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림도령 이야기〉에서 경청·개벽·상생을 찾다

이 글은, 한국의 옛이야기를 하나 읽으며, 그 속에서 탈성장·저성장 시대가 요청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지탱하여줄 수 있는 행동방식·가치·규범을 찾아보는 시도를 정리하는 것이다. 한국의 옛이야기 속에는, 옛 맥락 속에서 떼어내서, 새삼스럽게 자리매김하여, 지금 여기에 재맥락화해 볼 만한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데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은 문화자원의 낭비가 될 듯하여, 짐짓 옛이야기를 읽고 글을 써본다.

강림도령’, 저승사자 이야기

한국 사람들이라면 대개 여러 표현 방식들을 통하여 저승사자를 알게 된다. 최근의 가장 새로운 표현 방식은 웹툰일 듯하다. 널리 알려진 웹툰 《신과함께》에도 저승사자 이야기가 나온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주도 무당굿 속 ‘차사본풀이’(差使本풀이)에서 강림도령이 주인공이다.1 현용준에 의하면, ‘차사본풀이’(差使本풀이)는, 장례를 지낸 날 저녁에 죽은 영혼을 위무하여 저승으로 보내는 굿인 귀양풀이, 그리고 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의 하나인 대상(大祥)을 전후하여 죽은 영혼을 위무하고 극락으로 천도하는 굿인 시왕(十王)맞이에서, 무당이 부르는 노래의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차사(差使)는 저승사자이다. 현용준은 귀양풀이나 시왕맞이 속의 ‘차사본풀이’가 죽은 사람을 구박하지 말고 고이 저승까지 데려가 주도록 차사에게 비는 의례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2 조금 다르게 보면, 이들 굿에서 차사의 내력을 노래하는 것은 저승사자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가족을 안심시키는 것이기도 할 듯하다. 왜냐하면, 죽음과 이별이 애통하긴 하지만, 죽은 사람을 이끌고 이승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저승사자가 믿음직한 존재라면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귀양풀이나 시왕맞이 속의 ‘차사본풀이’가 죽은 사람을 구박하지 말고 고이 저승까지 데려가 주도록 차사에게 비는 의례라 할 수 있다. 출처. Mathieu Stern

‘차사본풀이’의 내용은 강림도령이 염라대왕에게 선발되어 차사가 되는 과정이다. 이 ‘차사본풀이’가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강림도령’3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정리되어 실려 있는데, 아래와 같이 19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부분마다 제목이 붙여져 있다.

(1) 버물왕의 삼형제, 출가하다.

(2) 삼형제, 과양각시의 꾐에 넘어가다.

(3) 과양각시, 삼형제를 연화못에 빠뜨리다.

(4) 과양각시, 구슬을 먹고 아들 셋을 낳다.

(5) 과양각시의 세 아들, 과거 급제 후 죽다.

(6) 김치원님, 강림이에게 저승길을 명하다.

(7) 강림도령, 큰 각시의 도움으로 저승길을 떠나다.

(8) 강림도령, 조왕할머니에게 저승길을 듣다.

(9) 강림도령, 일흔 여덟 갈래길에 이르다.

(10) 강림도령, 헹기못에 빠지다.

(11) 강림도령, 연추문에서 염라대왕을 만나다.

(12) 강림도령, 원복장이집에서 염라대왕의 약속을 받아내다.

(13) 강림도령, 저승 헹기못에 뛰어들다.

(14) 강림도령, 큰각시집에 있다가 김치원님에게 잡히다.

(15) 염라왕, 과양각시 부부에게 자백을 받아내다.

(16) 삼형제, 되살아나 부모를 찾아가다.

(17) 강림도령, 염라대왕을 따라가다.

(18) 강림도령, 동방삭을 붙잡다.

(19) 강림도령, 저승차사가 되다.

이 이야기에서, 버물왕의 세 아들을 죽인 후 얻은 과양각시의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죽자, 과양각시는 김치원님에게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고, 김치원님은 강림도령에게 이 일을 떠맡기고, 강림도령은 큰 각시의 도움에 힘입어 이승과 저승을 오가면서 이 일에 얽힌 여러 문제를 해소한 후, 염라대왕에게 발탁되어 저승사자가 된다.

소외된 자의 말을 경청하다

이 이야기 가운데 ‘(6) 김치원님, 강림이에게 저승길을 명하다’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세 아들을 잃고 성에 못 이겨 발악을 하던 과양각시는 광양땅의 통치자 김치원님에게로 달려갔다. “내 아들 삼형제가 한날한시에 나고 한날한시에 시험에 뽑히고 한날한시에 죽어버리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대로는 못 살겠으니 어찌 된 일이지 영문을 밝혀주오.” 사람 죽은 영문을 알 턱이 없는 김치원님이 모른 척 무시하자 과양각시는 매일같이 찾아와 원님을 닦달했다. 김치원님이 계속 모른 척 외면하니 과양각시가 분을 참지 못하고 임금이 이런 일도 해결하지 못한다며 마구 김치원님 욕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일이 어찌나 고약스러운지 김치원님은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터져 나갈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한테는 변변한 아랫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듣자니 강림도령이란 자가 쓸만하다던데 이럴 때 안 쓰고 무얼 합니까?” “강림도령 솜씨는 내가 잘 알지만 그가 이 일을 어찌 해결한단 말입니까?” “저승에 보내서 염라대왕을 불러오면 되지요.” “산 사람이 못 가는 저승인데 무슨 명목으로 강림이를 거기 보냅니까?”

“듣자니 강림도령의 각시첩이 열여덟이랍디다. 새벽에 갑자기 사령들을 소집하면 강림이가 늦을 테니 짐짓 그 죄를 물어서 보내면 될 일입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 김치원님은 사령들에게 급한 연락을 보내 새벽 일찍 관가에 모이라고 영을 내렸다. 강림도령도 소식을 들었으나 그날이 마침 열여덟째 각시첩 장모의 생일인지라 늦게까지 술판을 벌인 터였다. 새벽에 겨우 일어는 났으나 이 각시 저 각시 얼굴 보고서 관청에 들다 보니 혼자만 늦고 말았다. 김치원님이 작두를 꺼내놓고 죄를 물으려 하자 강림이 놀라 말했다. “시키는 일을 다 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네 살길은 하나뿐이다.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잡아와라. 못 하겠거든 당장 목숨을 내놔라.”4 과양각시의 무리한 요구에 골머리를 앓던 김치원님은, 부인의 조언에 따라, 강림도령이 18 각시를 거느리고 있음을 악용하여, 그에게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잡아오는 불가능한 임무를 떠맡긴 것이다.

이어지는 ‘(7) 강림도령, 큰 각시의 도움으로 저승길을 떠나다’ 부분은 다음과 같다; “당장 목숨이 급한지라 강림도령은 염라왕을 잡아오겠노라 다짐을 하고서 풀려났다. 하지만 염라왕을 잡기는커녕 저승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깜깜하기만 했다. 함께 놀던 첩의 집에 찾아가서 어쩌면 좋으냐고 물으니 열여덟 첩의 응대가 똑 하나같다. 그걸 어찌 알겠느냐며 못 지킬 다짐을 한 서방 탓만 하는 것이었다. 오갈 데가 없어진 강림도령은 장가갈 때 한번 보고 인물 없다 소박 놨던 본처 각시 집으로 허적허적 찾아 들어갔다. “설운 낭군님아, 이게 얼마 만이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를 다 찾아왔던가!” 강림도령은 대꾸도 없이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버렸다. 강림도령 큰각시가 한숨 한번 내쉬고서 밥상을 한 상 차려 사랑에 당도하니 문이 잠겨있다. 두드려도 불러도 열어주지 않으니 호미를 가져다 문을 뜯고서 들어가 말했다. “대장부 명색에 이게 웬일이란 말입니까? 이유나 일러주오.” 각시가 세 번을 재촉하자 강림도령이 마지못한 듯 염라대왕 잡으러 가야 하는 사연을 울음 섞어 끄집어냈다. “설운 낭군님아. 대장부가 그만한 일 때문에 이리 운단 말이오. 우습고 우스워라. 그 일은 내게 맡겨 두고 진지나 드십시오.” 그러자 강림도령이 서른여덟 이빨을 훌쩍 드러내며 허우덩싹 웃더니 차려온 밥상에 덥석 달려들었다. 강림도령 큰각시는 광에 들어가서 나주영산 고운 쌀을 내다가 얼음같이 구름같이 절구방아에 넣어놓고 물을 버무려 콩콩 찧은 다음 가루를 체로 쳐서 떡시루에 앉혔다. 첫 층은 문전 시루, 둘째 층은 조왕 시루, 셋째 층은 강림이 먹을 시루. 떡을 다 찐 큰각시가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정성을 다해 문전신 조왕신께 축원을 드리니 감응이 없을 리 없다. 각시가 깜빡 잠든 사이에 꿈속에 나타나 얼른 서방을 저승으로 보내라고 일렀다. 각시의 재촉에 강림도령이 깨어 일어나 저승 갈 복장을 차리는데 모양이 볼만하다. 남방사주 붕에바지, 백방사주 저고리, 한산모시 두루마기에 들소털 흑두전립과 허울거리는 상모, 관장판을 등에 지고 포승줄을 옆에 찼다. “김치원님이 저승길 증표를 어떤 걸 줍디까?” “이걸 주었습니다.” 강림도령이 흰종이에 검은 글씨로 쓴 증표를 내보이자 각시가 깜짝 놀라 김치원님한테로 우레같이 달려들었다. “원님아, 우리 서방님이 저승으로 염라왕을 잡으러 가는데, 증표가 어찌 이렇습니까. 저승 증표는 붉은 종이에 흰 글씨라는 것도 모른단 말입니까?” 김치원님을 재촉해서 새 증표를 받아온 큰각시가 강림도령과 이별을 하는데, 길 가다가 낯선 할아버지 할머니를 공대하면 저승길이 열리리라 한다. 시루떡 한 짐을 서방의 허리에 감아주고 바늘 한 쌈을 남몰래 옷섶에 찔러두고는 어서 떠나라 재촉하니 강림도령이 가뭄에 물 만난 듯 붕어눈을 부릅뜨고 좁은 목에 벼락 치듯 넓은 목에 번개 치듯 호기롭게 길을 나서는 것이었다.”5 죽을 수는 없었기에, 불가능한 임무를 떠안은 강림도령은, 친하게 지내던 18 각시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외면당한 반면, 그가 버리다시피 하였던 ‘강지차(糟糠之妻)’ 큰 각시는 소매 걷고 나서서 그를 돕는다. 큰 각시는 엉터리 저승 증표를 준 김치원님에게 달려가 제대로 된 증표를 받아온 후, 저승길을 여는 수단과 방법을 마련하여 강림도령에게 조언하고 길을 떠나보낸다. 그리하여 강림도령은 “가뭄에 물 만난 듯 붕어눈을 부릅뜨고 좁은 목에 벼락치듯 넓은 목에 번개 치듯 호기롭게 길을 나서는 것이었다.”6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스스로는 별 노력을 하지도 않은 듯한 강림도령은, 의외로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하고, ‘저승사자’라는 이름의 권력도 차지하게 되는데,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는 자신이 소외시켰던 큰 각시의 도움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경청(敬聽)의 능력을 훌륭하게 발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곤경에 처하고,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18 각시에게 외면당한 후에야,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큰 각시에게 의지하려 한, 경박하고 뻔뻔스러운 바람둥이였다. 그렇지만, 어쨌든 소외된 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만은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그 능력이 그를 살려주고 그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경청이 개벽과 상생을 가능하게 한다

한편 강림도령이 경청한 대상이 그가 버려두었던 큰 각시의 말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18 각시와 큰 각시 사이에는 정보 비대칭이 있었을 것이다. 강림도령이라는 권력에 밀착되어 있었던 18 각시는 자신들이 고급 정보들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상태에서 살고 있다고 자부하였을 듯하다. 그런데 강림도령이 곤경에 처하여 도움을 청하였을 때 그들이 보여 준 행동을 보면, 그 저변에 깔린 정보나 정보 판단 그리고 그것들이 근거하였던 가치관이 강림도령이 처한 위기라는 급변하는 현실과 그 현실에 연결된 미래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큰 각시가 당대의 고급 정보에 더 근접하여 있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큰 각시의 활약은, 소외(疏外)되었던 것이 위로 떠오르고, 겉으로 드러나 번성하였던 것 즉 현저(顯著)했던 것이 아래로 가라앉는, 달리 말하자면, 현실이 갈아엎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외(疏外)되었던 것이 위로 떠올랐다고 할 수는 있으나, 현저(顯著)했던 것이 아래로 가라앉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만약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권력을 가지게 된 후 강림도령이 18 각시에게 쪼르르 달려갔다면, 현실이 갈아엎어졌다는 판단은 섣부른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큰 각시의 말을 강림도령이 귀담아들은[경청한] 결과, 강림도령은 저승차사가 되어 판이한 ‘두 세계’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이것은 이승에서 현실을 갈아엎는 것보다 더 넓고 깊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상상을 촉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갈아엎기와 대단히 유사한 뜻을 가진 말이 개벽(開闢)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개벽은 (1) ‘천지가 처음으로 생기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2)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개벽이 이야기될 때, 그 새로움은 낡은 것과의 완벽한 단절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학으로 대표되는 한국 근현대 신종교들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낡은 사회에서 억눌려왔던 사람들의 힘이 중시된다. 여자와 어린이가 새로운 세상의 주역으로 중시되는 것이 그런 경향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경향은 여자가 낡은 세상에서 억눌린 존재였기 때문에 그 낡음의 정체를 알아 새로움을 열어갈 힘과 지혜가 여자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남자를 절멸시켜야 한다고 보는 것이 아님 또한 분명하다. 자기가 버려두어 세상의 억눌림을 감당해야 했던 큰 각시의 말을 경청한 강림도령은, 억눌려 본 경험을 가진 자로부터 지혜를 구한 것이고, 큰 각시는 낡은 세계에 안주하였던 강림도령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어, 강림도령이 저승차사라는 중차대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준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경청의 순간에 기존 질서는 갈아엎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낡은 것과 새것이 뒤섞이기는 하였으나, 낡은 것이 완전히 절멸되지는 않고, 오히려 새 역할 새 생명을 얻게 된 셈이다.

“갈아엎음[개벽]과 서로 살림[상생]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향하지 않는다.” 사진출처: TheDigitalArtist

이런 갈아엎기 즉 개벽(開闢)의 상황은 겨우내 묵은 논에 쟁기질을 하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쟁기질을 하면 땅의 표면에 쌓였던 여러 물질들은 땅속으로 들어가 거름이 된다고, 이런 비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설명한다. 그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느 하나 허투루 버려지는 것이 없이 제몫을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쟁기질은, 땅의 표면에 쌓여 말라가던 것들이 땅속으로 들어가 거름이 되도록 살려내고, 땅속으로 들어가 거름이 된 것은 땅에 떨어진 하나의 씨앗을 이삭이 풍성한 식물 한 포기로 자라는 데 힘을 보탠다. 서로 살림 즉 상생(相生)인 것이다. 갈아엎음[개벽]과 서로 살림[상생]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향하지 않는다. 바로 이점 때문에, 그것들이 함축된 사회정치적 변화는 불철저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런 비난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낡은 것과 철저히 단절하지 못한 변화가 실패로 끝난 사례는 허다했기 때문이다.

탈성장·저성장 문화와 경청·개벽·상생

그러면 탈성장·저성장 시대가 요청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지탱하여줄 수 있는 행동방식·가치·규범의 모색 한 가운데에 개벽과 상생을 놓아본다면 어떨까? 탈성장·저성장을 향하는 마음들은 절박하고 간절하다. 성장 지향의 세계가 빈틈과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음을 보다 보면, 이런 질주가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게 소멸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성장 지향의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있음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후쿠시마 원전에서 오염수를 방류하는 현실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이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의 연결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과 사회들이 각기 따로 떨어져서 상대적이나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오염수 방류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과 모든 존재들이 연결되어있는 면에 더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 오염수 방류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을 듯싶다. 낡은 시대와 깨끗이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과 사회들이 원자적으로 고립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하여야 가능할 듯도 하다. 반면에, 모든 존재들이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변화를 도모할 경우, 서로 살림[상생]을 바탕으로 하는 갈아엎기[개벽], 갈아엎기[개벽]에서 서로 살림[상생]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갈아엎음[개벽]과 서로 살림[상생]이 함축된 사회정치적 변화는,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불철저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낡은 것과 철저히 단절하지 못한 변화가 실패로 끝난 사례를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보아왔으며, 지금도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 변화의 길 위에서 개벽과 상생 특히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경청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떠할까? 사람들은 여러 과학이 지금 여기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을 겪으면서 볼 수 있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최상의 적응을 하여 사회의 최상층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과학을 내세우는 것을 보고 있다.

지금, 그들이 추구하는 각기 다른 이익과 그들이 처한 각기 다른 정치적 입장이, 그들이 내세우는 각기 다른 과학을 빚어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용기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객관성의 신화가 세계 적어도 한국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설명과 예측은 여러 가설들을 수립하고 검토하여 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서, 가설의 수립 단계에서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이해관계와 정치적 입장들이 최종 단계의 설명이나 예측에도 흔적을 남기기 마련임에도, 그러한 과정을 접하지 못한 채 정식화된 설명과 예측 만을 의식에 주입한다면, 과학적 설명과 예측을 ‘순수하게’ 객관적인 법칙으로만 이해하게 될 수 있으며, 일체의 ‘다른’ 설명과 예측을 단호히 폄하하고 거부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러 과학’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자는, 동네북이 되어 너덜너덜해지게 두들겨 맞을 것이나, 객관성의 신화에 약간의 균열을 남기는 값진 기여를 한국 과학기술사에 남기게 될 것이다.

“경청이 일단 타자와 타자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그런 경청은 상생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일 듯하다.” 출처. Alexas_Fotos

이렇듯 객관성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강고한 장애물에 더하여,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변화의 가속화라는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이 덮쳐왔다. 과학이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일진대, 그 대상은 세계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세계 자체의 변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세계의 변화에 대한 설명과 예측의 수명 또한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해관계와 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아울러, 세계 변화 가속화가, 더 많은 과학들이 등장하고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이런 환경은 다른 과학에 대한 경청을 요청하고 있다. 다른 과학에 귀 기울여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애써 쌓아 올린 ‘나의 과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것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과학을 경청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는 자신이 건전한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은 다른 입장과 다른 입장에 선 타자를 배제할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이한 사상적 위생 관념[hygiene concept]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경청은 과학보다 일상의 생활문화 속에서 더 긴요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의 변화 속에서, 과학 못지않게 문화 나아가 일상규범의 변화 또한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청이 일단 타자와 타자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그런 경청은 상생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일 듯하다. 변화의 가속화 속에서 어느 누구도 ‘항구적’으로 옳을 수 없기에 타자에 대한 경청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경청 이후에 어느 한 입장의 절멸이 이어져서는 곤란한 듯하다. 변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세계에서는 당장 너무나 기이해 보이는 문화가 어느새 유용하고 지배적인 문화가 되는 변화가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일상 속에서 그런 변화의 예를 찾아보자면, 불과 몇 년 전에 식탁에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가위가 이제는 대단히 효율적이며 위생적인 식기의 하나가 되어있는 현실 같은 경우 따위를 들 수 있겠다. 이에 비하여, 당장 눈에 뜨이지 않는 듯하지만, 모두의 삶의 전반에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데도, 당장은 그저 기이해 보이는 변화가 ‘성장에서 탈성장·저성장으로 향하는 변화’임이 분명하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탈성장은 기괴하고 어이없는 것을 보이는 듯하다. 변화의 방향만을 보면, 성장에 익숙해져서 거기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탈성장·저성장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함이 시급한 일일 듯하지만, 왠지 그게 쉽고 편안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탈성장·저성장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성장에 익숙해져서 거기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 오래 경청하고 연구하고 공감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한국에서 탈성장·저성장을 지향하는 것은 반체제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자본주의 일반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본주의 역시 반체제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성장과 탈성장·저성장 사이의 상생은 당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탈성장·저성장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한국사회 전반에 상생의 의의를 널리 알리려 노력하여야 할 듯하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탈성장·저성장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정치가들이 상생을 오용(誤用)하고 자본가들이 상생을 남용(濫用)하고 악용(惡用)한 결과 세워진 장벽 앞에 서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 장벽이란 더 이상 상생을 믿지 않고 거기에 냉소를 보내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을 넘지 못한다면 성장에 익숙한 사람들과 탈성장·저성장을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쪽이 얻는 만큼 다른 한쪽은 반드시 잃는 영합(零合)의 내기[zero-sum game]’가 반복될 듯하다. 제아무리 기이하고 불편한 문화와 엉뚱한 세계 설명이라 할지라도, 여지없이 절멸시키기보다는, 그것이 존속될 수 있는 여지를 나눠주는 것이 변화에 대한 실속있는 대처인 듯하다. 이렇듯 여지를 나눠주는 것이 상생의 실질적인 모습이고 개벽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세상 어느 구석에 강림도령의 큰 각시 같은 존재가 간신히 숨 쉬고 있는지 모를 일인 것이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차사본풀이’ (집필 : 현용준)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차사본풀이’ 참조.

  3. [네이버 지식백과] 강림도령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4. [네이버 지식백과] 강림도령

  5. [네이버 지식백과] 강림도령

  6. [네이버 지식백과] 강림도령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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