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후우울 일지

기후우울증의 경험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뒤, 생계를 해결하고자 집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노동을 하고 있지만, 최저시급을 받아서인지 물가가 올라서인지 월말이 되면 생활비가 아슬아슬해져서 마트 세일코너에 길게 머문다. 이왕이면 유기농 채소, 친환경 생활용품을 소비하자고 마음먹어도 다른 상품의 두 배 이상인 가격을 보면 선뜻 담기가 어려웠다. 매번 장바구니와 종이봉투를 들고 다니며 포장 비닐과 플라스틱을 최소로 줄이려 노력했지만, 일주일만 지나도 분리수거함은 포화상태였다.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지구를 망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을 요청한 손님들에게 일회용 컵을 제공할 때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우유를 몇 팩씩 하수구에 쏟아 버려야 할 때도 비슷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불편한 요소들을 피할 선택지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노동 강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가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바쁘게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항상 피로감에 시달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2020년 8월 초, 본가가 위치한 동네에 집중 호우와 산사태가 발생했다. 십이 년을 살던 곳이었지만 동네를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던 개울물이 그렇게 불어난 것은 처음 보았다. 곧 집 앞으로 흙더미가 쏟아지는 것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던 어르신 두 분이 휩쓸려 실종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여름, 쏟아지는 빗물에 신림동의 한 반지하 주택에서 세 모녀가 목숨을 잃었다.
사진 출처 : David Kristianto
지난 여름, 쏟아지는 빗물에 신림동의 한 반지하 주택에서 세 모녀가 목숨을 잃었다.
사진 출처 : David Kristianto

다음 날 출근을 했다. 버스 창문에 비친 동네는 온통 엉망이었다. 소방차와 경찰차, 포크레인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망가진 것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버스가 정상운행한다는 사실이 안심되면서도 이웃이 죽고 도로에 재해의 흔적이 가득한데 세상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 원망스러웠다. 나의 세 배는 족히 사셨을 할머니들께서도 이런 물난리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라고 겁을 내셨다. 그 후부터 기후위기에 관련된 정보와 각종 뉴스들을 주기적으로 찾아보고, 제로웨이스트와 비거니즘 등의 실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또 한 번의 폭우에 전국이 마비되었다. “수도권, 홍수주의보 발령” 따위의 제목을 단 인터넷 기사가 포털사이트를 뒤덮었고, 각 방송사는 실시간으로 재해 현장을 송출했다. SNS에는 무릎까지 차오른 물 때문에 현관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글이나 지하철 7호선 이수역의 천장이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영상과 같이 피해를 직접 알리는 게시물이 계속해서 업데이트되었다. 쏟아지는 빗물에 신림동의 한 반지하 주택에서 세 모녀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슷한 참사들이 너무나도 짧은 주기로 반복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적이고 시간은 가고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 내야 할지, 나아지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에 점차 희망을 믿기가 어려웠다.

친구 H와 작년 9월에 진행되었던 기후정의행진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다. 그는 현장에서 약간의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지금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는데, 모인 사람이 고작 삼만 오천여 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마음만 보낸 이들도 분명히 있다며 숫자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독였지만, 그의 절망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현실의 위기가 매일같이 피부로 느껴지는 와중에 삼만 오천이라는 숫자를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불안과 죄책감은 나뿐 아니라 타인들의 행동거지마저 계속해서 검열하게 만들었다. 사진출처 : Pheladiii
불안과 죄책감은 나뿐 아니라 타인들의 행동거지마저 계속해서 검열하게 만들었다.
사진출처 : Pheladiii

불안과 죄책감은 나뿐 아니라 타인들의 행동거지마저 계속해서 검열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아르바이트도, 공부도, 심지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끼니를 챙겨 먹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 즈음 공황발작 증상이 처음 나타났다. 곧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고,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병명을 알고 난 후에야 그간의 감정들을 성찰할 수 있었다.

‘기후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휴가차 본가에 방문했던 날, 길었던 우울의 과정을 고백하자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십여 년 전 그는 서울의 매끈한 거리를 걸을 때마다 땅을 뒤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보도블록을 모두 뜯어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흙 위를 걷고 싶어 그랬다던 엄마는 올해로 귀농한 지 17년 된 농부다. 그간 흙을 원 없이 밟으며 단단해진 두 발바닥을 나는 알고 있었다. 조금은 길었던 대화 끝에 큰 위로와 용기를 경험한 후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여전히 코앞에 닥친 위기에 대한 대응은 현저히 부족하고, 노력하는 이들의 깊은 좌절과 절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무언가 깨닫는 과정이 있었다고 해서 앞으로 다가올 모든 고통과 시련에 현명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 또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생명의 세계를 존중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지금 여기 내 삶을 고민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어떤 결과를 미리 상상하는 것 보다 우리의 세계를 위해 꾸준히 함께 절망하고 위로하고 고민하는 일에 힘을 쏟고 싶다.

동하

‘해 뜨는 동쪽 하늘’이라는 뜻의 제 이름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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