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욕망을 통한 탈주

사회는 욕망을 좌절시키라고 명령한다. 개인의 욕망보다 사회의 흐름에 맞추는 것이 순리라고 가르킨다. 정말 그럴까? 욕망은 단순 좌절의 대상일까. 들뢰즈는 순리를 부정하고 욕망을 긍정한다. 들뢰즈의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새로운 현실로 인도한다. 욕망을 통한 자본주의에서의 탈주와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무미건조한 답변

“해보자.”

어느 날, 같이 출판사 편집자를 준비하던 친구가 매거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주제는 지속가능한 식문화였다. 기후위기면 몰라도,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낯선 분야였다. 이제껏 나에게 식사는 배를 채우거나 건강을 챙기는 행위 정도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고, 맛없는 음식으로 때워도 상관없는 것이 나의 식문화였다. 무미건조한 식문화에 지속가능성을 붙인다고 무엇이 얼마나 차이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식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다르게 내 대답은 ‘해보자’였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주제로 한 잡지를 준비하면서 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며 나의 파편들이 새롭게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by Ellie Eshaghi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oc97BfPli9o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주제로 한 잡지를 준비하면서 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며 나의 파편들이 새롭게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사진 출처 : Ellie Eshaghi

나는 출판사 편집자를 준비하기 이전까지 목사라고 불렸고 종교서비스업에서 종사했었다. 신학은 내게 세 가지 키워드를 선사했다. 공공성과 진실성 그리고 글, 이 세 키워드는 이제까지 내 삶을 끌어왔었으나 직접적이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연결되어 있었다. 부교역자 생활 당시, 담임 목사의 목회 철학을 공공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강제적 상황에 있었고 그 철학에 맞춰서 설교원고를 고치는 비관적 상황도 있었다. 그런 삶에 진실성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다 탈(脫) 종교서비스업을 하면서 고리가 끊어지면서 키워드들은 파편화되어 내 주위를 빙 돌았다. 친구의 제안은 이 파편들을 새롭게 연결시켰다.

무미건조한 답변으로 시작한 매거진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다. 전체 사회 구성원 중에 기후위기와 친환경을 주목하는 이들도 소수인데,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그 안에서도 소수였다. 트렌드로 자리 잡은 비건이나 제로-웨이스트하고 결이 다르기에 독자가 낯설어하는 것이 피부에 와닿는다. 팔리지 않고 쌓여있는 책을 보며 종교서비스업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뇌한다.

그럼에도 나는 매거진 출간을 계속할 예정이다. 이 일은 고되지만 즐겁다. 다른 이의 삶을 듣는 일도 재미있고 그걸 독자에게 소개하는 일도 재미있다. 내 삶을 즐겁게 만든다. 또 목표 지점이 같은 이들과의 관계가 생겨날수록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낀다. 이들과 나는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는 방법은 다를지라도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탈주한 사람들이다. 들뢰즈는 “삶의 범주란 정확히 말해 신체의 태도, 자세이다.”라고 말했다. 우린 같은 삶의 범주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한다.

우리는 어떻게 탈주하는가

현대인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거대한 관습으로 유지된다. 성공, 자본, 안락, 쾌락 등 구성원들을 움직이는 흐름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 흐름을 변증법의 과정이자 상승으로 여길 것이고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하락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자본주의는 방향을 갖지 않는다. 그저 흐름이 있는 관(pipe)일 뿐이다. 이 관은 사회가 탄생한 이래로 강자가 축적한 역사의 산물이다. 이 산물에는 여러 부유물이 존재한다. 역사는 강자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기에 저항자들이 이뤄낸 규격 외 사례들이 녹지 않고 떠다닌다. 하지만 이것들 역시 자본주의 흐름 안에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정해놓은 규격 외에 떠다니는 부유물도 관습으로 바꿔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부유물을 중심에 오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동시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끌어당겨 존재가 아슬아슬한 경계에 머물도록 한다. 이 관의 갇힌 존재가 바로 현대인이다.

철학자들은 존재를 이제껏 고정으로 보았다. 사르트르의 존재는 ‘응시당한-존재’와 ‘응시하는-존재’였고, 하이데거의 존재는 ‘불안에 대한 물음’과 ‘그 물음에 응답하는 존재 전체’였다. 그러나 들뢰즈의 존재는 ‘멈춤이 없는 욕망의 종합’이다. 일정한 법칙이란 존재할 수 없고 관습적 욕망과 무의식적 욕망이 얽혀 다발로 묶여있다. 들뢰즈는 “욕망이란 무의식의 자기생산을 말한다. 욕망은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들뢰즈, 『안티오이디푸스』)고 말한다. 그의 욕망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머물지 않고 현실을 생산해낸다. 이 생산에는 재료가 필요하다.

인간은 배움이란 이름으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키워드를 하나하나 획득한다. 이 키워드는 성공, 승진, 상승, 자본, 쾌락부터 돌, 바람, 물, 자연까지 정신, 물질 그리고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들뢰즈는 이를 ‘신체’라고 불렀고 전통적으로는 ‘질료’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떤 신체(물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떠들어대지만, 하나의 신체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 힘들이 그에 속하는지, 그리고 이 힘들이 무엇을 예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욕망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고, 역동하는 욕망‘들’은 서로가 부딪쳐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며 방향(힘)을 만들어낸다. by WrongTog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yGev6dhHSY8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욕망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고, 역동하는 욕망‘들’은 서로가 부딪쳐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며 방향(힘)을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 WrongTog

들뢰즈가 말했듯 신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 가능성은 다른 신체와의 연결을 통해서 새로운 기관을 형성한다. 입, 음식, 장을 연결하면 소화기관이 되고 눈, 귀, 입, 코, 피부를 연결하면 감각기관이 된다. 신체들의 연결은 무수하지만 흐름에 따라서 강제되는 경우도 있다. 자본주의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자기만의 흐름을 갖고 강제 고리를 만들어 신체를 포획한다. 커피, 친환경, 자본을 연결해보자.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행하는 그린 워싱 상품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상품은 자본으로 환원시키기 위환 상품일 뿐, 기관 자체의 의미를 가질 순 없다. 들뢰즈에게 자기 환원적 기관은 자기파괴적 욕망과 동의어이다. 상품에 포획된 공공성과 커피는 유혹하기 위한 도구일뿐 자본과 동등하지 않다. 이 연결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욕망뿐이다.

인간은 욕망에 의해 무한히 진동한다.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욕망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존재 밖으로, 안으로 역동하는 욕망‘들’은 서로가 부딪쳐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며 방향(힘)을 만들어낸다. 욕망에 따라서 자본주의 역행과 순행이 정해진다. 내부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는 또다시 타존재와 부딪히며 관 안에서 자리를 벗어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자본주의는 밀고 당기는 흐름을 갖고 있다. 이 흐름을 벗어나 일은 전적으로 욕망의 강도이다. 강한 욕망만이 자본주의의 흐름을 거스르고 새로운 영역(관)으로 흘러갈 수 있다. 들뢰즈는 이를 탈주(도주)라 불렀다. 자본주의 흐름에선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느낀 존재만이 큰 욕망을 느끼고 자본주의에서 탈주(도주)할 수 있다.

공간을 살아가던 존재들의 역사가 축적될 때까지 아직 흐름을 갖지 못한 공간에선 욕망만이 흐름이다. 존재의 신체를 강제하던 자본주의적 욕망은 흐름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분열되고 잔재로 떠다닌다. 기존 흐름에서 벗어난 존재는 자본주의 고리를 절단하고 자신의 욕망으로 신체를 결합하여 기관을 생산한다. 그 과정에서 존재는 좁은 관의 벽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본래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불편함, 고통, 후회, 불안, 자기연민 등 자기파괴적 욕망을 생성한다. 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향수병이다. 본래 향수병에는 약이 없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욕망에 기대어 버틸 뿐이다. 새로운 공간을 넓히고 부유하기 위해선 의도적인 흐름이 필요하다. 존재들의 역사, 즉 무리의 역사이다. 같은 삶의 범주를 가진 무리가 만들어낸 흐름만이 거대한 흐름으로 돌아가지 않을 방법이다.

연대의 요청

들뢰즈가 살아있었다면 ‘무리’에 대한 요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을 소개하고 연락처를 남겼을 것이다. 그의 마무리 말은 이렇지 않았을까. “당신의 욕망이 충동질하면 연락해.” 들뢰즈는 대의적인 공공성이나 시대의 요구보다 개인의 욕망과 삶의 충동을 중요시했다. 욕망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개인의 욕망만큼 연대를 두텁게 하는 것은 없다. 자신이 만들어낸 기관을 끊어버리는 힘은 자신의 욕망밖에 없으니 큰 충격 없이는 쉬이 또 다른 탈주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자신의 욕망을 분출해라. 더 분출하고 자극해서 자신만의 기관을 만들어라. 그리고 당신을 억압하는 흐름에서 탈주해라. 새로운 영역에선 자신의 욕망만이 움직임을 만들 것이다.

김정모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매거진 ‘Sustain-Eats’ 편집자.
다양한 경험과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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