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정원 가꾸기
2018년 출간한 책 『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1은 지은이 한병철(1959~ )이 3년간 정원을 손수 가꾸며 겪은 노동과 사색의 기록이다.
“어쨌든 봄이 왔다. 믿을 수 없다. 겨울 한복판에 봄은 내게는 시간 저편, 가능성 저편에 있었다. 봄은 먼 미래로 물러나 있었다. 겨울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내게 봄은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겨울이 꽃피지 않는 계절이라면 올해 내겐 겨울이 없었다. 내 정원에는 언제나, 심지어 얼음서리 한가운데서도 꽃 한 송이, 피어나는 생명 하나라도 있었다. 내 겨울정원은 겨울을 봄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진짜 봄은 다른 봄, 두 번째의 늦은 봄, 늦깎이였다. …… 2016년 3월 28일이 처음으로 따스한 봄날이었다. 이날-나는 잠을 별로 자지 않았는데-사방에서 솟아나오는 순들을 보고 거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내게 자신을 맡긴 식물들에게서 진짜 열광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 열광은 수줍은 망설임과 뒤섞였다. 나는 새롭게 깨어난 생명에 약간 몽롱하게 도취되었다.”2

사진 출처: Line Knipst
한병철은 “겨울이 꽃피지 않는 계절이라면 올해 내겐 겨울이 없었다. 내 정원에는 언제나, 심지어 얼음서리 한가운데서도 꽃 한 송이, 피어나는 생명 하나라도 있었다. 내 겨울정원은 겨울을 봄으로 바꾸었다.” 라고 써 놓았다. 처음 정원 일을 시작하면서 맞이한 첫 번째 겨울이었음에도, 정원의 땅 표면만을 보면서 이내 겨울 느낌에 갇혀버린 사람은 아니었음을, 한병철은 자신의 정원에 ‘언제나’, 그러니까 한 겨울에도 피어나는 생명 하나라도 있었다는 말로 과시하였다. 그러나, 봄이 되어 사방에서 솟아나오는 순들을 직접 보았을 때는 거의 어지럼증을 느낀 정도였음을 자백하기도 하였다. 세계의 변화를 관조하는 것은 철학자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원에서 한 번의 겨울을 살아내고 맞이한 봄은 그 이전의 관조의 결과와는 다른 느낌 속으로 자신을 이끌었음을 한병철은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한병철의 느낌은 아마도 한병철 자신이 약속시간 조절하듯 조절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한병철에게 꽤 충격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공학도 출신의 철학자 한병철은 아마도 약속시간을 마구 변경하는 변덕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디지털 시대가 열리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병철도 다른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 또한 ‘디지털’을 최대한 활용하는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논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인만큼, 그 논리를 이용한 효율 높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최적화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한병철이라서, 효율을 높여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비교적’ 통하지 않는 식물의 생장주기를 직접 체험한 것에 어지럼증을 느끼고 몽롱하게 도취되었다는 그의 표현은 그런대로 받아들여 줄 만한 고백이었다.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놀랍다.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3
아마도 한병철만큼 모든 것이 통제 혹은 조절되는 깔끔한 세계에 공포감을 느껴온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정원 가꾸기 체험은 ‘타자의 시간’ 즉 아직 통제되지 않는 것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발견하는 것인 동시에 자본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발견하는 것이었을 듯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정원의 시간은 ‘순환’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도 있다. 씨앗이 자라 꽃이 피고 지고 다시 씨앗을 떨구는 과정은 순환적이다. 진정으로 어느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그런 순환이 껄끄러울 수도 있다. 정원 가꾸기 과정에서 한병철이 그런 껄끄러움을 겪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아왔을 철학자 한병철이 단순히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서의 자유에만 갇혀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자의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한 데에서도 볼 수 있듯, 한병철은 순환을 나[아(我)]나 자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의 사례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정의 느낌을, 번역본 출판사가 인터넷 서점들을 통해 흘려보낸 이러한 책 소개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변주한 셈이다.
“저자는 현대인이 상실한 ‘기다림의 시간’과 ‘계절의 리듬’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행위는 인간이 지구라는 대지에 속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실제 세계, 즉 ‘대지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직접행동인 정원 가꾸기
2022년 7월 18일, 웹진 『생태적 지혜』에 공개된 글 「“다시 땅으로” -탈성장으로 가는 사회와 개인의 과제」4에서 공규동은, 개인이 탈성장 전환시대를 맞기 위해 스스로 단련하여야 한다면서, 다음의 두 가지 운동을 제안하였다.
은유로서의 소농 운동. 직접행동으로서의 “다시 땅으로” 운동.
은유로서의 소농 운동은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1948~]가 그의 저서 속에 적었다는 “지구의 빈곤 지역은 극한의 가난 때문에 고통받고 있고, 선진국은 끝없는 경쟁 속에서 피로해 한다”5라는 글귀를 실마리로 한다. 이 글귀는, 조선조의 사회구성양태를 소농 사회로 보면서, 근대화[modernization]를 종착점으로 보는 역사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한 미야지마 히로시의 저서에 들어있었던 것인 듯하다. 이 글귀는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6와 그 취지가 유사하다. 지금 여기에서는 모두가 타인과 경쟁할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경쟁을 넘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는 듯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 이것이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의 분위기이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런 분위기를 자신의 조선시대 역사 연구와 접목시키려고 한 듯하다. 공규동은 이에 주목하면서, 한국적 전통 특히 미야지마 히로시가 구성하여 준 소농 사회적 분위기가 탈성장 전환시대를 맞기 위해 스스로 단련할 때 목표로 그려볼 수 있는 사회상일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직접행동으로서의 ‘다시 땅으로’ 운동은 공규동이 한병철의 저서 『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에 보이는 정원 가꾸기와 유사한 행위를 탈성장 전환시대를 맞기 위해 스스로 단련할 때 도움이 되는 운동의 예로 제시한 것이다. 공규동을 이러한 생각을 담은 그의 글 「“다시 땅으로” -탈성장으로 가는 사회와 개인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텃밭을 일구길 바란다. 텃밭에서 땀을 흘리며 피로한 주체를 단련하고 자연이 주는 성과와 기쁨을 누리시길 바란다.”7
공규동이 제안하는 행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의 생각을 먼저 살펴보면, 그는 먼저 지금 여기의 사회를 성과 사회라고 부르는 데에 동의한다.
“…… 오늘날의 과잉 긍정 사회는 그 누구도 나에게 금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부정적인 존재로서 축출 대상이 된다. 결국 개인은 자신과 싸울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개인이 책임을 묻고 탓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며, 따라서 현대의 중요한 정신질환은 우울증이 된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바로 성과 사회이며, 그곳은 ‘너는 할 수 있다’는 말로 가득 차 있다. 타자가 없기 때문에 개인 스스로 더 많은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간다.”8
공규동은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의 취지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규동은 신자유주의가 개인에게 성과 주체(Leistungssubjekt)가 되길 강요한다고 본 한병철의 견해에 동의한다.
“성장 중독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강요된 주체는 바로 성과 주체이다. 그들은 어떤 성과에도 만족할 수 없다. 더 많은 증식의 운동 자체가 미학적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성과 주체는 자기 착취를 거듭하여 결국 소진되고 우울증에 빠져서야 멈춘다.”9
지금 사람들은 타인의 강제가 아닌 자발적 자기 착취를 통해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가고 있다고 보며 그것으로 우울증의 만연도 설명한 것이다.
나아가 공규동은 정원 가꾸기와 같은 ‘다시 땅으로’ 운동이 곧 탈성장 운동이라고 한다. 그는 우선 겸손하게 “‘다시 땅으로’ 운동은 반소비주의, 반화폐주의, 공동체 건설 등 실천 가능한 모습으로 탈성장 사회의 조각을 지금-여기에 실현”10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 전체 특히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철되어 있는 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공규동의 이러한 겸손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한병철과 공규동이 공감하고 있는 논리에는 쉽사리 부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탈성장의 행동주의 노선 중에서 ‘다시 땅으로’ 운동이 탈성장 운동의 핵심이다. …… 정원, 농지를 가꾸는 개인의 주체야말로 성과 주체를 극복하고 타자와 시간을 매순간 느끼는 경험을 누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11
공규동은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성과 주체를 강요하는 피로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며, 정원 가꾸기가 그러한 시도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다고 본 듯하다.
외주화된 정원 가꾸기와 타자의 시간을 감지하는 체험의 박탈
한병철과 공규동이 정원 가꾸기에 보인 관심은 지금 여기 일상에서 정원 가꾸기가 대체로 외주화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도시생활을 생각해 보면 외주화 현실은 생각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에 정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주민이 정원을 관리하게 사회가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정원을 가꿔볼 기회를 가지는 것 자체가 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관리 사무소와 상의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화단 뒤 1층 거주자의 양해를 얻어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1층 거주자라는 존재다. 누구나 1층 거주자가 될 수 있다. 몇몇은 적극적으로 1층 앞 화단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가꿀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든 1층 거주자가 되면 기뻐하며 팔을 걷어 부치며 화단 즉 정원 가꾸기에 나서지는 않는 것이 현실일 듯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공규동이 탈성장 사회에 대비하는 단련으로 권한 정원 가꾸기는 기회조차 잡기 어려운 경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려운 만큼 그것은 절실히 필요한 체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현실의 이러한 한 단면은 지금 여기의 사회가 사람들이 타자의 시간을 감지하는 체험을 박탈하다시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시간을 일깨우는 부호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한국 사람들은 타자의 시간을 일깨우는 부호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태극(太極) 문양이 그런 부호라고 할 수 있다. 태극 문양은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의 중앙에 위치한 문양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일상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태극이라는 한자어는 직역하면 거대한 궁극 혹은 궁극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의역하면 ‘근본적인 원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는 태극이라는 말의 함의를 제대로 담아내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 사람과는 다르게, 제3자적 입장에서 태극을 이해한 영어권 사람들의 정의가 한자어 태극의 이해에 의외의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서, 그것도 소개해 둔다.
“The Absolute: the condition as it existed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교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태극도설』12에서 태극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태극도설』 앞 부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사진 출처: Stephanie Nagasawa
모든 내용이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고요함이 지극하면 다시 움직이나니”에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세계 속의 모든 운동이, 진자운동(振子運動)가 같이, 양극단 사이를 오고 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유교인들을 이러한 운동을 극즉반(極卽反)이라고 요약하기도 한다. 이는 ‘무릇 운동이란, 한 방향으로 진행되다가, 할 만큼 하고 나면 반대방향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겠다. 앞의 인용문에서도 ‘動極而靜 …… 靜極復動’ 즉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해지고 ……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움직임이 되살아난다’는 말로 이러한 사정을 정식화한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오늘날로 돌아와서, 태극기 속의 태극 문양 정가운데 점을 찍고 그로부터 원 바깥을 향하여 선을 그어본다고 하자. 그 선들 가운데 붉은 색만 지나가거나 파란 색만 지나가는 선은 없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농부가 이러한 사정을 안다면 가장 추운 날이 따뜻하여지기 시작하는 첫 날이라고 할 것이다. 농부는, 자신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동짓날이 지나고 나자 신기할 정도로 갑자기 아주 조금씩 추위가 풀리기 시작했던 겨울을 떠올려보라고 할 것이다. 농부가 아니라 도시에만 사는 한국인들도, 말복이 지나자마자 날씨가 선선해지는 체험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최고로 발달된 냉난방장치를 누리고 있음에도, 사계절의 변화를 겪는 한국인들에게는, 온도가 어떤 한 방향으로 상승하기만 하거나 하강하기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체험에서 나오는 공통된 결론이다.
이렇게 설명될 수 있는 태극 문양은, 한 방향으로만 직선적으로 전개되는 변화는 없다는 것, 변화는 가장 추운 날이 추위가 가시기 시작하는 날이며, 가장 더운 날이 더위가 꺾이는 날인, 사계절의 순환처럼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이 문양을 매일 접하는 한국 사람들의 무의식에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문양은, 사람이나 자본이 조절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으며, 그것을 타자의 시간이라 하든 자연의 섭리라 하든 맞서기보다는 인정하고 인내하여야 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미약하나마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문양을 생활의 일부로 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이 문양이 상징하는 바가 어느 정도씩은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인은 누구나 아파트 1층 거주자가 될 수 있는데, 이제는 1층 거주자가 된다 하더라도 기쁘게 1층 베란다 너머 화단을 나의 정원으로 가꾸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지금 여기의 사회가 사람들이 타자의 시간을 감지하는 체험을 박탈하다시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모든 한국 사람은 하루에 여러 번 태극기를 지나치거나 마주하는 일상을 살고 있는데, 그 깃발의 중심에 자리한 태극 문양을 타자의 시간이 존재함을 상징화한 것으로 본다면, 한국 사람들은 타자의 시간을 감지하는 체험을 박탈하다시피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저 수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탈성장 전환시대를 맞기 위한 단련에 나서고자 하는 한국 사람에게, 태극 문양으로 상징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내면에 심어주었을 수도 있는 무의식과 태극 문양 자체는, 탈성장 전환시대를 맞기 위한 벗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한병철(지음), 안인희(옮김), 『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김영사, 2018-03-09. 이 책은 독일어로 쓰였으며, 원제는 다음과 같다; Lob der Erde: Eine Reise in den Garten. 이 제목을 ‘대지에 대한 찬가: 정원으로의 여행’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
같은 책, 65쪽. ↩
같은 책, 23~24쪽. ↩
공규동, 「“다시 땅으로” -탈성장으로 가는 사회와 개인의 과제」,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기획),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3-06-05, 161~171쪽. 이 글은 2022년 7월 18일, 웹진 『생태적 지혜』에 게재된 것이다. ↩
같은 책, 166쪽. ↩
한병철(지음), 김태환(옮김),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2-03-05. 2010년 독일어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Mudigkeitsgesellschaft』이다. ↩
공규동, 「“다시 땅으로” -탈성장으로 가는 사회와 개인의 과제」, 171쪽. ↩
같은 책, 168쪽. ↩
같은 책, 169쪽. ↩
같은 책, 171쪽. ↩
같은 책, 171쪽. ↩
『태극도설』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자신의 세계관을 그림으로 집약하고 거기에 붙인 설명이다. ↩
周敦頤, 『太極圖說』. 설명을 위하여, 원문에는 없는 띄어쓰기와 줄 나누기를 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