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톱은 누가 깎아줄까? – 볼 수 없는 것들의 윤리와 미학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던 시기, 어느 날 엄마의 발톱이 길게 자란 것이 보였다. 손톱깎이로 깎아드리며, 그제야 엄마가 엄마였을 때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노인들, 환자들, 지워진 사람들, 소수자들, 비인간 생명들,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좀 더 존엄하게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엄마가 아팠던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러시다 말겠거니 했다. 나이듦은 원래 아픈 사람이란 인식 때문이었겠다. 그런데, 엄마와 함께 지내던 조카의 다급한 통화에 할머니가 쓰러져 의식이 없다는 말이 들려왔다. 일단 119(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모셔라 했는데, 다니시던 동네 종합병원에서는 뇌경색을 치료할 기술이 없다며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적정 치료 시간을 넘어섰고 엄마는 멍해지셨다.

뇌경색, 혈관이 터진 건 아니지만 뇌의 혈관을 막아버린 이물질들로 인하여 엄마는 더이상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게 되셨다. 즉 살아는 있지만 자신이 누군지, 타인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흔히들 아기가 된 거라고 말하지만, 그건 적절한 예가 아닌 것도 같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지만, 통증은 느껴 고통은 호소한다. 스스로 먹을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다. 욕창이 생길까 만들어진 여러 기구들이 있다한들 아기를 다루듯 보살피는 사람의 손이 가야 하는데, 이제 그 일은 가족이 아닌 타인들, 더구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던 시기, 어느 날 엄마의 발톱이 길게 자란 것이 보였다. 손톱깎이로 깎아드리며, 그제야 엄마가 엄마였을 때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랬으면 좋았겠다 라는 아쉬움과 함께…

우리의 노년은 얼마나 다를까? 
사진 출처 : Danie Franco
우리의 노년은 얼마나 다를까?
사진 출처 : Danie Franco

그렇게 1년 반을 같은 병원에서 지내시다 결국 폐경색이란 질환으로 되돌아가셨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당시에는 차라리 잘 돌아가셨단 마음이 들 정도로 엄마의 요양병원 생활은 보기에 힘들었다.

우리의 노년은 다를까? 돈이 있든 없든 결국 나도 저렇게 타인의 손들에 의해 연명되다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때 내 발톱을 깎아 줄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

동네마다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노인돌봄센터들, 요양원들, 수용소의 다른 이름들… 잘 지내고 있다고 한들, 거기가 어딘지 인식을 못하고 있을,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가족 관계가 붕괴되고, 나이 들고 병들면 수용되는 현재의 시스템, 고령의 학자들이 나이 듦에 대해 아무리 예찬한다고 한들, 결국엔 저 혼자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죽어가야 하는 우리의 현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비단 노인들 뿐일까, 약자들, 가난한 이들, 사회체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결국 비용(돈), 시장 논리에만 맡겨진 시대에 돌봄이 아닌 구제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 사회를 가정으로 놓고 볼 때 그 일은 정부와 지자체가 책임감을 갖고 개선하고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현시점에서 그러한 책임 의식을 갖는 이들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사회 돌봄 시스템의 중요성을 깨달은 소수의 학자들과 시민들은 여러 단위들로 문제점을 점검하고 의식변화라도 해보자고 애쓰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우리 엄마가 겪은 마지막 길이 최선일 수밖에 없단 것이 현실이 된다. 고령의 특수질병일 경우 국민건강보험에서 의료비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돌봄의 문제는 여전히 고스란히 혈연 가족들의 몫이 된다.

핵가족 1세대인 우리 세대는 그 일을 나눌 형제자매들조차 없다. 있다한들 가정보단 요양원이라도 의료시설(을 흉내를 낸 곳)에 계시게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사회체제 안에 머물게 된다.

모두가 준비되지 않는 인생을 산다. 나조차 어떤 것이 나은 방법인지 알 수가 없었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의료시설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엄마는 집이 아닌 낯선 곳, 생전에 그렇게 싫어하셨던 병원 시설에서 온갖 의료행위라는 이름의 폭력에 고통당하시다 돌아가시게 된 거다.

내 집에서 내 명대로 살다가 죽을 수는 없는 걸까? 그 또한 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어쩌면 그것이 바로 고독사일 수도 있을 테고, ‘고독한 죽음’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슬프다. 그런 죽음이 앞으로 더 많아질 거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현실이다. 우리의 미래가 이렇다면 지금 열심히 산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사회에서 지워진? 아니 지워낸 사람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없어도 되는 존재들일까? 사회 구성원이 되려면 어떤 조건들에 들어야 하는 걸까? 존재만으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이들 한 명 한 명이 모여 결국 우리 사회를 이룬 것인데 왜 지워져야 하는 걸까…

이런 얘기들을 이웃들과 나누다 보면, 이구동성 “어쩔 수 없지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라고 한다. 사회 보장을 요구하는 행위를 정도(定度)에 벗어난 행위라고 스스로들 여기고 있는 사회, 난 그런 게 참 이상하다.

지워진 사람들, 약자들, 소수자들, 비인간 생명들,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처지가 어떻든 존재로 인정받고 같이 살아보자고 모여있는 것이 사회가 아닌가, 크게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는 그 일이 현실이 되기에는 인식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사회는 돌봄 의제마저 또 다른 일자리가 생겼다며 위안으로 삼고, 이내 시장 논리에 맡겨놓고는 관리 감독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현실…

엄마의 임종을 보지 못해 그녀가 어떤 고통 속에 숨을 거두셨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차갑게 식어진 육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생하셨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 생애를 살아내시느라 수고하셨고, 고통을 참아내시느라 애쓰셨다고… 그저 그녀가 힘겹게 겪었을 고통을 고작 타인의 위치에서 위로해 드릴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그렇게 죽어갈 텐데, 내 발톱은 누가 깎아줄까… 어느 외국인 노동자가 나를 만져댈까, 직업이 된 이들의 고단한 하루 중 귀찮은 일과가 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몸, 우리 모두가 갈 길이라면 지금처럼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존엄하게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는데, 그 일은 살아있을 때 해야 맞지 않겠는가.

오영주

천주교인이고 녹색당원으로의 정체성으로, 생명평화 관련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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