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⑱ 보통내기가 아닌 아이

큰딸이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는 상덕씨. 그는 자상하지는 않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종종 들려줘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큰딸은 그런 남편을 닮았는지 따로 가르쳐주지 않은 글을 혼자 배워 익힌다.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평판을 받은 큰딸은 첫영성체를 남들보다 빨리 하고 일곱 살에 학교도 들어가 잘 다닌다. 큰딸이 6학년이 되었을 때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고 만삭인 엄마를 대신하여 1학년인 동생의 소풍을 따라간다.

보성댁이 큰딸인 선자를 낳았을 때 상덕씨는 매우 기뻐했다. 그렇게도 아들, 아들 하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아들 셋을 연달아 낳고 나니 말은 안 해도 은근히 딸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큰딸을 낳고 한동안 벙글거리고 다녀서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했고 보성댁은 그런 남편이 조금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혼례를 올리고 같이 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성격은 온순했지만 도무지 말이 없어 남편이 좀 어렵기도 했다. 같이 사는 시간이 늘어나고 서로에게 서로 ‘이무로와지면서’ 농담도 간간히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곤 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아이들을 씻겨 주거나 끼니를 챙겨 먹이거나 집안 청소를 하거나 하는 일들은 보성댁 몫이었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상덕씨가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우스개소리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셋째딸인 미자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기젓 좋아하는 시아버지’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에 기젓을 좋아하는 시아부지가 있었단다. -‘기젓’은 간장게장을 이르는 말이다. 냉장 시설이 없던 옛날에 게장도 쉽게 상하지 말라고 짜게 담아서 아래쪽 지역에서는 기젓이라고 불렀다- 근디 꼽꼽쟁이여가꼬 이 기젓을 얼릉 먹질 않어. 애께 묵었제. 밥 한 숫가락 떠먹고 젓그락으로 한번 찍어묵고 또 한 숟가락 떠먹고 젓그락으로 장만 찍어묵고 함서 애께애께 묵었단다. 근디 춤묻은 젓그락을 맨날 담근디 그거이 오래 가겄냐? 기 모양은 그대로 있는디 상해서 꼬리탑흔 냄새가 난께 메느리가 아이고 상해 븠네 함서 내뿌렀제. 이 시아부지가 밥상을 받아봉께 기젓이 없응께 메느리를 불러서 물어봤제. 기젓이 왜 없다냐. 아, 아부님, 기젓이 상해서 꼬리탑흔 냄새가 나서 내부렀어요. 아, 그랬냐. 글믄 니 거기 앉아라. 인자부터 나가 밥 한 숟갈을 뜨믄 니가 ”기젓!“흐고 말을 해라. 나 밥 다 묵을 때까지 해야 쓴다. 메느리는 할 수 없이 시아부지 밥 묵는 앞에 앉아가꼬 시아부지가 밥 한 숟가락 뜰 때마다 기젓 흐믄 시아부지가 아, 맛나다 또 한숟갈 뜨믄 ”기젓“ 흐고 시아버지가 ”아 맛있다“ 그래서 기젓, 기젓 그러고 있었제. 근디 글고 있다 봉께 갑자기 똥이 마려운 거여. 근디 시아부지 밥 묵는디 나 똥 매려와요. 할 수도 없고 고민하다가 몰아서 말하고 뒷간에 가야겄다 생각하고 ”기젓기젓기젓기젓기젓“ 흐고 몰아서 말을 했제. 긍께 시아부지가 그랬단다. 아가, 짜다. 천천히 해라.”

아이들은 이렇게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학교 가서 친구들한테도 들려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안다고 자꾸 옛날 이야기 한나 해보라고 한다고 귀찮아 죽겄서 하며 쫑알거렸다.

가족들은 모두 책을 좋아했다.
사진출처 : Hotspaces

상덕씨는 책 읽는 걸 좋아했다. 그건 보성댁도 그랬지만 가난한 살림에 책을 맘껏 보기는 어려웠다. 읽을거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청소하다 신문지 쪼가리라도 발견하면 그걸 앞뒤로 다 읽고서야 청소를 마치곤 했다. 자신이 읽을거리에 대한 갈망이 있다보니 상덕씨는 그런 보성댁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여자의 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자가 글을 아는 것이 미덕이 되지 못하는 시대였지만 상덕씨는 보성댁의 읽을거리에 대한 갈망을 이해했다. 이들 부부가 돈을 들이지 않고 손에 넣기 쉬운 책은 성당에서 주는 교리책들이었다. 그 책들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지 상덕씨는 ‘교리문답’ 한 권의 내용을 줄줄 외게 되었다. 그런 독서 이력으로 인해 전교회장 일을 하게 되기도 했다. 순천으로 이사 가서 전교회장으로 월급을 받게 되자 어려운 중에서도 상덕씨는 보성댁에게 책을 하나 선물해줬다. 상덕씨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던 일이라 남편이 세상을 뜨고 2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보성댁은 그 책 제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유부인’, 상덕씨가 보성댁에게 선물한 책 제목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보성댁은 당혹스러웠다.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유교적 훈육을 받으며 자랐던 보성댁은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그 내용이 당황스러웠다. 아버지께서 무슨 그런 책을 읽느냐고 혼내실 것 같았다. 전교회장 생활을 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상덕씨는 ‘경향잡지’라는 월간지를 구독해서 읽었다. 그 책을 상덕씨가 읽고 나면 보성댁도 읽고 자라면서 글을 읽게 되고 세상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는 아이들도 읽었다. 부모를 닮아서인지 아이들도 책읽는 것을 좋아했다.

순천에서 살 때는 성당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글을 읽게 된 아이들은 시간이 되면 그 곳에 가서 책을 읽으며 놀았고 글을 못 읽는 애들도 책을 들춰보며 그림 구경이라도 했다. 성당에서 ‘가톨릭 소년’이라는 월간지를 정기 구독해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 두었고 새 책이 오면 글을 읽을 수 있는 아이들이 앞 다투어 읽었다. 작은 도서관 이용률의 절반은 보성댁의 아이들이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그런 중에 큰딸은 딱히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오빠들에게 이거 어떻게 읽는가? 하며 한 글자씩 배우는 것 같더니 여섯 살 무렵엔 어지간한 책은 어렵지 않게 읽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딸을 보고 놀랐다. 보성댁은 딸이 남편을 닮아서 머리가 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어느 날 성당에 왔다가 보성댁 집에 들른 여회장 도로테아 씨가 글을 곧잘 읽는 큰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예 말이오, 안나씨.”

할 말이 있냐는 눈빛으로 건너다 보자.

“집이 큰딸, 선자 말이요.”

“이, 우리 딸이 뭐요?”

“아가 저라고 야무지고 똑똑흔디 내년에 학교를 보내믄 어쩌겄소?”

“이? 내년에 일곱 살인디?”

“알지. 안디 일곱 살에 학교에 보내기도 하잖여.”

큰딸은 글만 잘 읽는 게 아니라 야무진 건지 엉뚱한 건지 어른들이 생각지 못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성당에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설립한 유치원이 있었는데 있는 집 아이들이나 다니는 곳이고 보성댁의 살림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 아이들을 보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성당 마당에서 놀다가 제 또래의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유치원으로 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선자가 그 아이들을 따라 갔다. 자기들끼리 노는 아이를 두고 집안일을 하던 보성댁이 마당을 잠깐 내다보니 선자가 보이지 않아 얘가 어디 갔나 하는데 유치원을 관리하는 수녀님이 보성댁 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옴마, 수녀님 안녕하신 게라. 먼 일 있으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선자가 지금 유치원에 와 있어요. 오늘만 놀다 가게 하려고요. 혹시 찾으실까 봐.”

“아니 고것이 어째 거길 갔을까나? 성가셔서 어짠다요?”

“아이 아니에요. ‘나도 유치원 다닐라고 왔어요.’하는디 어찌나 귀엽든지. 차마 가라고 말을 못 하겠어서 오늘은 놀다 가라고 하려고요. 내일부터는 잘 봐주세요.”

그렇게 가는데 뭔가 민망하기도 하고 고것이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는지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런 딸에 대한 이야기를 신부님에게도 한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온 상덕씨가 보성댁에게 말을 건넸다.

“어이 선자가 오늘 유치원에 지 맘대로 갔담서?”

“금메 그랬다 안 그요. 쪼그만 게 어이가 없어서……”

“근디 신부님이,”

상덕씨가 잠시 말을 끊자 신부님이요? 하는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 보았다.

“그, 선자 그냥 유치원에 다니게 하라시대. 따로 돈 주란 말 안 할 텐게 보내라시대.”

“예? 아이고 염치가 없어서 어찌 그렇게 한다요.”

내심 좋았지만 그렇게 염치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유치원 수녀님이 주셨다는 노란 유치원 가방을 메고 신나게 나서는 딸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자는 유치원을 ‘공짜로’ 다녔고 둘째 딸 미선이까지도 그렇게 유치원을 다녔다.

그러다보니 선자는 사람들 사이에 보통내기가 아닌 아이가 되었고 따로 가르치지 않은 글을 읽어내니 더 그렇게들 생각하게 되었다. 성당에서 보통은 국민학교 2학년이 되어야 첫 영성체라는 걸 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선자는 일찍이 글을 깨우치고 나더니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2학년보다도 더 잘, 줄줄 외웠다. 신부님이 그런 선자를 지켜보고는 이렇게 교리도 기도문도 잘 아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냐고 하며 파격적으로 일곱 살에 첫영성체를 하게 해주었다.

“나가 알아봉께 일곱 살에 학교 간 아그들이 간혹 있드구만. 선자도 보내도 된 지 한 번 알아봐. 저라고 야무진께 지보다 한 살 많은 아그들이랑 다녀도 잘 다니겄그만.”

“엄마, 나 학교 갈래요. 학교 가고 자바요. 으흥~”

노느라 둘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지 않았는데 안 듣는 척 듣고 있었는지 선자가 와서 보성댁의 무릎을 흔들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아, 그래그래 알았어. 엄마가 아부지랑 이야기해 볼게. 가서 동생들이랑 놀아.”

아버지가 자기를 예뻐한다는 걸 알고 있는 선자는 그럼 됐네 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러 갔다. 상덕씨와 의논을 하고 학교에 알아본 결과 입학이 가능하다고 해서 보내기로 했다. 첫딸이 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되니 아들들을 보낼 때하고는 다른 기분이었다. 순하기만 한 딸이 저보다 한 살씩 많은 아이들 틈에서 잘 지낼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머리좋은 큰딸은 남들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갔다.
사진출처: PublicDomainPictures

입학식 날 보성댁은 선자의 머리를 양 갈래로 야무지게 잡아당겨 단정하게 꼭꼭 닿아 내려 끝에서 묶어 주고 빨간 리본을 끝에 묶어 주었다. 머리를 다 묶어주자 선자는 거울 앞에 가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더니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걱정과는 달리 선자는 학교에 잘 다녔고 학교가 끝나면 100점 맞은 받아쓰기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팔랑거리며 집으로 오곤 했다. 둘째 미선이는 여덟 살에 학교에 입학했고 보성댁은 두 딸의 머리를 야무지게 두 갈래로 묶거나 따거나 하며 학교에 보냈다. 학교와 성당이 가까워서인지 학교 선생님 중에는 성당에 다니는 교사가 몇 명 있어서 성당에 오면 아이들의 학교에서의 모습에 대해 간혹 이야기하곤 했다. 어느 날은 성당 옆 국민학교 교사인 딸을 둔 세라피나 씨가 보성댁을 만나자 딸이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안나씨, 우리 딸이 학교에서 집이 딸들을 봤는디 날마다 머리를 단정하고 야무지게 묶어서 보낸다고 엄마가 참 찬찬하고 부지런하다고 글대.”

“아, 그래요?”

대놓고 하는 칭찬이 어쩐지 부끄러워 그렇게만 대답하고 마는데 세라피나씨의 말이 이어졌다.

“아, 아그들이 어찌 그리 이쁘고, 공부고 잘 흐고 야무져서 안나씨는 참 좋겄어. 이?”

“아이고, 그저 이쁘게 봐주싱게 고맙지요.”

대답을 그렇게 하면서도 보성댁의 마음에선 자랑과 사랑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셋째 딸이 학교에 입학하니 바쁜 아침에 셋의 머리를 빗어주는 건 너무 어려웠다. 셋째 딸이 입학하고 처음 맞이한 토요일, 세 딸을 모두 데리고 가까운 이발소로 갔다. 그리곤 셋 모두 깡똥한 단발머리로 잘라줬다. 길러서 묶었던 머리를 단발로 잘라 놓으니 그건 그것대로 귀여운 맛이 있어 나쁘지 않았다. 제법 자랐던 선자와 미선이의 머리카락은 이발소 주인의 제안에 가발공장에 팔아 가용으로 쏠쏠하게 썼다.

미자와 선자는 네 살 차이가 났는데 선자가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어서 미자가 1학년이 되었을 때 선자는 6학년이었다. 4월이 되자 5월에 수학여행을 간다는 안내문을 들고 왔다. 보성댁의 형편으로는 적지 않은 돈이 드는 수학여행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그건 위의 세 아들들도 마찬가지였고 큰딸 밑의 동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이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졸업앨범 안 사고 수학여행 안 가는 게 우리집 전통이여 전통. 전통은 지케야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큰딸은 수학여행 보내 달라고 조르는 것이 없었다. 오빠들의 전통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다 정리된 듯했다.

큰딸의 수학여행 문제는 그렇게 정리가 되었는데 문제는 처음 소풍을 가는 미자였다. 1학년 소풍에는 대부분의 엄마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아이들 소풍에 따라가는 분위기였는데 출산이 임박한 만삭의 몸으로 학교에서 죽도봉까지 걸어서 왔다갔다하는 것은 어려웠다. 마침 수학여행 출발하는 날과 학교 전체 소풍 가는 날이 같은 날이어서 보성댁은 큰딸에게 동생의 소풍에 따라가 달라고 했다. 친구들이 대부분 수학여행을 가버리면 심심할 것 같았던지 큰딸은 선선하게 동생의 소풍에 동행했다.

학교에서 소풍 장소로 종종 이용되는 죽도봉까지는 어린아이들의 걸음이어선지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아이들을 따라오는 엄마들은 한복이며 양장들로 저마다 곱게들 차려입고 대부분 3단 정도 되는 찬합을 싼 보따리들에 음료수며 군것질거리를 싼 보따리들도 하나씩 더 들고 있었다. 걸어가는 아이들 끝에 도시락 보따리를 들고 따라가는 선자를 흘끔거리며 한 마디씩 보태는 사람들도 있었다.

“옴마, 쟈는 어째 아가 소풍을 따라온다냐.”

“쟈 6학년 아녀? 수학여행 안 갔나 보네.”

“갈 헹펜이 못 된가부지. 안 됐네.”

“지 동생이 1학년에 있는갑네.”

“근갑네.”

“즈그 엄마는 멋흐고 아를 보냈을끄나?”

“아, 쟈들 엄마 지금 몸이 무거워. 만삭이여.”

누군가 그렇게 아는 체를 했다. 그런 쑤근거림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선자는 앞서서 걷고 있는 동생을 보면서 걸었다.

오늘 도시락에는 남들처럼 김밥은 아니지만 멸치볶음이며 달걀말이며 단무지무침이며 평소보다 맛있는 반찬에 삶은 달걀도 두 개 있었고 수학여행을 못 보내준 미안함 때문인지 전에는 없던 사이다도 한 병 들어 있었다. 동생과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친구들이 수학여행 버스에 오르는 걸 볼 때에는 나도 수학여행 가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크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동생 소풍에 따라가는 이 길이 좋다 나쁘다 같은 생각도 없이 수업 안 하고 바람 쐬는 것으로도 좋았다. 선자는 동생이 반 아이들과 노는 것을 구경하다 점심 먹으라는 선생님의 말에 한쪽 풀밭에 도시락을 싸온 보자기를 깔고 동생과 앉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수정이 엄마가 다른 엄마들이랑 둘러앉아 이리 오라고 불렀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동생과 둘이 마주 앉았다. 동생은 수정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선자 앞에 앉아 언니가 열어주는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원래 먹성이 좋은 아이가 야외에 나와 평소보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니 더 맛있게 먹는 듯했다.

점심을 먹고 보물찾기를 했다. 선자가 미자와 같이 열심히 찾았으나 둘 다 하나도 찾지 못하고 다른 애들이, 각자 찾은 보물 쪽지를 내고 공책이니 연필이니 받아가는 것을 부러워하며 쳐다보기만 했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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