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마주보기] ⑤ 기억할게

새미(솔빈)는 숲정이의 딸이다. 숲정이는 새미의 엄마이다. 엄마는 딸이 살아가는 세상을 자연답게 가꾸기 위해 시민운동을 하였다. 정성스럽게 ‘선과 정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좌절과 허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의지를 잃은 엄마가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을 딸에게 이야기한다. 딸 새미는 고단한 엄마, ‘숲정이’를 위로하고 ‘엄마’를 바라본다. 이것은 주고 받는 “마주보기 이야기 글”이다. 숲정이와 새미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 숲정이의 사월 일기

노동절인 오늘도 새미는 일하는 중일까? 네 몫으로 위풍당당 사회로 진출한 새미가 고맙고 대견하다. 그러나 제대로 휴식을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구나. 새로운 환경에서 고민과 적응 그리고 도전은 오롯 너의 길이지만 수월하지 않다란 것을 어미는 알고 있다. 새미의 모든 과정을 응원하고 선택을 지지한다. 실수를 두려워 하지말자. 잘못도 인정하자. 모자람도 알아채자. 우리는 현재를 사실로 바라보지만 따뜻하고 깊이 있게 세상을 넓혀가자. 끝없이 새미의 모든 것을 사랑해. 엄마는 노동자의 일상을 지난 삼월을 끝으로 쉬게 되었단다. 결단의 용기와 기회는 새미의 독립이었지. 고마워. 그동안 생기발랄한 육지의 사월 녹색이 무척 그리웠단다. 오지게 결심하고 욕심껏 사월을 여행하였지.

기후위기, 우리가 대안이다. 기후위기, 우리가 길을 낸다.


-기후정의파업에 다녀와서.

세종에서 열린 414 기후정의 파업. 사진제공 : 숲정이
세종에서 열린 414 기후정의 파업. 사진제공 : 숲정이

제대로 파업을 하고 세종으로 갔다. 넓은 잎 나무들의 물오른 초록잎을 만끽했다. 그러나, 희뿌연 미세먼지가 경악스러워서 처음 보는 남자사람 님 등을 노크하며 ‘미세먼지가 너무 나쁩니다. 버스 창문 좀 닫아 주세요.’ 부탁을 했다. 하얀 헬멧 쓴 경찰 아저씨가 ‘안 덥습니까?’ 질문을 던질 만큼 덥다. 본 행사에 앞서 한살림 조합원인 숲정이는 한살림 경남분들과 농본에 진심이신 분들과 함께 ‘구멍난 LMO(유전자변형생물체)검역 관리체제 대국민사과와 정보공개가 문제해결의 시작이다’ 기자회견을 함께 했다. 일흔여덟의 할아버지는 친환경 농업을 수십 년 동안 하셨단다. 홍수로 씨앗을 잃어버려 세상을 믿고 주키니 호박씨앗을 국내시장에서 구입해서 정성으로 가꾸었단다. 하지만 그 씨앗은 LMO였다. 밭에는 danger(위험)이란 문구가 적힌 빨간 줄이 둘러졌단다. 할배는 울먹였다. 같이 울컥했다. 정부를 믿었을 뿐이었다. 성실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자주 정부에게 배신당한다. 복수하고 싶다. 기후정의파업은 3,000명을 목표했지만 4,000명이 오셨단다. 그만큼 우리는 생존이 절실하다. 높디높은 빌딩 사이로 우리들은 푹 꺼져 있었지만 우리의 열정과 정신은 하늘을 찔렀다. 유독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많이 오셔서 중년의 허리로서 어찌나 죄송한지. 청소년들의 타악 소리에 맞추어 행진하며 심장이 벌컥벌컥 날뛰었다. 기후위기, 우리가 대안이다. 우리가 길을 낸다. 2023. 04. 14.

이팝나무 꽃이 눈물로 피어 오른 날!


-세월호 9주기를 기억하며 약속, 책임 창원 추모문화제를 다녀왔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 하겠습니다. 진상 규명 하겠습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우리들의 맹세는 여전히 공허합니다. 이게 나라냐? 빨강에서 파랑으로 다시 빨강으로 대통령을 바꾸어도 세상은 되돌임표로 밝혀지지 않는 진실은 왜? 입니까? 세월호 우리 아이들을 국가폭력으로 잃어버리고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또 무엇입니까? 손이 싹둑 잘리고 다리도 싹둑 잘리며 간신히 새잎을 올리고 있는 은행나무 같은 처량한 마음은 눈물을 끊어 낼 수 없습니다. 2023. 04. 15.

지구를 살리는 탈석탄, 지역의 녹색전환 가능하다.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지구의 날 기념 기자회견과 경남기후캠페인을 다녀와서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지구의 날 기념 기자회견과 경남기후캠페인. 사진제공 : 숲정이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지구의 날 기념 기자회견과 경남기후캠페인. 사진제공 : 숲정이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다. 4월 20일 오늘은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이므로 나의 이동권 이야기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책을 받들어 모시며 사천으로 향했다. 가는 길로 산을 덮는 보라 등꽃을 보며 마음이 평온했다. 사천시청의 으리으리함이 놀람이었다. 남해, 김해, 사천, 삼천포, 창원, 진주지역 연대단체들과 소중한 분들이 많이 오셔서 엄청 든든했다. 삼천포 화력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의 건강권을 제일 강조하고, 1.5도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막아내려면 2030까지 석탄화력을, 2035년까지 LNG가스발전을 퇴출해야 한다고 힘차게 주장하였다. 탈석탄화와 지역의 재생 에너지로 녹색일자리의 정의로운 전환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 거듭 설득하였다. 귀 있는 자, 들으시오! 생명을 존중하며 행동하시오! 이어지는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회의를 째고 일에 찌들고 관계가 버겁기도 한 김해양산환경운도연합 사무차장님께 회의를 포기하고 수양공원에서 쉼하자 회유를 했지만, 사천남해하동 환경운동 사무국장님께서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사무국장님이시라 회의를 주도하셔야 한다며 바늘구멍도 허용하시지 않으셨다. 응원응원. 어쩔 수 없이 홀로 수양공원 서어나무 숲에 드러누워 찬바람을 만나며 책을 보다가 순간 잠이 들기도 했다. 분명 5시 30분 사천 탑마트 사거리 피켓팅이인데, 늦지도 않았는데 이미 동지들이 사방으로 피켓팅 중이셨다. 열정. 기후위기 지금 말하고 당장 행동하라. 지구야 그만 변해. 내가 변할게. 춤을 추기도 하고, 건널목을 건너며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우리는 힘을 올렸다. 그때, 어느 아저씨가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순간 어떤 꼰대일까. 뒤로 물러섰다. 4대강 때도 매번 찾아오는 오토바이 아저씨가 있었다. 탈핵 때는 니들은 전기 안 쓰냐 비아냥거리기가 일쑤였다. 세월호 때는 파출소에 신고까지 당했다. 아, 귀찮아 하는데, 그분이 뉴질랜드에서는 소의 탄소 배출량이 많아 소에게 세금을 매긴다며 육식을 줄여야 한다 말씀하셨다. 놀라며 네! 그래서 저희도 일주일 한번은 채식하자 피켓팅 문구가 있습니다 하며 손짓을 했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는 지금 채식하러 가신다고 하셨다. 다행이다. 꼬치꼬치 말꼬리를 잡고 논쟁을 시도하면 친절을 위장할 수가 없다. 다름에 친절할 수 있는 여유를 잃은 지 오래다. 다행. 뜻을 같이 하는 동무들과 담소를 나누며 맛나게 저녁을 먹고 보람차게 오늘을 마감한다. 2023. 04. 20.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여행하고 데모하고

수라갯벌에서. 사진제공 : 숲정이
수라갯벌에서. 사진제공 : 숲정이

여전히 미세먼지 상당히 나쁨. 2022년 4월 23일 수라갯벌에 있었다. 2023년 4월 22일 수라갯벌이다. 군산공항 정류소를 지나쳐 버스를 내려서 순간 당황했다. 지도 앱을 들고 슈슈슈 옥서면 남수라2길 65를 향해 걸었다. 멀리 공항 앞에서 왠지 수라갯벌을 설명하러 오신 분 같은 님이 반듯 서 계셨다. 낯선 곳에서는 오지랖을. 인사를 건네며 수라갯벌에 대해 여쭈었다. 오이 님이셨다. 그랬더니, 지금 수라갯벌을 방문한 어린이들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셨다. 급 반가워하며 같이 묻어서 다니면 안 될까요. 부탁드리고 저도 팽팽문화제 갑니다. 말씀드렸다. ‘숲나학교’ 선생님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즐거웠다. 꼬물꼬물 아가들이 쫄랑쫄랑 수라갯벌로 향하는 뒷모습에 마음이 어찌나 명랑해지는지 아픔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로서 아무런 정보가 없었는데 미군이 군산공항을 4월부터 8월까지 활주로 공사를 이유 삼아 민간항공기 이착륙이 중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끔 전투기들은 뜨고 앉는다고 한다. 욕을 삼킨다. 우리 땅인데 지들 꺼가 되어 우리가 사용료를 지불하고 지들의 관리・감독에 복종해야 한다니. 짜증이 지대로다. 군산으로부터 30km 떨어진 직도에 폭탄을 투하하며 전쟁 연습 중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군사경제의 탄소 발자국은 세계 4위란다. 미국 국방부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스웨덴, 덴마크 국가 배출량보다 많단다. 한국군은 388만 톤으로(2020년 기준) 한국 공공기관의 온실 가스 370만톤(2020년 기준)보다 더 많다니 이놈의 전쟁을 당장 멈추어야 지구가 살아남지 않겠는가. 생명이 생존을 유지하지 않을까. 숲나 아기들은 과자봉지 쓰레기를 호주머니에 주워 담는데 옥서면 절반이 미국군대의 땅이라니 무엇을 위한 미래인가. 수놓을 수, 비단 라. 비단에 수놓은 것만큼 아름다운 땅이라 수라마을 끝으로 미군 활주로는 철책 안에서 위세가 당당하다. 마을은 쫓겨났지만 검은머리 갈매기, 흰발농게, 칠면초, 통통마디(염생식물-소금기 있는 갯벌에서 자라는) 고라니, 삵 등이 육화라 우기는 군사문화와 개발에 저항하며 갯벌이다 생명이다 울부짖으며 저항하고 있었다. 억울한 수라갯벌 위로 또 군사공항이라니…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쫓겨난 동네를 지키는 하제마을 600년 팽나무 어르신에 힘을 얻은 사람 생명이 매달 꼭 한번은 팽팽문화제로 끌어안고 같이 울어보기에 성실하니 여기가 우리의 자리다. 30번째 팽팽문화제 날, 우러러 성미산 청소년들님께서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요 솟대를 세우고 햇님처럼 강렬하게 지키겠다며 해바라기를 심었다. 숲나학교 어린이들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합창하시며 손을 내밀었다. 산타 수염한 늙은 신부는 우리는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왈칵왈칵 피를 토하셨다. 우리는 기필코 살아남을 생명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이다. 2023. 04. 22.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보고

수라는 미국땅이 아니다. 수라는 고라니의 땅이다. 수라는 개개비의 땅이다. 수라는 잿빛개구리매의 땅이다. 수라는 쇠제비 갈매기의 땅이다. 수라는 칠면초의 땅이다. 수라는 흰발농게의 땅이다. 수라는 쇠검은머리쑥새의 땅이다. 아름다움을 보고 말았다. 아기였던 내 아이들과 같이 빼앗긴 갯벌 끝, 방조제에 서서 새만금을 바라본적이 있었다. 승패가 갈린 자리에서는 무엇이 아픔인지 진중하게 알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단다. 여기가 그곳이란다. 가벼운 언어들을 남기며 쉽게 자리를 떠났다. 수 놓을 수, 비단 라. 아름다운 수를 놓은 듯한 갯벌 수라를 보고 아픔을 알아버렸다. 지극한 정성으로 장승을 세우고 피 끓는 정성으로 삼보일배도 하여 억척의 책임으로 시민모니터링을 하며 사랑을 확인하고 확신하였다. 아름다움에 공감하여 감동한 생명으로서 수라에 있었다. 수라와 함께 있었다. 수라가 말했다. 삼보일배로 전국이 들썩일 때, 이제 되는구나. 이렇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면 되는구나. 기뻤단다. 그러나, 갯벌을 뺏기고 수라는 눈물을 흘렀다. 이렇게 해도 안되는구나. 좌절했었단다. 하지만 아름다운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아름다움을 지켰다. 30년 만에 방조제가 열리고 수라로 바닷물이 찔금 들어오자 흰발농게가(법정 보호종) 응답했다. 짠 물을 기다리며 입을 쩍벌렸던 조개들과 바닷물에 목마른 게들은 흰배를 드러냈었다. 수라는 죽어갔지만 수라는 살아있었던 것이다. 수라는 포기가 없다. 생명은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만 포기하면 된다. 자본과 개발만 생명을 존중하면 된다. 수라 처럼 환경영향평가 글자로 누락된 생명들이 제주 비자림로 숲에도 있다. 양산의 백록천에도 있다. 생명은 존재로 저항한다. 쫓겨나는 원주민들도 항거를 한다. 삶터를 뺏지 마세요. 수라에서 조개 캤던 어부가 죽었다. 수라에서 물고기 잡던 어부는 환경미화원이 되었다. 빗자루를 잡고 눈물을 삥 흘렀다. 오늘도 제주 월정리 해녀들은 테왁을 안고 문화재청 앞에서 눈물을 삥삥 흘렀다. 청년은 쇠검은머리 쑥새를(법정 보호종)을 찾아 나섰다. 슬쩍 손을 들더니 공항건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제안하며 쇠검은머리쑥새 소리를 찾아 마른 갈대숲으로 갔다. 실패를 한다. 헛걸음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헛수고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청년은 쇠검은머리쑥새의 소리를 찾았다.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사랑의 노래. 노래에 이끌린 생명은 다시 생명으로 이어진다.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수라는 미국 땅이 아니다.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쇠검은머리쑥새의 땅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우리의 땅이다. 아름다움은 아무런 죄가 없다. 마지막 장면, 소리가 멈춘 도요새의 나무이며 도요새의 핏줄인 수라갯벌 위로 바닷물이 밀려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요하게 수문을 열어라. 바닷물을 들여라. 나를 살려라. 나를 살려라. 2023. 04. 27.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어린이 생태동아리


-‘흐르는 강따라 산따라’ 를 진행하며

나에게는 ‘숲정이’란 애칭도 있고 ‘흐르는강’이라는 별명도 있다.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며 나를 성찰하고, 강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여 결국은 넓은 바다의 포용으로 죽어간다란 나름의 의미를 내포한 부르는 말이다. ‘흐르는 강따라 산따라’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큰아이가 이십 대 후반이니까 이십 년 전은 확실하다. 이 푸르른 자연에서 아이들과 뒹굴며 깔깔깔 큰 소리로 웃기를 작정하고 매달 한 번 이상 꾸준히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 열정이 어디에서 솟았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은 어디로 쭈글 사라졌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들의 평화가 온 지구의 평화다. 평화를 위해 뜨거움을 끌어모아 오늘을 만났다. 서른 즈음의 ‘유소’ 나의 아이와 첼리스트가 된 청년 ‘산이’ 어머니께서 나의 길을 추억으로 즐겁게 함께 해주셨다. 산맘. 너무 고마워요. 간혹 엿보이는 희끗 흰머리로 성숙한 영혼이 새겨졌네요. 자연 그대로 감미로운 선율입니다. 아카시꽃 향을 삼키는 보슬보슬 봄비가 오시다가 멈추어 섰다. 꼬물꼬물 아이들이 똘망똘망 모여서 자기소개를 하였다. 이곳 봉황대는 어떤 곳인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데려와 이야기를 풀어보고, 사적2호인 우리동네 뒷산을 발길 따라 걸었다. 이팝나무 아래에서는 김해의 천연기념물 신천리와 천곡리 이팝나무 어르신을 소개했다. 모감주나무 열매를 주워 보기도 하고 패총에 섞여 있을 가야의 씨앗 살구나무도 살펴보았다. 해반천 따라 들어왔던 바닷물을 견디는 염생식물 해당화와 해국을 만나기도 했다. 버드나무 아래에서는 물을 정화하는 수생식물 억새, 갈대도 보았다. 벽오동나무 아래에서는 봉황새를 상상했다. 막내가 건네준 아카시 잎을 따라 아카시 꽃을 따먹어 보고 가위바위보를 하며 이파리 떼기도 했다. 괭이밥은 순식간에 인기 간식이 되어 유부초밥에 넣어 먹으면 어떨까요.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팽나무, 뽕나무 설익은 초록을 먹기도 하고 찬유는 느릅나무 잎까지 먹어 보았다. 패총 전시관 주변으로 금관가야의 나이테가 있을 것 같은 조개껍질을 줍기도 했다. 여덟 아이들이 토란잎 안으로 모인 빗방울 같이 올망졸망 한 송이로 아름다웠다. 유소나 산이가 요만한 아이였을 때, 서잿골 산불이 난 자리에 돌 이름표를 만들어 박으며 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청년 나무가 되었겠지. ‘대포천에서 첨벙 갈겨니를 쫓아다닌 기억이 나요. 산꼭대기에 처음으로 가봤어요.’ 문득 소식을 전해주는 청년들처럼, 오늘 우리 아이들도 ‘그때 텁텁한 팽나무 열매맛을 기억합니다’ 하며 훗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평화를 위해 아이들의 지구를 위해 강에 들에 산에 자연으로 그대로. 2023. 04. 29

어린이들과 함께 '흐르는 강따라 산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사진제공 : 숲정이
어린이들과 함께 ‘흐르는 강따라 산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사진제공 : 숲정이

■ 잊고 살았어

잊고 살았어. 당신이 집 떠나 육지로 온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어. 네가 도착하기 하루 전날이었던가. 나는 억지로 몸을 붙였지만, 마음은 전혀 붙여지지 않던 어느 술자리에 있었지. 앞에 앉은 사람이 주저리 내놓는 이야기를 그냥 흘려보냈어. 무관심해서 시큰둥했지. 그러다 문득 떠올랐어. “아, 내일 엄마 오는데.” 난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어. 야밤에 대청소가 시작됐지. 네가 걱정할까봐. 잘 살고 있는 척하고 싶었어.

충만한 사월을 보냈네. 어릴 땐 네 인생이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내 삶도 피곤하거든. 어느새 당신 삶이 부러워졌어. 숲정이는 ‘기억’에 대한 의무감이 힘들다고 자주 말하지. 근데 그 의무감을 채울 수 있는 용기와 시간이 흐르는 네 일상이. 어른이 돼 보니 참 부럽네. 당신은 육지 곳곳을 누비며 기억에 대한 의무감을 해치웠어. 며칠은 내 곁으로 와, 어미로서 의무감도 해치웠지. 네가 떠나고 남겨진 자리를 찬찬히 훑어봤어. 울컥하더라. 구석구석 정성이 스몄더라. ‘기억’에 대한 의무감을 행동으로 삭힐 때도 마찬가지겠지. 숲정이 씨는 온 정성을 다하겠지.

나는 말이야. 요새 장미꽃을 자주 들여다봤어. 오월에 만개하는 장미꽃은 다가오는 내 생일을 예고하거든. 그러다 보면 할머니가 떠올라. 어린 시절 장미꽃은 지금보다 천천히 폈어. 그들은 오월 끝자락 내 생일과 거의 맞물려 태어났지. 어린 새미는 할머니한테 말했어. “할머니, 장미꽃이 피면 솔빈이 생일이에요. 알겠죠?” 다음 해부턴 장미꽃이 필 때마다 전화가 왔어. 늙어가는 할머니가 내게 말했지. “솔빈아잉, 장미가 폈던디. 조메 있으면 니 생일이제? 생일 축하한다잉. 항시 불조심하고. 차 조심하고. 남자 조심해라잉.” 내게 오월 장미가 지닌 꽃말은 ‘할머니가 건네는 생일 축하’였지. 올해도 어김없이 장미가 폈더라. 당연히 그녀가 떠올랐어. 근데 말이야.

잊고 살았어. 할머니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어. 할머니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녀를 떠올리다니.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충격에 안절부절 못했어. 진정하려고 가만히 생각해봤어. 내가 또 무얼 잊고 사는지 짚어 봤지. 노동절을, 세월호를, 멎어가는 지구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잊고 살았어. 무관심해서 시큰둥했더라. 엄마. 어떻게 해야 당신처럼 살 수 있어? 어떻게 해야 기억하며 살 수 있어? 기억은 언제나 한발 늦은 것 같아. 근데 그 한 걸음이라도 안 떼려는 날 어떡하면 좋지. 반드시 노동절을, 세월호를, 멎어가는 지구를 기억하고 싶어. 그래서 살리고 싶어.

당신은 말했지. 끝없이 내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실수를 두려워 말라고. 잘못은 인정하자고. 모자람을 알아채자고. 따뜻하고 깊이 있게 세상을 넓혀나가자고. 그 말, 잊지 않을게.

숲정이

우리 동네를 낮게 아우르는 숲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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