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럭아비하던 날

가을이 오면 벼는 고개 숙여 추수를 기다린다. 추수가 끝난 논은 기러기들의 먹이터이면서 휴식처가 된다. 기러기들은 그들의 생리로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행동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나눠준다.

기러기는 부부의 상징으로 불리며 신(信), 절(節), 예(禮), 지(智)가 있다고 한다. 가을이 오면 돌아온다는 믿음, 외도하지 않는 절제, 비행 편대를 보면 예가 있고, 공중에서나 먹이활동을 할 때나 서로를 지키는 지혜1가 있다고 한다. 단짝 친구가 전통혼례를 올려 장가가던 날 ‘전안례(奠雁禮)’2에서 나는 ‘기럭아비’3를 맡았다.

친구의 혼례에서 기럭아비 역을 맡았다. 기럭아비는 보자기를 감싼 목기러기를 안고 있다가 신랑에게 건네주는 역할을 한다.
사진제공 : 한승욱

친구의 혼례는 만추에 올려졌다. 기럭아비 역을 부탁받고 정보와 수행할 역할을 알아보면서 지난 날 파주에서 한 선생님께 들은 기러기의 신․절․예․지를 떠올렸다. 기러기의 미덕을 생각하며 친구와, 친구와 함께할 분의 앞날을 희망으로 펼쳐보인다는 것에 마음 부푼 날들이었다.

부부의 상징으로 원앙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앙에 1부 1처의 순정은 없어 보이며 보통 기대하는 뜻으로 위시하기엔 무리가 있다. 한 쌍이 함께 다니는 어여쁜 모습 때문일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잘못 알려진 것 같다. 아침 일찍 도착해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안내 선생님 따라 한 차례 예행연습을 했다. 사전 학습한 것보다 간편화된 절차였지만 꼬마신랑 같은 친구의 결혼에 흠을 낼 세라 긴장을 했다. 본식이 거행되며 나는 보자기로 감싼 목(木)기러기를 안고 친구 옆에 앉아 웃어 보였다.

이동하고 대기하고 차례가 되자 친구 앞으로 다가섰다. 목기러기 안은 손을 하늘 높이 올렸다가 가슴 아래께로 내리고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반절까지 3번 한 것 같고 이후 친구에게 목기러기를 건네주는 것으로 내 역할은 마무리 되었다.

식이 끝나고 파주 공릉천 가 들녘으로 향했다. 꽉 막힌 강변북로 지나 자유로 타고 가면 잠자리로 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볼 수 있을 거였다.

기러기들은 편대를 이뤄 전자음악 같은 소리를 내고 추수가 끝난 논을 향해 날아왔다. 해는 저물어가고 노을빛에 기러기들은 그림자로 보이고, 착륙하려 선회하는 모습은 공연을 정리하는 무용수 같았다. 이렇게 겸허한 풍경이 있을까. 순풍을 타고 감속하며 빙 돌고 내려앉은 기러기들은 어둠과 잠 속으로 접어들 때까지 소곤소곤했다.

기러기 찾아드는 들녘에 서면 계절과 회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전처럼 자주 친구를 만나 당구를 칠 순 없게 됐지만, 흔들리는 갈대 그 아래 같이 흔들리는 코스모스, 황금빛 나는 기러기들의 외연, 넘어가는 해와 산의 음영, 그런 풍경에서 안심하고 쓸쓸해해도 괜찮았다.

10월 마지막 주, 오늘 저녁도 내가 사는 곳 가까이 파주와 김포 등지로 가고 있을 기러기들의 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서식지에도 개발 이슈가 있어 걱정을 하지만 왠지 기러기들은 끄떡없이 언제나 가을이면 찾아와 끼룩끼룩 날며 마음을 달래줄 것 같다.

가을이 오면 벼는 고개 숙여 추수를 기다린다. 추수가 끝난 논은 기러기들의 먹이터이면서 휴식처가 된다. 기러기들은 그들의 생리로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행동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나눠준다.

추수가 끝난 논은 기러기들의 먹이터이면서 휴식처가 된다. 사진제공 : 한승욱

  1. 이동 시 V 형태로 떼지어 날아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 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서로의 체력을 유지한다. 먹이활동 시에는 가장자리 보초를 세워 천적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한다.

  2. 신랑이 기러기를 신부 댁에 전달하면서 혼인에 대한 승낙을 구하는 의례. 한 번 짝을 맺으면 다시는 새로 짝을 짓지 않는 기러기처럼 백년해로하겠다는 의미가 담여 있음. – 출처 : 한국의집

  3. 기럭아범이라고도 한다. 전통 혼례에서, 혼인날 신랑과 그 일행이 신부 집으로 갈 때 기러기를 들고 신랑 앞에 서서 가는 사람. – 두산백과

한승욱

회화를 중심으로 글쓰기, 사진, 영상, 도자, 등을 다루며 창작하고 있습니다. 예술강사 활동을 했고 동료 예술가들과 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환경 활동을 하고, 탐조를 즐깁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간사로 일하며 창작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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