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일상이 아니라 이벤트다

아이들의 놀이와 이벤트, 일상과 이벤트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관점을 전제하는 ‘아이들에게 놀이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아이들의 놀이가 일상이라는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특이성의 사건(들), 즉 이벤트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이들에게 이벤트-사건(들)로 존재하지 않는 놀이란 불가능하며, 아이들의 일상은 수많은 이벤트-사건(들)로 포착되고 생성되는 놀이가 펼쳐졌다 사라졌다 하는 순간들의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1. Α=Ω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일상이 아니라 이벤트(event)-사건(들)이며, 수없이 많은 이벤트-사건(들)이 아이들의 일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시작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놀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이다. ‘latte is horse’1 정도로 아이들의 놀이를 바라보는 건 이제 너무 순수한 시선이 되어버렸다. ‘일상이 곧 놀이’였다며 아름다운 추억으로 소환 가능한 ‘그때 거기’의 놀이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놀이는 사뭇 다른 양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결국 아이들에게 놀이는 이야기의 맥락이 제멋대로일지라도 그 시작과 끝은 이벤트-사건(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무튼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모두 아래 글, 즉 하나의 사건과 마주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니 이 글과 마주치는 누군가에게도 하나의 사건이 되기를 바란다. (분명 그럴 테지만.)

들뢰즈는 사건의 특이성을 제거하고 사건들 사이의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강변하는 전통 철학자들을 니체의 주사위놀이 비유를 차용해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놀이를 모르는 자, 즉 어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법칙이 사건들에서 증명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진다. 그들은 주사위의 특정한 눈이 나올 확률이 언제나 똑같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는 언제나 동일성의 반복이다. (중략)

이에 반해 아이들의 주사위 던지기는 매번 새롭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주사위 던지기가 좇아야 할 외적인 목적을 알지 못하며, 결과에 대한 원인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사위 던지기는 항상 새로운 차이의 경험이다. 매번의 사건이 내포한 특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주사위를 반복하여 던지게 한다. 어른들에게 동일성이 주사위 던지기를 반복하게 한다면, 아이들에게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은 생성의 반복, 새로움의 반복이다.

(335~336쪽,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정낙림, 책세상)

2. 놀이∈산업⊂일상

놀이는 이미 일군의 산업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나름의 생산과 유통 체계를 갖춘 상업적 혹은 산업으로서의 놀이는 이제 일상에서 쉽고 편리하게 ‘소비’가 가능한 하나의 제품군이다. 수많은 장난감을 비롯해 키즈 카페, 놀이 공원,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 다종다양한 놀이 관련 상품들이 그것이다. 최근 성장하는 엔젤산업(angel industry2)에서도 놀이 카테고리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세분화되며 또한 거대해지고 있다. 놀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진 유무형의 상품과 서비스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심지어 그것들을 한데 모아 놓은 플랫폼까지도 등장했다. ‘배달의 ㅁㅈ’이나 ‘요ㄱ요’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배달받는 것처럼 놀이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아이들(어쩌면, 양육자)의 취향에 따라 상품이나 서비스를 고르고 그 비용만 지불하면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그것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놀 때도 놀 곳도 골라 놀 수 있게 된 것이다. 놀이는 이제 말 그대로 ‘일상에서 밥 먹듯’ 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 같다.

아이들의 놀이가 일시적이거나 일회성으로 그치는 행사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을 ‘놀이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키즈 카페, 놀이 공원,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이 일상이었던 ‘골목의 놀이’를 대체해버린 것도 못마땅한데 이제는 그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만 된 ‘이벤트’가 넘쳐나고, 아이들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상품으로서의 놀이’가 일상적으로 거래되는 현실 앞에서도 ‘놀이는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어야 한다’는 여전히 유의미한 주장일 수 있을까?

3. 놀이=이벤트 ⋀ ∫이벤트=일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일어나는 특이성의 순간들, 그 순간을 포착하고 또한 생산해내는 것이 아이들에겐 놀이가 된다. by Máximo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2914265/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일어나는 특이성의 순간들, 그 순간을 포착하고 또한 생산해내는 것이 아이들에겐 놀이가 된다.
사진 출처 : Máximo

같은 양상으로 한 번 두 번 여러 번 계속해서 발생하는 사건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총합을 반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개별 사건의 반복이 특정한 양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되어 있는 상태를 일상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일상이란 끊임없는 사건들로 구성되는 현재 진행형의 과정이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완료형의 상태가 아니다. 아이들의 놀이 역시 현재 진형형의 과정에서 포착되고 생성되는 사건(들), 즉 이벤트로 존재한다. 아이들은 늘 걷는 길을 가다가도 어느 때는 마치 외줄을 타듯 인도의 경계석 위로 걸어가고, 발아래 같은 색깔 보도블록만 따라 걷기도 한다. 또 횡단보도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흰 선만 밟고 폴짝폴짝 뜀을 뛰며 건넌다. 아이들의 놀이와 이벤트가 겹쳐져 보이는 순간들이다. 일정한 규칙과 형식을 갖춘 놀이들도 마찬가지다. 숨고 찾고 뛰고 잡고 하는 아이들의 놀이가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 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특이성의 순간이 포착하는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펼쳐졌다 사라졌다 한다. 그런 게 아이들의 놀이다.

아이들에게 일상이란 순간순간의 이벤트-사건(들)이 이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연장선이며, 그 위에서 종이접기 주름처럼 펼쳐졌다 접혔다 하는 것이 아이들의 놀이다. 결국 사건으로 존재하지 않는 놀이란 불가능하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일어나는 특이성의 순간들, 그 순간을 포착하고 또한 생산해내는 것이 아이들에겐 놀이가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놀이가 이벤트(event)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정리해보자. 아이들은 일상에서 우발적이면서도 자발적으로 놀이 즉 이벤트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놀이는 일상에서의 이벤트-사건(들)과 함께 벌어지는 것이며, 놀이 또한 그 자체가 하나의 특이성의 순간이자 하나의 사건, 즉 이벤트가 된다. 그런 면에서 ‘놀이는 이벤트가 아니’라는 표현은 아이들이 삶의 순간순간 특이성의 사건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즉 놀이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놀이로 포장되고 기획된 ‘이벤트’가 아이들의 일상과 놀이를 잠식해가는 불편한 현실을 비켜가기 위해 아이들의 놀이와 일상, 놀이와 이벤트-사건(들)의 관계를 분리시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4. 놀이, {그때 거기 지금 여기}

많은 어른들이 요즘 아이들의 놀이를 걱정한다. 놀 때도 없고, 놀 데도 없다고, 그래서 잘 놀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골목의 놀이가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하며 그때의 골목에서처럼 더 자주 더 많이 더 쉽게 가능한 활동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때 거기의 골목은 사라졌다 해도 지금 여기의 아이들과 또 그들의 놀이는 여전히 살아있다. 골목을 대신할 자신들의 아지트를 구축하고 나름의 놀이세계를 이룩해가고 있다. 그 형태와 형식은 다를지 몰라도 아이들이 놀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 여기의 아이들도 그때 거기의 아이들처럼 그들 나름의 방식과 호흡으로 이벤트-사건(들)을 포착하고 생성하며 놀고 있다는 거다. 환경과 조건만 다를 뿐 아이들은 늘 새로운 사건을 마주치는 일상과 자신들의 고유한 놀이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


  1. ‘라떼(나때)는 말이야’를 영어로 직역한 신조어로 기성세대들의 ‘나 때는 말이야’를 풍자하는 표현

  2. 14세 이하의 영유아 및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 혹은 시장을 이르는 말. 두산대백과 https://www.doopedia.co.kr

안학철

playsophist. 놀이철학觀[be]에서 아이들과 놀이 사이의 playsophy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놀이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과 아이들을 ‘놀이생산자’로 바라봐야 한다는 ‘놀이산파론’을 꾸준히 펼쳐 왔습니다. 최근에는 아이들의 놀이를 바라보는 관점과 표현에 관한 문제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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