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낌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짚어 보다 – 기후 위기 속에서 『중용』을 읽고

예로부터 사람이 남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비겁해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가, 개인의 욕망이 존중되고 그것을 중심과 추동력으로 움직이고 발전하는 세계가 전개되자. 사람들은 비겁해 보이지 않으려는 것을 넘어, 거리낌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후 환경 위기가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지금, 더 이상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찬양할 수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의 거리낌 없음은 자원의 과소비를 가져오고, 그것은 분명 기후 환경의 악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유교 경전 『중용장구』는 거리낌 없음을 새삼스레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다.

성백효 저, 『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성백효 저, 『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중용」은 유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인 『예기』의 한 편이었다가, 송나라 유학자들에 의하여 『예기』로부터 분리되어, 성리학의 원천 역할을 하는 4서의 하나가 되었다. 주희는 이 문서가 공자의 손자 자사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희는 『중용』의 내용을 33장으로 나누고,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주석을 더하여 ‘중용장구서’를 써 붙여, 『중용장구』 혹은 『중용장구집주』라고 불리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후에 『중용』이라 하면 그것은 『예기』「중용」이 아니라 주희가 편찬한 『중용장구』를 의미하다시피 하게 되었으며 이 책을 경전의 하나로 하는 사상 즉 성리학이 15세기 이후 조선에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주희가 편찬한 주석과 수정도 중요하지만, 특히 성리학의 수양론이 갖는 얼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용장구서」는 사상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서이다.

거리낌 없다는 것

『중용장구』 제2장은 다음과 같다.

仲尼曰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君子中庸 (군자는 중용을 하고)
小人反中庸 (소인은 중용에 반대로 한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군자가 중용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소인의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

제2장에서 주희는 중용을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과(過)와 불급(不及)이 없어 평상(平常)한 이치’라고 주석하였다. 시중(時中)이라는 말도 중시할 만한데, 번역은 ‘때에 맞게 하기’라고 되어있다. 달리 말하자면 상황에 들어맞게 행위하기라는 말일 것이다. 행하기 쉬운 일이 아니며 어떻게 하는 건지 정답도 없지만, 잘 하기만 하면 정말로 좋을 것 같은 행위 방식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기탄(無忌憚)’ 즉 ‘기탄없기’라는 말 앞에서 멈칫할 것 같다. 지금 여기에서는 오랫동안, ‘기탄없이’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정도를 넘어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흉금을 터놓고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용장구』에서는 ‘기탄없음’을 소인의 행실로 단정하고 있는 듯 하다.

기탄없다는 것은 거리낌 없다, 거침없다 등등으로 바꿔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될 듯 하다. 『중용장구』 제2장의 맥락 속에 ‘무기탄’이라는 말을 놓고 보기 전까지는, 거리낌 없음, 거침없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게 느껴지기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억압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거리낌 없음 혹은 거침 없음은 억압들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코 나쁜 말, 나쁜 행위 방식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대개 이렇게 느껴왔건만, 『중용장구』 제2장에서는 기탄 없음을 소인의 행실이라 하니, 『중용장구』 제2장에서 무기탄이라는 말을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잠시 의아해질 것이다. 그러나 대개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인간 관계를 거리낌 없이 한다는 것은 자칫 관계의 상대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내 멋대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모를 뿐임, 아예 없는 것이 아님

주희는 주석을 통하여 ‘때에 맞게 하기[時中]’와 ‘거리낌없음[無忌憚]’을 섬세하게 나누어 설명한다.

(1) 왕숙(王肅)의 본에 ‘小人之反中庸也(소인지반중용야)’로 되어 있는데, 정자께서도 또한 ‘이것이 옳다’ 하였으니, 지금 이를 따른다.
(2) 군자가 중용을 하는 까닭은 군자의 덕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중에 처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하는 까닭은 소인의 마음이 있고 또 기탄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3) 중은 일정한 체가 없어 때에 따라 있으니, 이것이 바로 평상의 리이다.
(4) 군자는 이것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능히 보지 않을 때에도 계신(戒愼)하고 듣지 않을 때에도 공구(恐懼)하여 때마다 맞지 않음이 없고, 소인은 이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욕심을 부리고 망령되이 행동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다. [번호 부여는 필자에 의한 것이다.]

(1)을 보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용장구』 제2장의 마지막 문장은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소인의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판본에 따라 [ ] 위치에 ‘반(反)’ 자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던 듯하다. 주희는 정자를 따라 [ ] 위치에 ‘반(反)’ 자가 있는 왕숙 본을 채택하였다고 밝혔다. 글자 하나가 있고 없음은 문맥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1-가)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소인의 중용함은 소인이면서 거리낌이 없다)
(1-나)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소인의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거리낌이 없다)

(1-가)는 “이유진이 이유진했네”와 같은 발화 방식을 연상시킨다. 큰 인물이 되지 못하는 자는 그저 자기 그릇만큼 행할 뿐이라는 비아냥이 담긴 발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아냥이 글 전체의 분위기에 부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문장을 그대로 두면, 중용함을 서로 다른 두 가지로 정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소인의 소인됨과 군자의 군자됨이 고정되어 있어서, 소인이 수양에 의하여 군자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버려서 문제이기도 하다.

『중용장구』 제2장 속에 놓고 보면, [ ] 위치에 ‘반(反)’ 자를 넣어 (1-나)처럼 만들어 주는 것이 글의 흐름을 문맥을 통하게 해주는 것 같다. 군자-시중-중용 대 소인-무기탄-반중용의 대비가 더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문장이 (1-나)와 같아야 소인이 수양에 의하여 군자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2장 속에서 살아있게 되는 것 같다

(2)에서, 주희는 군자와 덕과 ‘능히 때에 따라 중에 처함’ 즉 ‘때에 따라 중에 처할 수 있는 능력’을 동일시한다. 또한 주희는, 소인의 마음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거리낌, 즉 ‘기탄하는 바가 없는’ 상태일 뿐이라고 해설하였다. 이는 소인의 마음 속에도 기탄하는 바가 있을 수 있음 또한 함의하는 해설이라 할 수 있다.

(3)에서, 주희는 ;때에 맞게 함; 즉 시중(時中)에서의 중(中)이 평상(平常)의 리(理)라고 해설하였다. 어떤 학자는 평상과 항상(恒常)을 대비시키면서 용은 평상이 아니라 항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항상을 ‘늘 작동하고 있음’이라 풀어 말한다면, 이에 비하여 평상은 ‘기본적인’이라 풀어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용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과(過)와 불급(不及)이 없음이 마음 속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가 사람으로 하여금 때에 딱 맞게 행위하도록 하는 것’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4)에서 주희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중용이 기본적으로 깃들어 있는데, 군자는 중용이 자기 마음 속에 깃들어 있음을 알고 소인은 모른다고 해설한다. 모를 뿐임을, 아예 없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계신(戒愼), 공구(恐懼), 눈치

중용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어떤 사람에게는 깃들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깃들어 있지 않다면, 사람이 수양을 통하여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중용장구』 제2장 주석에서 주희는 모든 사람이 수양을 통하여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음을 부수적으로 주장한다. 앞서 보았듯 주희는 “군자는 이것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능히 보지 않을 때에도 계신(戒愼)하고 듣지않을 때에도 공구(恐懼)하여 때마다 맞지 않음이 없고, 소인은 이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욕심을 부리고 망령되이 행동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a)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과와 불급이 없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사람
→ 보는 이 없어도 행위를 함부로 하지 않고, 듣는 이 없어도 말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함부로 하지 아니하여, 때마다 맞지 않음이 없음

(b)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과와 불급이 없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
→ 욕심을 부리고, 행위를 함부로 하여, 거리끼는 바가 없게 됨

(a)와 (b)의 차이는 앎과 알지 못함의 차이이다. 있음과 없음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이는 사람이 수양을 통하여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준다. 이 여지는 유교문화 전체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중용장구』 제2장 주석에서, 이 여지를 부연하는 것은 주희에게는 부수적이었던 듯하다. 주희의 관심은 ‘때에 맞게 하기[時中]’의 중요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하여. 지금 여기의 한국 사람들이 『중용장구』 제2장을 읽을 때는 ‘거리낌 없음[無忌憚]’에 눈이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하였던 바와 같이, 그것에 대한 이 텍스트에서의 평가와, 그것에 대하여 지금 여기의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적 감정이 상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용장구』 제2장에서, 주희의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곳은 계근부도(戒謹不睹)와 공구불문(恐懼不聞)인 듯하다.

계근부도(戒謹不睹) : 보는 이 없어도 행위를 함부로 하지 않음 / 계신(戒愼)
공구불문(恐懼不聞) : 듣는 이 없어도 생각과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음 / 공구(恐懼)

한때 ‘계신’과 ‘공구’는 중학교 윤리 교과서에서 권장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계신공구(戒愼恐懼), 계구신독(戒懼愼獨)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에서 한국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하여 양가적 감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치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감정에 있어서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거리낌 없음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은 만큼, 눈치 보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의 생활방식이 누군가의 생존 기회에 대한 약탈일 수 있다. 사진출처 : Hans
나의 생활방식이 누군가의 생존 기회에 대한 약탈일 수 있다.
사진출처 : Hans

가족관계를 비롯하여 태어나보니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간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그것이 확장된 것으로써의 인간관계를 무난히 끌고 가는 것을 중시하는 문화. 유교는 그러한 문화 속에서 발생 발전하여 그러한 문화를 정당화하고 고양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독립과 자존 그리고 그것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는 중요한 한 축인 욕망을 존중하는 세계 속에서, 유교의 윤리문화가 가질 수 있는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중용장구』 제2장의 도처에 보이는 여러 행동 방침들. 즉 ‘거리낌 없음에 대한 경계’, ‘때에 맞게 하기’, ‘계신’, ‘공구’ 등은,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로 꼽히는 지금 여기 남한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는 행동 방침들이다.

그렇다면 기후 환경 위기 속에서 이러한 행동 방침들은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이 위기를 설명하는 열쇳말 가운데 하나인 ‘약탈’을 생각해 보는 것이 자리매김의 시작일 듯하다. 지금 여기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화석연료 사용과 육식, 어획 등을 그만두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며, 일견 수긍할만한 면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든, 그러한 행위들이 미래 세대가 사용하여야 할 자원들을 현재에 당겨 쓰는 것임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약탈”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현재 이웃에 대한 약탈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에서 예상되고 있는 생활공간의 침수와 수몰을 역으로 따라가다 보면, 에너지 사용방식을 만나게 되고, 더 되짚어가면 나의 생활 편의 증진에까지 소급하게 되어, 내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생존 기회를 그도 나도 모르게 약탈하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의 소비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소비한다면, 나의 소비가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행하여질 것이다. 이렇듯 내 소비와 행위에 관련된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삶의 자세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면, 거리낌 없고 호쾌하다 하여 부러움의 대상이되거나 칭송받던 행위들 가운데 어떤 것은 ‘눈치없는 짓’이 될 것이다.

주희는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과와 불급이 없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욕심을 부리고, 행위를 함부로 하여, 거리끼는 바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역으로, 지금의 우리가 우리 각자의 욕망과 소비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보면, 거리끼는 바가 점점 늘게 되고, 행위 특히 소비를 덜 함부로 하게 되고, 욕심 자체를 덜 부리게 되어,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과와 불급이 없음이 우리 각자의 습관이 되지 않을까? 우리 각자가 불완전하고 불안정적인 존재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모든 행위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때 그리고 장소와 상황에 부합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한다면, 보고 듣는 이가 없더라도 내 행위와 욕망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보다 많이, 보다 더 깊게 고려하여, 조금이라도 덜 편벽되고, 조금이라도 덜 치우치며, 지나침도 모자람도 완벽히 없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을 항상 의식하는 방향으로, 우리 각자는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출처] :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3,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1.]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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