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풀니스의 실천에 대한 과학화 연구 – 마인드풀니스란 무엇이고, 실천하는 사람을 어떻게 바뀌게 하는가?

존 카밧진의 마인드풀니스 과학화 과정은 sati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불교 특유의 존재론적 관점을 배제하게 만들었다. 본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을 분석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개념은 본래 불교 개념인 ‘sati(念, 념)’로부터 파생되었다. sati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졌는데, 정준영의 연구에 따르면 하나는 ‘memory’이고 다른 하나는 mindfulness다. sati는 초기불교에서는 사념처, 부파불교에서는 ‘위빠싸나’라는 수행법과 연관되어 소개되었다. 위빠싸나는 vipassanā로 ‘구별해서’의 의미인 vi와 ‘보다’의 의미인 passanā의 결합어이고, ‘사념처’는 anupassanā로 ‘따라서’의 의미인 anu와 ‘보다’의 의미인 passanā의 결합어이다. 혹자는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 지으려고 하지만, 필자는 이들이 동일한 현상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을 부각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동일한 주제에 속하는 과정적 흐름을 관찰함에 있어, 위빠싸나는 흐름 내 요소들의 전환 국면을 미시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면, 사념처는 흐름 자체를 따라가며 거시적으로 보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이 두 가지의 기능은 사실상 동일한 대상에 대해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서, 위빠싸나는 미시적인 대상들 간의 차이를 구별하며 관찰함으로써 sati의 전자 의미인 memory를 명료하게 성립시키고, 사념처는 거시적으로 연속적 흐름의 동일성을 따라가며 관찰함으로써 sati의 후자 의미인 mindfulness를 올바르게 성립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sati의 번역어로 전재성은 전자의 의미를 살려 ‘마음새김’을, 김재성과 활성스님은 후자의 의미를 살려 ‘마음챙김’을, 조준호는 수행적 특성을 살려 ‘수동적 주의집중’을, 보디스님은 ‘bare attention’을 각각 제시한 바 있다.1 sati는 이제 불교의 고유 영역과 불교학 바깥으로 진출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을 과학화한 선도자이자 MBSR(Mindfulness Based on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의 창시자인 존 카밧진은 ‘mindfulness’를 번역어로 제시했다. 그것을 엘렌 랭어는 마인드풀니스의 반의어로 추가 정의하면서 차용했고, 그 외 서구 긍정심리학자들 또한 비종교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2 존 카밧진의 과학화 과정은 sati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불교 특유의 존재론적 관점을 배제하게 만들었는데, 본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을 분석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반응

논의에 앞서, 존 카밧진이 사용하고 있는 스트레스 개념을 과학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 반응은 유기체가 자신의 균형을 파괴하고 자신의 대처 능력을 능가하는 그런 사건에 대한 반응양상이라고 정의된다. 이런 사건에는 여러 가지 내적 및 외적 조건이 포함되는데, 이를 통틀어 스트레스인(stressor)이라 한다. 스트레스인은 유기체로 하여금 일종의 적응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자극적 사건을 일컫는다(짐바르도 2004: 335).

스트레스는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먼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잠깐의 각성 상태는 급성 스트레스(acute stress)에 속한다. 이에 반해 만성적 스트레스(chronic stress)는 오래 지속되는 각성 상태로, 외적 · 내적으로 필요한 자원이 가용한 자원보다 더 크다고 지각될 때 생긴다. 심리학자들이 스트레스의 양을 정량화한 표를 통해 확인해보면, 우리는 법을 위반하여 벌금 고지서를 받을 때(51번) 적은 양의 급성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벌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그 상황과 반응은 확실히 종료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가족이나 배우자의 죽음에서 절망이라 부를 만한 스트레스를 만성적으로 느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별거 혹은 화해, 전직 혹은 승진 등 긍정적인 사건과 부정적인 사건이 같은 점수의 스트레스로 측정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상황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이전 상태로부터 변화한다면 그 상황은 우리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리적 차원에서 보면, 유기체가 자신을 방어하거나 적과 투쟁하거나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 할 때, 신경계와 내분비계에서 일련의 활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급성 위협에 대한 긴급 반응 활동이 바로 스트레스 반응이며, 이를 투쟁 또는 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약 도피에 실패하면 스트레스는 만성적인 것이 되고, 혹은 그 스트레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면 충격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이는 트라우마(trauma) 반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만성적 스트레스는 면역계를 약화시키고 여러 가지 질병에 취약하게 한다(카랏 2004: 416).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만약 적절한 수준에서만 작동한다면, 스트레스 반응 그 자체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안 로버트슨은 감정의 문제를 외부에서 오는 의학적 치료의 대상으로 여기는 문화 때문에 스트레스를 통해 더 강해질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훼손되고 있고, 그 결과 스트레스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로버트슨 2018: 264). 다시 말해, 스트레스 반응은 변화하는 세계에서 생명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적응 기제일 수 있다.

스트레스는 감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가 반응보다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그 반대이다. 흥분을 일으키게 하는 사실을 지각하면 곧바로 신체 변화가 따르고 그 신체 변화에 대한 느낌이 정서가 된다(제임스 2005: 2040). 즉 정서가 신체의 피드백으로부터 야기된다는 이러한 견해는 ‘James-Lange 이론’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만약 스트레스 반응이 이러한 신체 변화에만 한정된다면 신체가 먼저 병들지 않는 한 만성적인 것으로 고착화되지 않을 것이다. 현대 신경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발생 순서의 전환에 그치지 않고 정서와 신체 사이에는 일종의 피드백 과정이 일어나는 것으로 관찰된다. 그 피드백 과정은 변연계(limbic system)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뇌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변연계는 해마 · 편도체 · 시상 하부로 이루어져 있다. 오직 포유류에게만 존재하는 변연계의 이 구조들은 동기화된 행동, 정서 상태, 그리고 기억과정에 관여한다(짐바르도 2004: 51). 모든 상황적 변화에 처했을 때, 시상 하부는 연상되는 감정 상태를 만들어낸다. 시상하부는 이외에도 자율신경계를 통제하고 뇌하수체를 활성화하는 등의 스트레스 반응을 담당하므로 스트레스 중추라고도 불린다. 시상하부가 만든 그 감정 상태를 통제하기 위해 편도체가 흥분한다. 그리고 해마는 그 기억을 의식적으로 회상 가능한 형태로 저장한다. 그 저장 공간은 전두엽에 있는 무수한 뇌세포들의 연결 상태 자체이다.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뇌에 있는 신경세포들은 뉴런(neuron)이라고 불리며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뇌 겉면을 덮고 있는 대뇌피질에는 이 뉴런이 약 100억 개 존재한다. 각 뉴런은 시냅스(synapse)라는 연결점으로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는데 대뇌피질에만 10억의 100만 배만큼의 시냅스가 존재한다고 한다. 단순히 연결점의 수가 아니라 조합의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그 수는 천문학적이다. 이러한 복잡한 연결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창발적 결과로서 정신적 특성이 나타난다(에델만 2006: 37-8). 뉴런의 시냅스 구조는 생각이나 기억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뇌는 조합된 기억의 법칙에 의해 자체의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신경생물학자 제럴드 에델만의 말을 빌려 정의하면, 인간의 뇌를 구성하고 있으며 인간의 마음과 상관된 복잡한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천억 개의 뉴런으로 된 유기체는 통합과 분화의 특성을 모두 지닌다(Ibid.: 27-35). 에델만의 신경다윈주의(neural Darwinism) 이론을 토대로 판단할 때, 통합적으로 상호연결된 뉴런 클러스터들은 각자의 구성 방식에 애착을 가지고 분화된 채 상호 생존경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기존 위상 구조에 위배되는 상황에 맞닥뜨려 뉴런망 상의 변화 혹은 사멸까지도 요구될 때, 그 변화의 크기에 따라 급성부터 만성까지 스트레스 반응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존 카밧진의 스트레스 대응

만약 존 카밧진(2005)의 설명이 맞다면, 스트레스 반응은 적응기제로서 형성된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역기능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만성 스트레스와 2차적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MBSR 기법에 따른 ‘스트레스 대응’은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다.

카밧진이 든 예를 정리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직장을 다니는 현대인은 상사에게 크거나 작게 질책을 당하는 외부 스트레스 사건을 빈번하게 겪곤 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작동시키지만, 투쟁 또는 도피 반응 중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사회 구조상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직장을 잃을 것이 자명하고, 심지어 법적 처벌까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일반적 대안은 스트레스 반응을 억제하고 내재화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부정하고 상대방 앞에서 각성 반응을 숨겨 가장할 수밖에 없다. 존 카밧진은 내재화된 스트레스가 만성적 각성 · 수면장애 · 만성두통 · 불안 증세 · 고혈압 · 부정맥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내재화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현대인들은 쉽게는 과식 · 과음 · 흡연 · 약 또는 카페인 과다 복용 등에 의존하거나, 혹은 운동 중독 · 일 중독까지 선택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모두 카밧진에게 ‘부적응적 대처’인데, 일시적으로만 스트레스를 견디게 도울 뿐 장기적으로는 해결을 방해하고 오히려 강화하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신경계와 면역계를 비롯한 심신의 균형은 깨지고, 작게는 탈진과 우울, 크게는 심장질환이나 암 등을 유발해 신체가 와해된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새로운 내부 스트레스 사건이 되면서, 심신의 고통이 재생산되는 되먹임 구조를 형성한다고 카밧진은 주장한다.

스트레스 반응과 대조되는 카밧진의 스트레스 대응은 자동적 반응과 선택지들을 유보한 채 그저 ‘불교적인’ 관찰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카밧진은 ‘의도를 가지고서 현재 순간에 그리고 비판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이 특별한 방식’을 ‘마인드풀니스’라고 정의했고, 그것이 스트레스를 경감시킬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럴싸한 과학적 설명으로 무장한 존 카밧진의 MBSR 프로그램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40억 달러 가치의 산업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미국 의사협회 저널에 발표된 메타 방법론적 연구에서는 마음챙김이 다양한 질환을 치료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는 있지만, 약물이나 운동 같은 적극적인 치료 방법보다 더 효과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뿐만 아니라 충분한 품질을 갖췄다고 볼 수 있는 연구는 전체의 0.25%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퍼서 2021: 135). 대중의 열광이 과학적 증거를 앞지르고 있고, 사람들은 데이터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내용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는다(Ibid.: 15). 왜곡된 연구의 주된 문제는 수백만 달러의 보조금이 걸린 학문적 마음챙김 산업에서 기인하는데, 무작위 대조군 실험으로 증거 기반 연구를 하면 아주 쉽게 연구 지원을 받을 수 있다(Ibid.: 133). 한 마디로, MBSR은 사실상 과학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

방법론적으로도, ‘반응하지 않음(non-reactivity)’과 ‘탈중심화(decentering)’ 상태에서 단순히 바라보라고만 주문하는 것은 여전히 내재화된 스트레스와 투쟁하게 만들거나 혹은 스트레스 상황 자체로부터 도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저 바라볼 것’이라는 무형식의 지시는 최소한 관찰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판단과 반응의 강제적 중지와 관련된 또 다른 행동 지침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관찰이 그렇게 의식적인 수준에서 사용된다면 그것은 억압에 가깝게 기능할 수 있다. 마치 심리학 실험에서 빨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은 결과처럼, 그러한 억압은 억누른 만큼의 반동으로 내적 저항을 유발할 수 있다. 이렇게 숙련되지 않은 수준에서, ‘반응하지 않음’은 자제력 훈련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이때의 자제력은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감정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이마 뒤에 자리한 전두엽 안에 내장된 뇌 시스템의 작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합리성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블룸 2019: 301). 운동생리학적 연구에서, 반응 억제(Response Inhibition) 능력은 지구력을 발휘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정신적 요소로 낭비하면 고갈되는 한정적이고 중요한 자원이라고 밝혀졌다(허친슨 2018: 134). 따라서 육체적 피로가 반복된 훈련으로 극복 가능하듯, 오랜 세월에 걸친 마인드풀니스 훈련은 최소한 그들의 반응 억제 능력을 강화해주었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문제 해결이 유보되는 시간을 견디게 해줄 뿐,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된 이후의 결과인 ‘탈중심화’ 상태는 단순한 관찰 훈련만으로는 결코 유도되지 않는다.

또한, 일부 심리학자들은 마인드풀니스 명상에 대해 현실 도피의 부정적 의미를 담아서 ‘영적 우회’라는 멸칭을 붙여 비판하기도 한다. 영적 우회란 깨달음을 명목으로 영성과 영적 수행을 이용하여, 개인적 · 감정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회피하거나 불안정한 자기를 지탱하려고 하고, 기본적인 욕구 · 감정 · 발달 과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 버리는 대응 방식이다(웰우드 2008: 288). 영성을 현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이용할 때 영적 수행은 영성 이외의 삶과는 분리된 채 통합되지 않는다(Ibid.: 289). 현실과 분화된 관찰의 수준에서, 특정 긍정적 심리 상태가 발생하면 그것에 집착할 수 있고, 그 상태를 깨는 외부 현상과 부딪칠 때 더 큰 부정적 심리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 결국 마인드풀니스는 본질적으로 자기 심신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억압 및 회피 기술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오히려 내적 스트레스를 생산하는 역기능만이 나타날 수도 있다.

관찰 대상 이면의 근본 문제

경전에 따르면, 모든 수행의 목적이자 해결해야 할 문제는 ‘dukkha’란 개념으로 명시되는데, 붓다는 ‘물질적 · 정신적 조건들을 내 것으로 집착(upādāna)하는 것이 괴로움(dukkha)이다’(SN.V.420)3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dukkha는 어원적으로 ‘어긋난’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일반적 번역어 괴로움 자체보다는 ‘딜레마 상황에서의 불만족’이라고 번역하면 정확하다. ‘upādāna’는 ‘연료’지만 사람을 가리킬 때는 ‘집착’인 중의적 단어로, 불에 연료를 공급하는 비유로써 삶의 조건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스스로 연료를 찾아 유지하는 듯한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즉 변화하는 세상과 머무르고자 무언가를 붙들어 집착하는 마음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서로 어긋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만족을 느낀다. 스트레스 반응과 생리적으로는 유사할 수 있지만, 불만족은 외부나 내부의 특정 스트레스인이 부재하더라도 실존적 한계 자체로서 항존하기 때문에 명백히 구분된다. 붓다는 이러한 불만족의 문제를 통찰해낸 뒤에, 그것이 원인을 파악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제거할 때 해결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해결의 틀을 ‘사성제’라고 명명하고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이, 벗들이여, 이와 같이 유익한 법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된다.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생성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닦음의 거룩한 진리다.”(MN.I.184 코끼리 자취에 비유한 큰 경)

붓다는 “불만족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진 출처 :Anika Huizi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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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불만족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진 출처 : Anika Huizinga

사성제는 빨리어로 ‘cattari-ariya-saccani’다. 이 단어는 세 단어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첫 번째 부분인 ‘cattari’는 ‘넷’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두 번째 부분인 ‘ariya’는 ‘성스러운’의 의미하는 단어다. 깔루빠하나의 해석에 따르면, ‘성스러운’이라는 가치는 높고 낮음보다는 오히려 적절함이나 유용함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성스러운 것이 경전 상에서 ‘유익한’ 것으로 불리는 데 반해서, 성스럽지 않은 것은 ‘무익한’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다(깔루빠하나 2008: 188). 마지막 부분인 ‘sacca’는 ‘진실, 사실, 실제, 진리’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4 필자는 sacca가 ‘진리’의 의미로만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음을 놓치지 않을 때 그 실천적인 의미가 명확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붓다는 “불만족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SN.V.436)고 설명했다. 사성제는 불만족을 철저히 알기 위해 고안된 사고의 틀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성 아래 모든 정신 활동을 몰두하게 하며, 나아가 그것을 꿰뚫어 깨닫는 단계까지 인도한다.5 사성제를 생각하고 그것을 관찰해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때때로 위빠사나 수행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하게 될 수도 있다.


참고문헌

  • 정준영, 박성현 (2010). 초기불교의 사티(sati)와 현대심리학의 마음챙김(mindfulness). 한국심리학회, 22(1).
  • 조준호 (2004). 사띠(sati/smr.ti:念)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불교학회, 0(36).
  • 오민 (2010). “사띠논쟁, 念과 慧의 혼동서 비롯”, 법보신문.
  • 데이비드 깔루빠하나 (2008). 불교철학의 역사(김종욱 역). 운주사.
  • 로널드 퍼서 (2021). 마음챙김의 배신(서민아 역). 필로소픽.
  • 마크 윌리엄스 외 (2006). 마음챙김 명상에 기초한 인지치료(조선미 외 역).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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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립 짐바르도 (2004). 심리학과 삶(박권생 외 역). 시그마프레스.

약어 및 경전

  • DN. 장부 경전 (디가니까야)
  • SN. 상응부 경전 (상윳따니까야)
  • MN. 중부 경전 (맛지마니까야)
  • AN. 증지부 경전 (앙굿따라니까야)
  • 각묵 스님 (2006). 디가니까야. 초기불전연구원.
  • 각묵 스님 (2009). 상윳따니까야. 초기불전연구원.
  • 대림 스님 (2012). 맛지마니까야. 초기불전연구원.
  • 대림 스님 (2007). 앙굿따라니까야. 초기불전연구원.

  1. 조준호의 정리에 따르면, memory, awareness, recognization,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recollecting, remembering, heedfulness and mindfulness 등이 영어권에서의 번역어로 제시되었는데 mindfulness라는 역어가 현재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조준호 2004: 95).

  2. 권오민은 “마인드풀니스’를 비롯하여 영어로 번역된 불교어를 무비판적으로, 다만 영어사전에 근거하여 우리말로 재역하는 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따른다”고 주장했다(“사띠논쟁, 念과 慧의 혼동서 비롯”, 법보신문 2010-03-04).
    필자는 권오민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외래어 독음법 그대로 마인드풀니스를 사용하는 것을 채택했다.

  3. 정확한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간단히 말해 다섯 가지 무더기들을 나의 소유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 여기서는 당대 인도의 범주인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을 굳이 언급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물질적 · 정신적 조건들로써 의역하여 인용했다.

  4. 상응부 경전의 56번째 주제의 명칭은 Sacca-saṁyutta인데, 여기에 속한 모든 경들은 오직 사성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의 sacca란 곧 사성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한역에서는 ‘진리’의 의미를 채택하여 諦로 번역한 것이다.

  5. 기존의 해석 방식과는 다르게 우리가 경전을 열린 안목으로 보다 유연하게 해석하면, 사성제는 확정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가지는 견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유의 틀로 간주될 수도 있다. AN.IV.67에서는 견해가, SN.II.176에서는 지수화풍 사대가, SN.III.50에서는 오온이 대입되어 나타나는 등 도처에서 사성제는 사유의 틀과 같은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사견으로서의 사색(cinta)을 금지하시고(SN.V.446 : 생각의 경), 생각을 일으킬 때에도 사색할 때에도 논쟁을 할 때에도 이야기를 할 때에도 모두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SN.V.418-9).

Zen Lee

선불교를 경제인류학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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