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양식으로서의 사회구성체 – 『세계사의 구조』를 읽고

가라타니 고진은 이 책을 통해 맑스주의가 생산양식으로 사회구성체를 파악하여 국가나 네이션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에 대한 보완으로 교환양식을 중심으로 사회구성체를 파악함으로써 국가나 네이션을 포함한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 저, 『세계사의 구조』 (출판사 b, 2012)
가라타니 고진 저, 『세계사의 구조』 (출판사 b, 2012)

맑스의 『자본론』은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경제권력의 양식(생산양식, 하부구조)을 토대로 정치와 국가 등과 같은 사회체제(상부구조)가 형성된다고 밝히며, 생산수단의 소유를 사회화하면,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실현되면 자연스럽게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도 옅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사회주의라는 이상이 민족이나 국경, 인종의 차이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던 역사적 경험은 단순히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사의 구조』에 드러난 고진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생산양식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상적 사회주의는 가능할 것인가? 저자는 맑스의 생산양식을 교환양식으로 대치하여 사회구성체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의 소유에 의해 결정되는 생산양식은 역사의 단선적 발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다양한 사회구성체가 같은 시대 상에 함께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규명이 불가능하지만, 교환양식에 따른 사회구성체는 다양한 교환양식을 가진 사회구성체가 같은 시대 안에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네 가지 교환양식〉
가라타니 고진의 〈네 가지 교환양식〉

저자가 주장하는 교환양식은 네 가지로, ‘교환양식 A는 호수적 교환(증여와 답례)’, ‘B는 약탈과 재분배(또는 지배와 보호)’, ‘C는 상품교환’, ‘D는 A의 고차원적 복원’을 의미한다. 이 네 가지 교환양식은 생산양식이 단선적으로 발전하면서 그 이전 생산양식을 대체하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2~3가지 교환양식이 늘 한꺼번에 존재한다. 그리고 저자는 어떤 교환양식이 어느 집단에, 또는 어떤 관계 간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미니시스템, 세계=제국, 세계=경제 등으로 사회구성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시아 역사와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이슬람 제국 및 근대 유럽 국가들의 관계 역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호수적 교환에 근거한 교환양식 A를 고차원적으로 복원한 교환양식 D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가 되어야 사회주의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와 같은 자본주의 세계시스템 형성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상품교환이 지배적인 교환양식 C가 보편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시장과 무역을 보증할 수 있는 국가의 성립이 필수적임을 봉건제-절대왕정-근대국가형성 과정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전 세계 동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지 않는 이상 생산수단의 소유에 따른 생산양식의 변화로 인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사회주의 동시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때문에 국가라는 틀 또한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 그러하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국가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을 함께 극복할 수 있을 때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공화국 체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전통 맑스주의가 간과했던 국가와 민족을 사회구성체 분석을 위한 기본요소로 자리매김시키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분석의 단초를 마련한 것은 저자의 공헌이라 할 수 있겠다.

자본에 대한 극복은 노동자가 단지 노동력을 팔기만 하는 프롤레타리아로서가 아닌 상품 소비자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생산-소비자협동조합이나 지역화폐 등을 활용하여 상품교환과정에 파열구를 냄으로써 극복이 가능하다고 하며, 국가에 대한 극복은 국가가 국가에 대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에 입각하여 ‘증여에 의한 영원평화’가 실현될 때, 저자가 이상적인 사회구성체로 명명한 ‘세계공화국’이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저자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소비자 운동과 칸트의 윤리관에 입각한 국가관계 형성을 통해 호수적 교환양식 A를 고차원적으로 복원한 교환양식 D가 가능한 세계체제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도 기술했듯이 교환양식 D는 발생 시기의 종교공동체나 종말론적 공동체에서나 소규모로 제한된 시기에나 가능했던 것인데, 이를 개인의 다양한 욕망과 이기심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속사회와 국가 간에서 실현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호수적 교환양식 A를 고차원적으로 복원했다고 하는 종교공동체에서조차 교환양식 D는 제한적으로만 실현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종말론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위기감은 종말의 지연으로 인해 그 세계관을 지속할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노동자가 소비자의 역할을 통해 자본을 극복할 수 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아마도 일본의 협동조합운동의 다양한 성공사례에 기대고 있지 않나 유추해본다. 하지만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자본을 위협할만한 조직으로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다고 본다. 아울러 동남아시아 사회활동가들 사이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은 그리 긍정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지금 현재 내가 일하는 캄보디아에서는 노벨상까지 받긴 했지만 이미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는 유누스의 그라민은행을 따라 마이크로크래딧을 표방한 협동조합이 캄보디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10년 만에 매출 1위가 된 A은행의 전신이 NGO에서 설립했던 마이크로크래딧이었다는 것을 보면, 한국에도 지부를 두고 있는 유수의 단체들이 진행하고 있는 캄보디아의 마이크로크래딧이 과연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한 국가(우크라이나)내 소수 네이션(러시아)의 문제가 빌미가 되어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냉혹한 국제질서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의무론적 윤리에 입각해서 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도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물론 저자가 제시하는 것이 이렇게 단순한 해법은 아니다. 홉스, 헤겔, 롤스 등의 견해를 훑어본 후 칸트의 ‘영원평화’가 가장 현실적임을 논증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흔쾌히 공감되고 동의되는 것은 아니다).

가라타니의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이 나이브하게 보이지만, 21세기 기후위기를 동반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아마도 종교 체험에 버금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과 회심에 기반한 결단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에겐 수단일 뿐이었던 자연까지도 고귀한 생명으로 대하는 감수성을 가진 영성적 인류가 출현할 때라야 가라타니가 주장하는 호수적 교환양식 A를 고차원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영성적 인류의 출현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뭇 생명에 대한 감수성으로 가득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를 규명하고, 이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 새로운 이상사회를 열망하는 이들의 당면과제가 아닐까!

이성욱

목사, 캄보디아 선교사.
캄보디아에서 평화그림책을 만들어 보급하고, 캄보디아 지방에 있는 공립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독서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 가기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국제연대부 근무하며, 숲해설가와 평화교육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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