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⑰ 우물가 아이들

소록도를 떠나 밤골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보성댁네 식구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삶을 시작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셋째는 집이 좁아서 큰집에서 지내다가 보성댁의 주선으로 귀금속 공방에서 일을 배우게 된다. 이웃집에서 물을 길어 먹는 불편한 생활을 하다 마당에 우물을 판 이후 삶이 나아지는데, 얌전하지 않던 셋째딸은 우물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하긴커녕 즐긴다.

보성댁 식구들이 소록도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밤골로 이사했을 때, 가족이 살 집이 아직 없었다. 밤골 공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홍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혼자 살았는데 그 할머니 집의 방 한 칸을 빌려서 집이 지어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홍씨 할머니가 깐깐해서 보성댁은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다. 그 방 한칸에서는 소록도에서 데리고 있던 아이들 넷과 부부가 살기에도 턱없이 좁아 순천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데려올 수가 없지만 집이 지어질 때까지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성당은 외국에서 온 신부님들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신부님들이 고향에서 원조받아 온 돈으로 보성댁네 가족이 살 집을 서둘러 지었다. 방 세 칸과 마루, 부엌이 있는 집을 지었지만 방 하나는 교리실로 쓸 요량으로 마루방으로 만들어 보성댁네 식구가 살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궁리 끝에 마루방에는 고등학교 다니는 둘째가 지내고 딸들은 부엌 옆에 있는 식당방을 쓰게 하였다. 아직 어린 일곱째와 막내는 부부가 지내는 안방에서 데리고 자기로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셋째 응식이는 당분간 큰집에 가서 지내기로 했다.

보성댁네 아이들은 대체로 공부를 잘하는 축이었다. 소록도에서 2월 8일자로 이사 나올 때,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소록도에서 학년을 마치면 우등상을 탈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둘째인 용식은 순천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닌다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상덕씨는 자신이 학교를 다니지 못해 성당에서 전교회장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무시당한 설움이 있어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공부시키고 싶어했지만 워낙 가난했던 살림이라 큰 아들도 농림고를 다니다 포기했다. 그 후 세탁소 등에서 일을 하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국비로 운영하는 공군기술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학교는 학생들을 준 군인 수준으로 대우하여, 한마디로 양말과 속옷까지 지급해주는 학교였다. 졸업을 하면 바로 공군 하사로 근무하게 되어 있어서 졸업 후의 취업까지 보장된 학교였다. 그런 혜택 때문에 큰아들이 지원할 당시 경쟁률이 53대 1이었고 큰아들은 그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서 보성댁 부부는 큰아들의 배움에는 근심할 것이 없게 되었다. 둘째인 용식은 같은 지역에 있는 공고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인문계고등학교 진학을 고집했다. 용식의 성적으로는 두 학교 다 충분히 진학할 수 있었지만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며 공고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하고 합격했다. 보성댁 부부는 야속하고 미안한 마음을 동시에 갖고 아들이 원하는 학교에 가게 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학비를 대는 일을 힘들게 이어 나갔다. 셋째인 응식은 중학교 2학년 1학기까지만 해도 제법 성적이 좋았다. 2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어쩐지 공부를 별로 하는 것 같지 않더니, 보성댁네가 소록도로 가면서 할머니 집에서 학교에 다닌 탓인지 3학년이 되어서는 완전히 공부를 놓아 버렸다. 한참 예민할 사춘기에 갑자기 부모형제와 떨어져 살게 된 탓인가 싶기도 했다. 형이 진학한 인문계 고등학교도 지역의 공고도 들어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순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상고에 보낼 형편도 되지 않았다. 보성댁은 걱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제 형처럼 공부 욕심을 부리지 않는 셋째 응식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니 구들을 때야 했다.
사진출처 : koreacuristory0

학교에 가야 하는 둘째는 기차역이 가까운 집에서 데리고 있고 학교에 가지 않고 딱히 할 일도 없는 셋째는 큰집에 기거하면서 사촌들이랑 같이 놀거나 큰집의 농사일을 슬렁슬렁 도우며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날이 추워지니 아무리 건장한 고등학생이라도 불을 땔 수 없는 대청방에 지내게 하는 건 아니다 싶어서 신부님께 말씀을 드리고 둘째가 지내던 방에 구들을 놨다. 돈을 아끼기 위해 구들장으로 쓸 돌을 다른 집 허무는 곳에서 얻어왔는데 그 구들장이 두꺼운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을 조금 때서는 방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나무를 많이 때야 방이 따뜻해졌고 그 대신 오래 따뜻하긴 했다. 안방은 아침에 일어나면 싸늘하게 식어 있어 아침에 한 번 더 불을 때야 했고 아침을 지으면서 불을 때니 달리 문제가 없었다. 새로 구들을 놓은 갓방은 아침이면 아들이 학교에 가느라 나가고 불을 때기도 안 때기도 애매할 판에 두꺼운 구들 덕에 불을 더 때지 않아도 따뜻하다 싶으니 그게 그거다 생각했다. 세 딸이 지내는 식당방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연탄을 때는 방이라 하루 종일 따뜻해 낮에 별일이 없을 때는 온 식구가 식당방에 모여 바글대며 지냈다. 그런데 오후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둘째딸은 그렇게 식구들이 바글대는 걸 싫어했다. 혼자 조용하게 지낼 수도 없고 공부하는 데에 동생들이 귀찮게 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딸은 동생들과 어울려 노느라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늘 큰집에 얹혀 있는 응식이가 마음에 걸렸다. 응식이는 고등학교를 못간 데 불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큰집에 얹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맘이 불편한지 집으로 종종 건너왔다. 그런 응식을 보며 걱정을 하다가 문득 순천에서 귀금속 쪽 일을 하는 사촌 동생이 생각났다. 보성댁의 작은아버지는 천성이 온순하고 남들과 싸우려 들지 않는 성격이어서 계모와 계모가 데리고 온 누나들하고 그다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는지 일찍이 순천으로 건너와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나름 성공을 거두어 순천 시내에 넓은 집도 장만하고 변두리에 논마지기도 사들였다. 그래서 아들 가르치는 데에 어려움이 없어 보성댁과 동갑인 큰아들은 교대를 나와 교사를 하고 있었고 사촌 동생들도 나름 공부한 덕에 잘들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작으나마 건실한 사업을 하는 동생도 있었고 순천에서 꽤 알찬 금은방을 하는 동생도 있었다. 그리고 그 동생의 지원에 힘입어 그 밑의 동생은 보석 세공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보석 세공을 배우면 지 밥벌이는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 요왕이 아부지.”

같이 저녁에 밥에 넣을 풋콩을 까다가 상덕씨가 말없이 보성댁을 바라봤다. 상덕씨는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나 성격이 내성적이고 꼼꼼한 데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시간이 날 때면 다른 집 남정네들처럼 술을 마시거나 노름을 하거나 하는 법은 없고 책을 읽고 있을 때가 많았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어서 보성댁은 평소 남편을 신뢰하고 있었다.

“응식이 말이요. 언제까지 저러고 있으라고 놔둘 수는 없을 것 같은디…….”

“먼 생각이 있는가?”

“찬식이 공장에 델꼬 일 좀 갤차주라 그믄 어쩌까 싶은디요.”

“처남한테?”

사촌 처남의 성품을 아는 상덕씨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니나 부잣집 막내아들로 자라서 그런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고약한 성깔이 나오곤 하는 사람이었다.

“괜찮겄는가.”

짤막한 말에 많은 내용이 담겼다. 사촌 동생의 성격을 아는 보성댁도 그걸 알아들었다.

“괜찮을 꺼이요. 지가 나를 봐서라도 우리 아들한테 함부로 허겄소.”

“글쎄……, 암튼 뭐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닝게 자네가 한번 알아 보소.”

“예, 글믄 나 내일 순천 잠 갔다 올라요.”

“그러소.”

다음날, 순천으로 간 보성댁은 작은아버지 댁을 찾았다. 사촌 동생 찬식이 작은아버지댁 행랑방을 고쳐 그 곳에서 공방을 하고 있었다. 보성댁의 부탁을 들은 찬식은 선선이 ‘그러지요’ 하고 받아 들였다. 다음 주부터 보내기로 하고 보성댁은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집에서 날마다 다니기엔 버스비가 부담스럽고 작은집이 버스정류장에서도 기차역에서도 멀다 보니 어머니댁에서 응식이가 지내며 일을 배우러 다니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응식은 큰집에서 사촌들이랑 놀다가 ‘응식아, 엄마랑 갈 데가 있다’는 말에 얼떨결에 따라와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어린 나이에 배우기 시작한 탓에 힘든 일을 겪으며 살기 시작했다.

성당 마당에 지은 집에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에는 우물이 없었다. 성당 건너편에 사는 지면장댁이 신자이기도 해서 그 집에서 물을 떠다 먹으라고 했다. 성당 건너편이라고는 하나 보성댁네 식구가 사는 집은 성당 마당의 가장 안쪽에 지어졌고 지면장댁 대문도 골목 안에 있어 물을 떠 오자면 100미터가 넘는 거리를 물동이를 이거나 양동이를 들고 와야 해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록도에서는 부엌 안에 펌프가 설치된 우물이 있어서 편하게 물을 썼고 순천에서 물 길러 가던 우물까지의 거리도 이보단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물을 아껴 써야 했고 여덟 식구가 쓸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연간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딸들도 학교 갔다 오면 물 양동이를 좀 날라야 놀거나 숙제하거나 할 수 있었다. 주말이면 큰딸도 물을 길러 날랐다. 고등학생인 용식이는 남자인데다 기운이 좋아서 양손에 양동이를 들고 물을 길어와 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일요일에 성당에 온 사람들이 목이 마르면 ‘예, 물 잠 주씨요’ 하며 보성댁의 부엌을 찾았다.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지만 간혹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남은 물을 바닥에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떠온 물인데 그렇게 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보성댁은 마음이 상했다. 남은 물을 대야에 부어 놓으면 손이라도 씻고 걸레라도 빨 텐데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신부님께 이런 불편을 하소연해 결국엔 부엌 앞마당에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다. 우물을 파는 공사를 하는 며칠 동안 보성댁은 물을 길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 앞에 논이 있어서 그런지 물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물을 파는 일은 열흘 정도 걸렸다. 두레박을 장만해서 물을 뜨는데, 100미터 거리를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혹은 양동이를 들고 물을 길러다니던 것에 비하면 천국이라 할 만했다. 아이들은 두레박 사용이 서툴러 우물 안에 두레박을 넣고 이리저리 휘둘러 대면서 물을 길었고 차츰 숙달이 되어 갔다. 그러면서도 종종 두레박 줄을 놓치곤 했다. 그럴 때면 긴 대나무 장대에 오래된 낫날을 묶어둔 자체 제작 도구를 두레박을 건졌다. 집안에 우물이 생기니 여름이면 시원한 물을 바로 떠서 쓸 수 있어 좋았다. 우물에서 막 떠낸 물은 정말 시원해서 물을 마시면 가슴이 얼얼할 정도였고 막 퍼올린 물로 등목을 하면 숨이 턱 막힐 것 같아 등목할 물은 미리 떠 놓곤 했다.

어느 날 시장 그릇전 앞을 지나는데 항아리 모양을 한 불그스름한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끈도 달려 있었다.

“예, 요것이 멋이다요?”

“이, 그거. 시암에 짐치 넣어 놓고 시원하게 묵으라고.”

“이…… 요것이 있으믄 참말로 김치 샘에 너놓고 씨언흐게 묵겄네 이.”


“한나 사. 집이도 시암 있제?”

“이, 글믄 한나 주씨요, 안 그래도 여름에는 김치를 담아만 놓으믄 시어져부러서 영 성가셨는디…….”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셋째 딸이 우물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사진출처 : mh-grafik

통을 사며 어제 담은 열무김치를 넣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맨 끝에 아들들 둘이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그만 아이들이 우물 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느그들, 멋 흐냐? 물 떠 주까?”

“아, 엄마. 누나가 샘에 들어 갔어요.”

“뭐? 누나가? 먼 소리다냐?”

허둥지둥 우물 안을 들여다 보니 셋째 딸이 두레박을 들고 우물 안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확 끼쳤다.

“아이! 너 지금 멋 흐냐? 큰일 날라고!”

“아? 엄마! 성식이가 물 먹고 싶다는데 두레박이 물에 빠져서요. 저 짝대기로 잘 안 건져져서 건질라고 들어 왔어요.”

딸은 위를 올려다 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에도 여자답지 않고 덜렁거려서 종종 한숨을 쉬게 만들던 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간댕이가 부어 있을 줄은 몰랐다.

“얼렁 올라와! 빠질라!”

애타는 마음에 보성댁은 소리만 버럭버럭 질러댔다.

“예, 엄마 지금 올라가요. 저 안 빠져요.”

애타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며 전혀 겁먹지 않은 얼굴로 우물 밖으로 올라왔다. 하는 모양을 보니 우물에 처음 들어간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곤 이젠 두레박을 물에 빠트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인 듯 두레박 줄을 두어 번 손에 감고 두레박질을 하고 물을 떠서 동생들에게 먹였다.

“거기 들어갔다가 미끄러지면 큰일나. 어찌 그리 겁 없이 들어가냐? 이젠 다시 들어가지 마.”

그렇지만 미자는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 엄마 괜찮아요. 한나도 안 미끄러워요. 글고 들어가믄 시원하고 좋은디. 히.”

애타는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겁 없이 구는 딸이 어이가 없었다. 지 언니들은 안 그런디 저건 왜 저런가 모르겄네. 한나도 여자 겉은 디도 한나도 없고. 커서 멋이 될라고 저런다냐. 보성댁은 우물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다시 딸에게 이르고 새로 산 김치통에 지난번에 담은 열무김치를 옮겨 담아 우물에 넣기 위해 부엌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렇게 샘에 담궈 뒀다가 밥때가 되면 건져서 상에 놓은 열무김치는 시는 속도도 늦춰지고 시원한 맛도 있어서 입맛 떨어지는 여름 밥상의 별미가 되어 줬다. 나중에 공군 하사가 된 큰아들이 PX에서 냉장고를 사오기 전까지는 여러 종류의 김치가 번갈아 들어가며 여름 밥상의 입맛을 더해 줬다. 미자는 그 후로도 우물 속에 들어가는 데에 재미를 붙이고 펌프를 설치해서 두레박을 건질 필요가 없을 때에도 가끔 들어갔다 나오는 눈치였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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