맺어지는 것을 전제한다. 삶에서 모든 맺음의 가능성을 박탈하면, 삶은 때가 아닌 때에 끝난다…… 밀려드는 이미지와 정보는 눈 감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끝없는 접속 가능성이 있는 공간에서는 끝맺음이 불가능하다.”

『리추얼의 종말』, p39~40

저자는 리추얼을 극단적인 죽음으로 비유하며 변하지 않음과 소통이 없는(소통이 필요없는) 공통체의 존재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즉 개인이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변하게 만들면 우리는 죽음이 없는 세상, 즉 이모탈(Immortal)의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지만 그 곳에서 평화와 안정은 찾을 수 없다. 리추얼이 없는 세상은 결국 불안과 파멸의 장소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 지구화는 문화적 공간들을 탈경계화하고 무너지게 함으로써 문화를 탈장소화하고 과도문화로 만든다…… 과도문화는 상품의 형태로 자기를 드러내며, 뿌리줄기(Rhizom)처럼 경계도 중심도 없이 확산한다. 앞서본 나다스의 야생배나무는 다름 아니라 장소화된(장소를 가진) 문화의 상징이다. 그 나무는 뿌리줄기의 정반대다.”

『리추얼의 종말』, p47

저자는 야생배나무 이야기를 하며 리좀으로 대표되는 들뢰즈의 이야기가 얼마나 파괴적으로 세상과 개인을 단절시키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리좀의 영속적인 분절과 연결은 그 멈춤이 전제되지 않는 한 계속적으로 분절되고 변절될 수밖에 없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 결국 원자화된 개인은 같음의 공간에서 스스로 고립되거나 불안해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저자는 파괴적 공간으로 리좀을 묘사하며 세상엔 리좀이 아닌 나무로 대표되는 공동체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일까.

3. 새로운 공동체

저자는 파괴적 공간으로 리좀을 묘사하며 세상엔 리좀이 아닌 나무로 대표되는 공동체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JJ Ying,
저자는 파괴적 공간으로 리좀을 묘사하며 세상엔 리좀이 아닌 나무로 대표되는 공동체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JJ Ying,

이 글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아주 우연히 지리산 실상사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20여 년간 지역의 귀농활동과 마을의 교육,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느슨한 공동체를 꾸려나가던 실상사가 만든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귀농사회에서는 이미 자리 잡았다고 평가받던 실상사의 마을공동체도 계속해서 젊은이들을 잃고 있었으며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실상사 공동체학교를 만들어 체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자기들이 가장 잘하는 분야를 경험시키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모색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듯 우연하게 시작된 3박4일간의 경험은 내가 기존에 가졌던 공동체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꿈꾸게 만드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즉 세상은 새로운 리추얼이 필요해진 것이다. 굳이 종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종교적 가치로 맺어지기 보다는 새로운 개념의 종교적 가치가 필요한 시기가 된 것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가치가 필요한 시대에 실상사는 그것을 ‘생명평화의 공동체(인드라망, 불교용어로 그물망)’ 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누구나 주지하듯 종교적인 서사는 리추얼에 적합하다. 천년이 훨씬 넘은 고찰이라는 장소, 불교적 의례, 그리고 전통종교의 맥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접근.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유연하면서도 고정된. 즉 리좀이면서도 나무같은 그런 공동체가 아닌가.

실상사에서 3박4일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행사는 아침 법석이었으며 가장 좋았던 배움은 참선이었고 가장 좋았던 소리는 공양간 밥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였다. 아침 법석은 매일 오전 같은 시간에 하는 조회와 같은 것으로 가벼운 예불과 하루일과를 소개하는 자리였고, 참선은 자신의 날숨과 들숨만을 집중하며 고요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밥 때를 알리던 목탁소리는 밥때 뿐만 아니라 아침 법석, 행사의 시작, 노동의 시작 등과 같은 일하는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법석도 참선도 목탁소리도 리추얼이다. 조용히 이 곳(실상사)에 이 시간(같은 시간)에 온다면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함께 할 수 있다. 이렇듯 리추얼이 없던 세상에서 살던 나는 갑작스럽게 만난 리추얼이 너무나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무나 놀랍게도 자연스러웠다. 이는 우리가 불교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낯섬이 적었던 까닭도 있으리라.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은 이렇듯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4. 새로운 주름 : 나무 아닌 나무, 리좀 아닌 리좀.

한병철 교수가 리좀을 비판한다고 하여 들뢰즈가 잘못된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닐 것이다. 들뢰즈 시대에 리좀은 해답으로 충분해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본주의는 이러한 철학적 고민마저 이용하여 개인을 더욱 철저하게 개인화함으로써 리좀을 분절시키고 고립시켰다. 철저히 약화시킨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는 맞았던 이야기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면 맞지 않게 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것은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급격하여 해답과 오답이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더더욱 불안정해진다.

『리추얼의 종말』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리좀을 버리고 공동체로 회귀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리라. 과잉소비, 과잉생산, 과잉감정, 나르시시즘과 과잉문화, 지구화 등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주며 우리가 지극히 옳다고 생각해 추구했던 탈지역화, 탈시간화, 탈문화화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고 소비하고 생산하는 현시대의 우리는 그것들을 거부할 도리는 없다. 피할 수 없다고 멈춰만 있어야 하겠는가.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새로운 도피처를 곳곳에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 불안하고 고통받는 개인은 결국 새로운 리추얼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개인은 안정적인 뿌리내림이 가능한 건강한 나무를 찾아올 것이다. 개인이 마음 놓고 리좀이 되어 뿌리내림이 마음껏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건강할 수 있는 나무를 여기저기 심어 다양한 리좀이 올 수 있도록 만들면 된다.

건강할 수 있는 나무는 스스로 나무로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무는 스스로 리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무 스스로 리좀이 되어 변화하기를 멈추지 않으면, 나무 안에 머물기만 했던 개인은 리좀으로 새롭게 탈바꿈할 것이다. 그 리좀은 다양한 장소로 뿌리를 내어 힘차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리추얼의 모습, 새로운 리좀의 모습이 아닐까.

주름이 매끈한 면이 되고 매끈한 면이 다시 주름이 되는, 매끈하면서 요철이 가득한 세상, 나무가 리좀이 되고 리좀이 나무가 되는 그러한 새 세상을 꿈꿔본다.

노지훈

누구나 찾아와 기댈 수 있는 공원의 작은 벤치 같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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