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敎宗) 프란치스코의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읽기②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상의 소소하고 작은 생태 실천들이 사회에 선을 퍼뜨릴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자기 자신의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다고 느끼도록 해줄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가톨릭교회 교종(敎宗) 프란치스코의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서론과 1-2장을 내용 일부를 살펴보았습니다. 800여 년 전 아씨시에서 생태영성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현 교종 프란치스코의 연관성과, 회칙에서 언급한 4가지 인간상을 다루었습니다.

이번에는 회칙 3-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생태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밝히고, 현대의 파괴적인 문명을 대체할 생태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전 세계인이 함께 노력하고 실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과학기술에 둘러싸인 인간

3장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준 과학기술과 근대의 인간중심주의가 왜 생태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는지 진단합니다.

우리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탁월하게 새로운 도구들을 발명해왔고 잘 다룰 줄 압니다. 강의 중에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빠지지 않는 대답 중 하나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답변입니다. 석기-청동기-철기 문명을 거친 인류는 과학기술혁명을 이루며 첨단 도구를 발명해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멋지고 편리한 도구에 둘러싸여, 도구의 힘으로 살고 있는지요. 제가 이 글을 쓰고 전송하는 데 사용하는 컴퓨터와 인터넷, 찜통더위에 혼미해진 정신으로 열어대는 냉장고와 불나게 틀고 있는 선풍기, 약속시간까지 내 몸을 실어다주는 자동차와 전철. 코로나 속에서도 일상을 지탱해주는 듬직하고 눈부신 과학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고립감과 무력감 속에서 주저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그저 고맙기만 한 것일까요? 회칙은 이 질문을 물고 늘어집니다. 그리고 비판합니다. “과학기술의 산물들이 결코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산물은 특정 권력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명령한 노선을 따른 결과들이며… 특정 부류의 ’사회‘와 관련된 결정들입니다.”(107항) “과학기술로 둘러싸인 우리는 ’과학기술이 결코 인류의 이익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도, 인류의 참된 삶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108항)

작은 행동이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삶이 가지 있음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by Ana Frantz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gyd4RJ64IYo
작은 행동이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삶이 가지 있음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사진 출처 : Ana Frantz

생태신학을 공부하면서 저는 과학자들이 다투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습니다. 처음은 새만금 개발로 논쟁하던 때였습니다. 새만금 갯벌 현장을 방문할 당시 저는 아이들을 친정에 잠시 맡겼습니다. 밤늦게야 도착한 저는 반나절 이상 젖을 물리지 못한 둘째를 허겁지겁 품에 안으며 깨달았습니다. 갯벌에서 살고 성장하는 생명들과 생계 벌이를 하는 지역민들, 때가 되면 찾아오는 철새들은 마치 배가 고파서 파고드는 내 아기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과학자들끼리 논쟁하는 모습을 또 맞닥뜨린 것은 4대강 개발사업 때였습니다. 모 대학 교수와 모 기업 연구원이 동일한 데이터로 첨예하게 상반된 입장을 발표하는 현장에서, “명백한 사실(fact)이 중요하구나.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분석하고 적용하는가는 훨씬 더 중요하구나!”를 배웠습니다. 또한 “어디서 돈을 받고 연구하느냐”가 얼마나 모순적인 입장 차이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과 일맥상통하게도, 회칙은 지적합니다. 과학기술의 전문화, 지식의 파편(세분)화, 정보의 고립(폐쇄)화, 윤리와 단절된 과학기술이 자본시장과 결탁할 때 무한 권력을 어리석게 행사한다는 것을(110항). 환경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138항) 말입니다.

또한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가 결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도와준 이념이 아니었다는 냉혹하고 잔인한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근현대 문명이 추구한 인간성과 존엄하다고 대접받는 인간은 자본과 권력을 차지한 부류였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서 선진국 백인 남성 자본가와 지식인들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통합 생태론이 무엇인가?

이런 엄밀한 진단 이후에 4장에서는 ’통합 생태론‘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왠지 이 용어가 저에게는 친근한 듯하면서도 뭔가 서걱서걱하고 껄끄럽게 느껴집니다. ’통합‘도 ’생태‘도 요즘 자주 회자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면 그리 통합적이고 생태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회칙에는 “우리는 자연을 구성합니다. 우리는 자연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연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139항), “전체가 부분보다 위대하다”(141항), “자연은 마치 세습 재산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역사적, 예술적, 문화적 세습 재산도 있습니다.”(143항)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냉정히 볼 때, 아스팔트 대도시에서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연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에만 좋은 헛소리 같습니다. 코로나로 집콕 생활을 하며 답답하고 무력한 현실과 씨름하는 이들에게 ’전체가 부분보다 위대하다‘는 말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가상현실에서나 체감할 수 있는 허깨비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물려줄 여러 ’세습 재산‘들 가운데 ’자연‘이 포함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자라는 아이들과 미래 후손들에게 어떤 세상을 남겨두길 바라고 있습니까?”(160항)라는 질문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이제는 지구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들을 더 이상 경멸하거나 빈정거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가올 세대들에게 파편더미와 황무지와 오물을 남겨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161항) 있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지요. 더구나 우리 자녀들은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메타버스, 블록체인, 양자컴퓨터 같은, 기성세대가 모르는 새로운 첨단 과학기술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 듯합니다.

회칙은 제안합니다. 불안하고 막막한 현실에 질질 끌려가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우리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돌보고 존중하면서 자기 내면의 깊이까지 들어가 보라고 말이지요. 또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관과 정책들을 모색하고, 사물을 다르게 보는 교육을 통해 공동선과 세대 간 정의를 위한 생태문화를 만들어 나갈 때라고 알려줍니다.

작은 실천의 가치

5장은 이러한 생태문화를 이루어가기 위해 어떤 ’접근과 행동 노선들‘(163-201항)을 도모해야 할지 안내합니다. 생태위기 상황을 제대로 보고 해결하기 위한 다방면의 대화가 절실하다고 말합니다. 세계적 차원 – 국가 차원 – 지역 차원의 대화를 통해 투명하게 정치경제적인 결정을 이루어가자고 독려합니다. 특별히 과학과 종교 간 대화가 미래 후손들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6장은 ’생태교육과 영성‘(202-246항)에 대해 다룹니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고 생태 회심으로 이끌어줄 교육을 통해서, 오늘과 내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제시해 주고 있지요. 많은 논의점이 있지만, 내향적이고 현실적인 제 눈길을 붙잡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가족들조차 무시하는 일상의 작은 생태실천들이 망가지고 있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 실망할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212항, 230항).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소소한 일상의 몸짓들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선을 퍼뜨린다고, 또 그 작은 행동이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삶이 가치 있음을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회칙은 작고 소박한 생태 실천이 결코 쓸모없는 것이 아님을 프랑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1873-1897)에 기대어 알려줍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예수의 작은 꽃‘이라고 불리는 그는 15세에 맨발의 가르멜회에 들어가 17세에 수녀가 된 후 7년간 봉쇄 수녀원 안에서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 길지 않은 기간에 그분이 보여준 작은 사랑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적은 것이 더 많다”(less is more, 222항)는 역설을 밝혀주었지요.

끊임없는 경쟁과 발전의 채찍질 속에서 성공을 위해 달려온 우리는 충동적인 소비주의에 휩쓸린 채 살고 있습니다. 시멘트 길 틈새로 굳세게 피어난 민들레와 인사할 여유도, 하늘에 구름이 어디로 흘러가고 저녁놀이 어떤 빛깔로 저무는 지 잠시나마 바라보고 숨 돌릴 틈도 없이 걸어갑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는 사막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의 집 지구에 사막이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사막이 그만큼 광활해진 탓입니다. 생태 위기는 철저한 내적 전환의 소환장이기도 합니다”(217항).

지난 글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생태신학을 공부해왔고 나름대로 실천을 하려고 노력해왔음에도 허접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도 한 점 나아진 것 없이 쓰레기를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암세포와 다를 바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오랫동안 허우적거리지 않으려 합니다. 제 마음 속 사막을 주시하고, 부족하지만 소박하고 비우는 삶을 통해 작은 오아시스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뜨거운 한낮 나무줄기에 붙어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잠깐 동안 쓰라린 눈을 감고서, 나를 둘러싼 작은 존재들과 함께 고요히 호흡하고 인사 나누는 휴식을 짬짬이 누려보겠습니다.

유정원

생태신학을 계속 공부하면서도 생태실천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있는, 머리의 지식이 손과 발로 온전히 내려오지 못한 미숙한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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