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로부터 벗어나는 길, 어디로 갈 것인가? : 논픽션 문학 『나이트』

논픽션 문학 『나이트』에 등장하는 모이셰는 남들보다 먼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모이셰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이 모습은, 기후변화가 한걸음 한걸음 파괴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동 실천을 시작하지 않는 오늘날 평균인들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엘리 위젤은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생존자다. 이 책의 출판은 노벨평화상을 받는 데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예담 출판사, 2007)
엘리 위젤은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생존자다. 이 책의 출판은 노벨평화상을 받는 데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예담 출판사, 2007)

기후변화가 문명을 파괴한다고 전망하는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종종 전쟁에 빗대곤 한다. 기후행동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전시(戰時)에 전쟁 상황을 다루듯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왜 언론은 전황(戰況)을 알리듯 화재, 가뭄, 난민 등의 문제를 위기 상황 그대로 다루지 않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와 무책임한 언론에 대해 행동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엘리 위젤의 자전적 소설 『나이트』에는 모이셰라는 유대인이 등장한다. 그는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숲 속에서 집단 학살의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다. 죽은 줄 알고 내버려졌기에 모이셰는 기적적으로 살아 마을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모이셰를 좋아했던 작중 화자 ‘나’는 그가 살아 돌아온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진술한다. 표정과 웃음이 사리진 모이셰는 “넌 이해 못해. 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어. 용케 되돌아왔지.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니? 난 시게트로 돌아와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네가 탈출을 준비 할 수 있도록 말이야.”라며 자신이 겪은 학살을 유대인 모두의 ‘미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을의 유대인들은 모이셰의 말에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1

학살을 경험한 자가 탈출을 해야 한다고 말해 줘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

44년 봄에서부터 독일이 패전하기 전까지의 유대인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가 펼쳐진다. 그들은 순진한 ‘낙관주의자’들이 되어 “히틀러는 그럴 리가 없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한다. 20세기 중반의 문명국가에서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겠느냐고 되묻는다. 예루살렘이나 다른 나라로 떠나자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도 집이 있는 이곳에 머물자고 답한다. 독일이 시게트로 본격적으로 입성하여 독일군의 차량이 보이는 순간까지도 유대인들은 “독일군의 철모는 신뢰가 간다”거나 독일인들의 매너에 대해 매력을 느끼거나 그들에게 받은 초콜릿을 먹으며 낙관주의를 이어나간다. 심지어 노란별을 달라는 명령, 게토를 설치하는 순간까지도 ‘유대인 형제들끼리 벽 속에서 지내서 좋다’는 말을 하며 그들의 ‘일상적 생활’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게토에서 지금처럼 지내다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당시 유대인들은 학살의 소문을 믿지 않고 낙관주의자로서 죽어간 것일까? 혹은 오늘날 도시인들은 기후변화의 파국적 미래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이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듯 자동차를 몰고 비행기를 타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선택에 한 표를 던지는 것일까?

기후변화가 문명을 위태롭게 한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정부 그리고 대중들

하지만 필자는 『나이트』의 작가가 몰랐던 몇몇 ‘걱정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가 몰랐던 사람들, 두려움에 짐을 싸서 떠난 자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이셰의 말에 자극을 받은 몇몇 유대인 가족들은 예루살렘이나 미국으로 떠났을 것이다. 자금에 여유가 없는 이들은 제 발로 험한 산맥을 넘어 삶을 지키기 위한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종착점이 옳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제 와서 과거를 되돌아 볼 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보일 뿐이다.

몇몇 가족들은 걷고 걷다, 길 위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물을 얻기 위해 문을 두드려도 낯선 사람에게 물을 주는 이가 없어 늙은 부모님이나 어린 아이들을 묻어가며 멈추지 못해 걸었을 사람들이 왜 없었겠는가? 시게트에 있다가는 죽고 말 것이라고 판단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곳에서 그들은 모두 살았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을 체험하며 사라져 갔을까? 수많은 사람이 바보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 현실을 어쩌지 못하고 긍정해 버리고 마는 것은, 어쩌면 이러다/죽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확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정답인지/어디로/가야/살 것인가/를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를 믿더라도 대책을 찾지 못하면, 그곳에 머물고 만다

앞으로 필자는 이 <생태적 지혜> 미디어에 두 가지 주제의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기후변화가 팩트(fact)로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에 관한 글이다. 두 번째는 그래서 어떤 실천을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글이다.

「The Uninhabitable Earth」, Wallace-wells David(Tim Duggan Books, 2019)
「The Uninhabitable Earth」, Wallace-wells David(Tim Duggan Books, 2019)

첫 번째 기후변화가 ‘도래할 미래’의 풍경을 다루는 것은 데이빗 웰리스 웰의 『The Uninhabitable Earth』라는 책의 서평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 책은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거주 불가능한 지구』, 『살 수 없는 지구』쯤 되겠다. 책은 크게 자연적 조건의 변화로서 열폭풍, 농업위기, 해수면 상승, 일상화된 화재 등을 다루는 부분과 인문적 조건의 변화로서 경제 붕괴, 정치 변화, 기술의 변화 등을 다루는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IPCC의 공식적인 예측을 중심으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어지럽게 각자의 입장에 따라 미래를 전망한다. 이 책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중간 정도에서 약간 더 걱정을 많이 하는, 조금 더 비관적인 방향으로 약간 기울어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보수적’ 균형감을 갖춘 책에서 전망하는 미래 지구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 바르게 알아보자는 것이다. 기후변화를 방치할 때에 일어날 미래의 자세한 모습에 대한 앎과 합의가 없이는 그 이상의 이야기로 진전될 수가 없다.

두 번째 어떤 실천이 필요할 것인가에 관한 부분에서는 탄소배출을 감소하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노력에 대해 다루기보다는 집단적 대책이 지구 온도 상승 1.5℃ 억제가 실패한 경우,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틈새에서 생겨난 다챠(Дача). 텃밭+농막을 섞은 다챠는 전체 농경지 중 10% 정도 되었지만 40~50%의 식량 생산을 맡았고 소비에트 정부의 식량공급 기능이 붕괴되었던 시절, 러시아인들의 식량 공급의 중심이 되었다. 
Russian Summer by Jonas Bendiksen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틈새에서 생겨난 다챠(Дача). 텃밭+농막을 섞은 다챠는 전체 농경지 중 10% 정도 되었지만 40~50%의 식량 생산을 맡았고 소비에트 정부의 식량공급 기능이 붕괴되었던 시절, 러시아인들의 식량 공급의 중심이 되었다.
Russian Summer by Jonas Bendiksen

기후변화에 대응해서 세계 체제 전체가 형제와 같이 사이좋게 GDP의 감소를 나누며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전망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다. 경제학자 윌리엄 노드하우스는 『기후 카지노』에서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개별 국가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의 현실적 한계에 대해 말한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비용은 누군가의 구체적 지출인데, 대처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은 무차별적인 상황’이다. 피해는 전체적이고 이익은 일부가 보기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며 미루면서 결정적 시기를 놓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기후변화에 지구전체(?)가 대처한다는 기대보다는 기후는 지속적으로 파국의 방향으로 치닫더라도 그 속에서 살아남는 집단의 형식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드미트리 오를로프의 책 『예고된 붕괴』에서 소비에트 사회의 붕괴를 떠올리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하여 가게가 텅텅 비던 시절을 회고한다. 당시 소비에트에는 집집마다 텃밭(다챠)이 넓게 존재하여 푸성귀나 감자 등을 통해 자급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물자를 나누어 주는 친구의 문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돈으로 물자를 구하는 것 외에는 물자를 구하는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체제의 붕괴가 시작하면 곧바로 도태될 존재들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돈을 받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동체, 최소한의 소유물만 사유화하고 나머지는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있다면 체제 붕괴도 두렵지 않다고 주장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본격적 대응이 시작되면 금융과 경제의 기능 마비가 올 것이다. 이때 ‘어떤 모습의 공동체 단위로 삶이 재조직되어야 지속적인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연재를 시작하며 : 기후변화 팩트 정리와 개인적 전략수립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기후변화가 정확히 우리 모두에게 어떤 변화를 강요하는 사태인지를 알아야 한다. 왜 언론을 향해 전시 상황에 준하는 수준으로 다루어달라고 요구하며 집단행동까지 해야 하는 상황인지. 그래서 정부가 중심을 잡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한 긴급조치들을 즉각적으로 실시해야 하며, 만일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실패할 경우 개인들은 시대의 평균적인 개인을 뛰어 넘는, 대격변기 개인의 전략을 어떻게 수립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지금 당장 준비를 시작해야 옳다.

기후변화가 문명 전체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이제 막 이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을 위하여(나를 위하여), 기후변화의 팩트와 실천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소설 『나이트』와 기후변화 사이의 유사성은, 다른 책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힌트를 얻었다.

두더지

쌍둥이를 낳아 공동육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 하여 나를 상징할 수 있는 동물을 찾다가, 나는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두더지라고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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