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장] ⑯ 마을주민이 원하는 상생협약 체결기

개발사업자가 제주도에서 개발사업을 진행할 경우 제주도특별법과 조례에서는주민들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마을과 상생협약을 체결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비리 등이 발생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2년간 진행된 우리마을과 개발사업자 간의 상생협약 체결과정을 되돌아본다.

‘선흘2리’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제주동물테마파크’ 관련 기사가 수백 개 검색되지만, 사실 마을 주변에는 제주동물테마파크 이외에도 크고 작은 관광 시설들이 많이 있다. 지가가 저렴한 중산간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던 시설들인데, L업체도 그중 하나였다. L업체는 10여년 전부터 녹차밭을 테마로 운영하다가 최근 새롭게 농어촌관광휴양단지로 탈바꿈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오늘은 선흘2리 마을회와 L업체가 2021년 초부터 협의를 진행해 지난해 12월에 상생협약 체결을 하게 된 2년여의 과정을 ‘전지적마을회시점’에서 돌아보려고 한다. 주민된 입장에서야 거주지 인근에 개발사업이 진행되는 게 탐탁지 않지만, 이미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이기에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지역주민과 자연환경을 돌보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지 싶다.

1라운드. 상호 탐색전

초보 이장이 되어 정신이 없던 2021년 5월 무렵. L업체의 이사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기존 사업지에 새로운 사업을 변경해 추진하고 싶단다. 제주동물테마파크 논란으로도 마을은 충분히 시끄러운데 또 다른 개발사업이라니. 머리가 아파왔지만 일단 사업체가 위치한 곳의 반장님 그리고 운영위원님과 함께 리사무소에서 사업자를 만났다.

사업자는 기존 시설에 녹차체험관을 신설하고 40여동의 글램핑장을 지어 야간관광을 활성화하겠다는 계획을 피력했다. 마을 식당들은 대부분 3시까지 영업하고 문을 닫는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주민들도 5시가 넘어서는 잘 돌아다니지 않는 조용한 마을인데 야간개장도 모자라 글램핑장이라니. 이 사업이 승인되면 인근 주민들은 여름에 창문을 열 때마다 고기를 구워먹는 냄새를 맡으며 고성방가를 참아야 하겠지.

이장과 몇몇 사람들이 결정하기엔 논란이 있어 보여서 사업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사업계획서 등을 보내주면 운영위에서 논의해보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주민 의견수렴은 마을회의 공식 기구를 통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다. 사진 출처 : Lukas
주민 의견수렴은 마을회의 공식 기구를 통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다.
사진 출처 : Lukas

마을의 떨떠름한 반응 때문이었는지 업체 측에서 새로운 사람을 리사무소로 보냈다. 자신을 전무라고 소개한 나이가 좀 있는 분이었다. 본인이 제주 출신으로 육지에서 여러 개발사업을 경험했다는 이분은, 어떻게 알았는지 주변에 부탁을 거부하기 힘든 주민들을 이름을 읊어대며 친분을 과시했다. 곧바로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왔다. 마을에 몇 년 살지 않은 지금도 거절이 어려운데 내가 제주 토박이였더라면 거절은 불가능했지 싶었다.

전무님은 두 달 가까이 거의 매일 리사무소로 출근하며 “이제 개발사업은 이장님처럼 진행해야지 옛날처럼 대충하면 안된다”며 나에겐 듣기 좋은 칭찬(?)을 하셨지만 내가 꿈쩍할 기미가 없자 사업지 인근에 사시는 영향력이 넘치는 주민들을 찾아가 마을 이장이 좋은 사업을 방해한다며 사업 찬성 동의서를 받으러 다니셨다.

나는 곧바로 업체 측에 연락해 이런 방식이면 더이상 마을 차원의 논의는 없다는 의견을 전했고, 사업 동의 여부는 이장의 개인 결정 사항이 아니라 총회 등 마을 대표 기구를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라고 못 박았다. 나중에 전해들은 바로는 당시 업체 내부에서 여러 이견들이 있었고 ‘정상절차파’보다는 관행대로 ‘괸당이용파’의 의견이 득세해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나 뭐라나.

2라운드. 논의 규칙 정하기

고스톱이 제 아무리 국민게임이라 하더라도, 칠 때는 먼저 규칙부터 정해야 한다. 동네마다 아니 같은 동네라도 옆집과도 룰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뻑’은 얼마를 줄 건지, ‘따닥’은 인정할 건지 말 건지를 미리 정하지 않으면 결국 고성과 함께 화투장이 날아다니는 경험을 하게 되어 있다. 상생협약 체결 전에도 규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먼저 사업 승인 주무부서인 제주도 친환경농업정책팀장과 주무관을 만나 사업 진행상황을 확인했고, “제주도특별법에 따라 마을의 동의없이는 (승인 과정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확답부터 받았다. 수년간 제주사회에서 큰 논란거리인 제주동물테마파크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행정이 잘 처신해야 하며, 선흘리 주민들이 보통 분들이 아니라는 걸 공무원들에게 수차례 주지시켰다.

마을회 공식 절차를 무시하고 관행대로 ‘괸당’을 이용하다가 곤혹스런 상황이 된 사업자 측에도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명확히 했다. 주민 의견수렴은 마을회의 공식 기구를 통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다. 마을회는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주민들의 결정을 그대로 따를 것이며 따라서 결과도 사업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 수 있다.

마을회 내부적으로도 논의 규칙이 필요했다. 이장인 나도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혼자서 사업자를 만나는 상황은 피했고, 논의 장소는 리사무소로 한정했다. 부득이하게 혼자서 만나게 되는 경우 그 결과를 운영위원회 단톡방에 곧바로 공유했다. 운영위원들도 사업자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을 피해달라고 부탁하고, 관련된 모든 내용은 운영위 등 마을회의 공식 기구를 통해서만 논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또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업체측의 입김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업과 관련한 반상회, 사업설명회, 운영위원회, 마을총회, 현장방문 등도 사업자 측의 일체의 지원없이 마을회가 비용을 감당해 논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3라운드. 본격 주민의견 수렴하기

2021년 9월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마을운영위원회는 ‘어떻게 하면 주민들에게 사업내용을 알리고 의견을 수렴할 수 있을까?’를 주로 논의했다. 당시는 코로나19로 확산으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던 때라 실내 공간에 많은 주민들이 모이기 힘들어, 소규모 반상회를 여러 차례 개최해 사업내용을 알렸다. 반상회에 참가하지 못한 주민들에게 마을문자에 사업계획서와 마을회의 우려 사항 등을 링크해 수시로 전달했다. 주민들과 함께 직접 사업지를 방문해 주변 민가와의 거리, 구체적 사업내용, 소음 및 빛공해 해결 방안 등을 업체 측과 논의하기도 했다.

관련해 마을총회는 세 번 열렸다. 2022년 1월 정기총회에서는 사업계획에 대한 찬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주민입장에서는 ‘혐오(?)시설일 수밖에 없는 글램핑장인데 피해 당사자인 인근 주민들로 한정시켜서 결정해야 한다’ ‘아니다. 마을 일이니 전체 주민이 결정할 문제다’로 오래도록 이야기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해서다. 결국 3월 임시총회를 다시 열어서 사업 찬반 투표가 이루어졌다.

총회 당시 업체 측은 해외다큐 방송채널로 유명한 D사의 이름을 내세운 친환경적 글램핑장을 만들겠다고 주민들에게 읍소했지만, 결국 주민들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밤이면 칠흑같은 어둠으로 숨죽이는 한라산 중산간 마을에 40여기의 캠핑장 소음은 어떤 이유로도 주민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 총회 직후 마을회는 ‘사업 반대’라는 총회 결과를 제주도 해당 부서에 공문으로 발송했다.

그렇게 마무리 되는 줄 알았던 사업은 사업자가 주민들이 가장 우려하던 글램핑장을 포기하고, 야외 예술 작품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수정된 사업계획안을 마을회와 제주도에 제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가장 논란이 된 사업을 포기하기로 한 만큼 마을회는 재논의를 결정했고, 두 번의 주민 설명회 이후 6월 임시총회가 다시 열렸다.

당시 일부 주민들은 극심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사업자가 약속을 뒤집고 원래대로 사업계획을 변경하면 이를 저지하기가 힘들다는 점과 상생협약의 법적 효력 여부였다. 하지만 일부 주민의 반대에도 수정안에 대한 논의 끝에 진행된 주민투표는 결국 찬성으로 가결되었고, 반대 주민들의 우려 사항을 해소할 상생협력안을 마을회에서 만들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4라운드. 티키타카 상생협약안 도출하기

총회 직후 2022년 6월부터 사업자는 상생협약안 논의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1년이 넘도록 기다려온 사업자측 입장에서 보면 이해 가는 측면이 있으나 마을운영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먼저 상생협약안 수용기준을 정하고, 마을회의 요구사항이 수용된 협약안이 만들어질 때까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핵심 목표는 거액의 마을발전기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업으로 인한 주민 피해 발생시 사업자의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강제하고, 사업계획 변경시 주민동의 의무화하는 등 ‘법적 효력이 있는 상생협약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2022.12.14. L업체와 선흘2리 마을회와의 상생협약 조인식. ⓒ이상영
2022.12.14. L업체와 선흘2리 마을회와의 상생협약 조인식. ⓒ이상영

마을총회의 결과가 찬성으로 나오자 사업자 측은 자기들이 협의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마을회의 요구사항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본인들에게 유리한 협약서만을 수 차례 고집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 이상하면 물어봐야 한다. 제주동물테마파크 관련해서 15건(?)의 소송을 도와주신 대책위 변호사님께 자문을 구했다. ‘사업자가 제시한 협약서는 마을회 입장에선 너무 불공정하니 화를 내시면서 던져도 될 정도다’라는 자문을 들으니, 돈이 들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변호사를 선임해 어렵게 마을회의 의견이 반영된 법적 구속력이 있는 협약서를 만들어 제안했다. 사업자 측은 마을회의 조치를 돈을 얻기 위한 행태라고 폄훼하려 했다. 신뢰가 깨졌다고 판단됐다. 마을회는 결국 2022년 11월 ‘상생협의 중단’과 2023년 1월 정기총회에서 주민들에게 상생협약 논의과정을 보고 후 사업에 대해 재논의하기로 결정했다. 상생협약 자체가 결렬될 상황이었다. 그러자 사업자 측은 마을회가 제안한 상생협약안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알려왔다.

2년간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 2022년 12월 14일 눈이 풀풀 내리는 날 선흘2리 마을은 L사업자와 ‘상생협약 조인식’을 가졌다.

5라운드. 부릅뜬 눈으로 사후관리

1990년대 말 프랑스의 다국적기업이자 당시 세계 2위 유통기업 ‘까르푸’가 한국에 진출했다. 그런데 한국에 진출한 까르푸는 노동권을 중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한국 노동자들을 탄압해 논란이 되었다. 그건 노동자를 쉽게 해고가 가능하도록 규정한 한국의 노동법의 결과물이었다. 제도적 장치없이 기업들의 이미지와 선의에만 기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개인적으로 2년 가까이 함께 협의를 해온 업체 측 이사는 소탈하고 신뢰가 가는 분이다. 하지만 까르푸의 사례처럼 최소한의 제도(법)적 강제가 담보되지 않고 이장 개인이나 사업체의 선의에만 기댄 신뢰는 깨질 수밖에 없다. 마을회가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고 결국엔 변호사를 선임하면서까지 고집스럽게 법적 구속력이 있는 상생협약을 요구한 이유다.

어찌 보면 민주적 절차를 거친 상생협약 체결은 선흘2리 마을회와 L사업자 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기존 여타 업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마을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해할 여력은 없지만, 앞으로 마을운영위원회나 주민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개발사업자들을 만나야 하는지는 쬐끔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이장 임기가 끝나더라도 더디고 시끄럽고 지난한 이 과정들이 잘 반복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임기가 이제 1년 남았다. 야호! 신난다!

이 글은 『제주투데이』 2023년 1월 30일 자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사진저작권 : 이상영)

이상영

20년 가까이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사회)를 가르치다, 2018년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로 이주한 초보 제주인. 2019년 초 학부모들과 함께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으로 선출된 후, 2021년 어쩌다 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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