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敎宗) 프란치스코의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읽기①

교종(敎宗) 프란치스코의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는 삶에 관하여』(Laudato Si‘)는 우리 인류를 지구에 잠시 머물다 가는 거류민으로서 섬기고 돌보는 삶으로 안내한다.

올해로 가톨릭교회 교종(敎宗) 프란치스코의 (생태)회칙인 『찬미받으소서: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는 삶에 관하여』(Laudato Si‘: On Care for Our Common Home, 2015.5.24.)가 반포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역대 교종들이 반포한 회칙은 대개는 일반인들에게 빠르게 전달되어 읽히지 않는데, 이 회칙은 현 기후위기시대에 여러 실천과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프란치스코 저, 2015)는 더불어 사는 집, 곧 지구를 돌보는 데에 관한 것으로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생태 문제를 성찰하며 회개와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찬미받으소서』(프란치스코 저, 2015)는 더불어 사는 집, 곧 지구를 돌보는 데에 관한 것으로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생태 문제를 성찰하며 회개와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먼저 6장으로 구성된 이 회칙을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서론에서는 이 세상만물의 연관성을 살아생전 여실히 보여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소개합니다(1-16항).

1장은 ’지금 우리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17-61항)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의 생태위기 상황을 나열하지요. 토양-대기-수질오염, 생물 다양성 상실, 인간 삶의 질 저하와 사회 붕괴, 악화되는 불평등에 미적미적 거리고 있는 정책과 실천도 비판하고요.

2장은 ’창조의 복음‘(62-100항)이라는 제목으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담고 있는 창조의 조화, 우주적 지혜와 친교, 재화가 지닌 공동 목적과 예수가 살아생전 가르치고 보여준 생태적 처신에 대해 다룹니다.

3장은 ’생태 재앙의 인간적 뿌리들‘(101-136항)이 무엇인지 밝히지요. 과학기술이 인간의 창의성인 동시에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사실, 근대 인간중심주의가 지구에 돌이키기 어려운 재앙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비평합니다.

4장은 오늘날의 생태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통합 생태론‘(137-162항)을 제안합니다. 자연환경-경제-사회-문화에 내포된 생태적 요소들이 우리 일상생활에 유효적절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공동선과 세대 간 정의가 필수적임을 알려줍니다.

5장은 ’접근과 행동 노선들‘(163-201항)이라는 제목으로 공동의 집인 지구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해야 하는지 안내하지요. 생태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들의 대화, 국가와 지역 차원의 새 정책들을 위한 대화, 이들 대화와 의사결정의 투명성 및 정치경제적 사안들, 과학과 종교간 대화까지 전 세계적 차원의 실천을 제안합니다.

결론에 해당하는 6장은 ’생태교육과 영성‘(202-246항)이라는 제목으로 생태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힙니다. 우리 일상생활을 전환시키고 생태회심을 이끌어줄 교육을 통해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조언해줍니다.

전체 회칙이 246항이나 되고 요약한대로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이 회칙문헌이 무척 두꺼울 거라고 예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존 교황청 문헌들의 딱딱한 교리적 논조에 비해서, 본 회칙은 일상의 어법으로 쓰여 있어서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올해 반포 7주년을 맞아 KBS UHD 기후변화 특집 《지구의 경고: 100인의 리딩쇼》 2부 ’지구, 우리 모두의 집‘ 방송에서는 배우 김미숙, 성우 김상현, 건축가 승효상 등유명인과 농부, 학자, 셰프, 화가, 수도자들이 이 회칙을 읽는 모습을 보여줍니다(7월 15일(목) 오후 8:30 KBS 2TV).

가톨릭신자이자 생태신학을 공부한 제가 회칙 내용을 분석하고 주해하는 것이 연구자로서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 회칙의 생태사상을 한국종교인 동학(천도교)의 삼경론과 비교한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생명연구』, 2018.11). 그러나 여기서는 회칙 내용 중에 제 마음을 머물게 한 부분을 제 삶과 관련지어 풀어내 보겠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교종 프란치스코

『찬미받으소서』 서론 11항에는 가톨릭교회의 생태수호 성인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1181(2)-1226.10.3)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해줍니다. 성인은 자연에 깊은 관심과 경외심을 지녔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를 실현하고자 가난을 선택하고 돌봄을 실천했지요. 특별히 이 금욕과 절제하는 삶이 그를 내면의 평화에 닿도록 해주었다고 합니다.

현 교종 프란치스코(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베르골료 추기경)는 2013년 3월 13일 교종으로 선출될 당시, 교종명을 프란치스코라고 정했습니다. 그는 사흘 후 기자회견에서 그 까닭을 말하지요. “나에게 성인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이며, 평화의 사람인 동시에 창조된 세계를 사랑하고 가꾸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평화의 정신을 나눠주며, 가난한 사람으로서… 그렇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바로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탱해주고 보살피는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가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녀에게 입힌 상처[의 고통] 때문입니다.”(1-2항) by Nikola Jovanovic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OBok3F8buKY
“우리를 지탱해주고 보살피는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가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녀에게 입힌 상처[의 고통] 때문입니다.”(1-2항)
사진 출처 : Nikola Jovanovic

그러니 어찌 현 교종이 이 세상의 창조물을 ’형제‘나 ’누이‘로 부르고 찬미한 성인을 외면할 수 있었겠어요? 회칙 이름이 『찬미받으소서』인 까닭도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 첫머리가 “저의 주님,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이고, 노래 중에 계속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왔나요? 교종 프란치스코는 자연과 뭇 생명을 경외하고 형제자매로 부르기는커녕 이용하다 못해 파괴하고 멸종시켜온 우리 현실을 이렇게 고발하지요. “우리를 지탱해주고 보살피는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가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녀에게 입힌 상처[의 고통] 때문입니다.”(1-2항)

제가 서울 한 귀퉁이에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가장 미안했던 것은, 푸르른 하늘과 우거진 숲과 맑은 개울이 있는 곳에 더 자주 데려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번쩍대는 간판이 둘러싼 아스팔트 도로에서 언제 교통사고를 당할까 “하지마, 안 돼”를 연발하는 상황이 서글펐습니다. 아토피성 피부염과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의 천진한 심성이 신경질적이고 퉁명스럽게 바뀌는 듯해서 죄책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병이 돌보는 이들의 자업자득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노오력과 영끌로 빨리빨리’ 갈아엎고 쌓아올리고 움켜쥔 것들, 즉각적 욕망과 편리함을 추종한 생활방식이 병든 자녀로 찾아왔고, 이들을 힘겹게 돌보는 행위 자체가 더 병들어 태어날 후손들을 증폭시킬 처참한 미래를 예측하게 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이들은 시중에 판매되는 분유와 젖병, 종이기저귀 등 유아 필수품과 두 계절도 입히기 전에 작아져버리는 아기 옷들의 유해성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용품은 소비자가 왕이 된 오늘날 재활용되기보다 빠르게 쓰레기로 치워버립니다. 그 쓰레기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 어딘가를 떠다니다가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결국 우리 입속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단 아기용품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물품들이 오늘날 ‘내다버리는 문화’로 우리 공동의 집 지구를 어떻게 돌이키지 못하게 훼손시키고 있지요. 본 회칙 1장은 이러한 우리의 소비 습관들이 누이요 어머니인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망쳐놓았고, 결국 우리 인간들이 자멸적 자기 파괴의 길로 깊숙이 들어섰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줍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 프란치스코와 교종 프란치스코는 조언합니다. 우리는 우주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신 분의 도구라고 말입니다. 특별히 성인은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기도를 통해 깊은 성찰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 살고 있는가?

자, 그럼 2장 ‘창조의 복음’에 나오는 여러 인간 군상 가운데 본인이 어디 속하는지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인간만이 세상의 주인이고 지배자라는 생각으로, 창세기 1장 28절의 “지배하라”는 명령에 근거한 인간관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만물은 인간을 위한 이용가치만을 지녔을 뿐이라고 치부하지요. 창조물일 뿐인 인간이 한계를 망각하고, 마치 神인양 착각에 빠진 꼴입니다.

둘째, 인간은 세상의 청지기로서 하느님을 대리한 지구의 관리자요 책임자라는 생각이며 “일구고 돌보라”(창세 2,15)는 명령에 근거합니다. 오늘날 생태신학자들이 선호하는 인간관이죠. 그러나 저는 여기에도 인간의 오만함이 작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 자신을 돌아볼 때, 저는 관리와 책임을 자타공인 100% 완벽히 수행한 적이 많지 않거든요.

셋째, 인간은 세상의 일부라는 관점입니다. “땅은 나(하느님)의 것이다. 너희(인간)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와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마르 10.43; 마태 20,26; 루카 22,26)가 어느 정도 해당하려나요. 거류민은 ‘남의 나라 영토에서 머물러 사는 사람’이니, 남의 것을 잠시 빌어서 쓰는 사람은 마땅히 함부로 다루면 안 되겠지요. 공손히 조심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태도가 기본이고요.

넷째, 인간은 공동의 집인 지구의 암적인 존재, 파괴자라는 관점입니다. 솔직히 현재 대다수 사람들이 이 인간 군상에 속하는 듯합니다. 병든 아이를 돌보며 깨친 바가 있어 생태신학을 공부하였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제 집구석은 지인들이 곱게 쓰다 물려준 물건들과 더불어, 시청각 유혹에 홀린 클릭질로 사놓은 물건들이 가득가득 차 있습니다.

제 자신이 요 모양 요 꼴이니, 식구들이 버젓이 행하는 쉽게 사고 쉽게 내버리는 모습을 그저 씁쓸히 바라볼 뿐입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거실 구석이 쌓이는 종이-비닐-플라스틱 재활용 쓰레기들을 정리하여 눈밖에 치우면서, 저부터 어머니 지구에서 암수술로 도려내야 할 암 덩어리라는 자괴감에 추락하고 맙니다.

“과학의 경고: 티핑-포인트를 넘기면 기후재앙이 도미노처럼 밀려온다”는 영국 가디언지 기사(The Guardians 2021.6.3.)를 봅니다.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란 ‘예상치 못한 일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극적 변화의 순간. 처음에는 미미하게 진행되던 어떤 상황이 일순간 모든 것을 급변시키는 극적 순간’을 말합니다.

올 여름 마른장마와 열돔(heat dome) 속 코로나 4차 대유행은 티핑-포인트의 뚜렷한 전조로 보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낭패감 속에서도 여전히 생태적 삶으로 전환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저라는 인간은 대체 얼마나 구제불능인 걸까요?

유정원

생태신학을 계속 공부하면서도 생태실천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있는, 머리의 지식이 손과 발로 온전히 내려오지 못한 미숙한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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