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① 보도블럭과 나

공적 영역에서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그 관리 주체가 국가나 시에 있어서 사람들이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물질들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기 위해 올해 7월 23일부터 실험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 실험 과정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가로수, 돌계단, 전봇대, 손잡이, 이러한 사물들은 공적 영역에서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국가나 시 행정이 관리 주체가 되기에 사람들이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우리를 이롭게 하는 이 사물들이 어떤 존재인지 고민해 볼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그 필요를 심화할 수 있는, 몸을 써서 실천하는 활동을 구상했다. 그중 하나가 보도블록을 닦는 것이다.

– 보도블록 한 개를 정해서 닦는다.

–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댈 수 있을 정도로 닦는다.

– 매일 닦는다.

– 일지를 쓴다. 닦지 못한 날에도 그 이유를 일지에 기록한다.

만약 처음부터 이 활동이 미술이라는 범주로 갈무리되는 상정한다면, 장소성을 고려해서 의미가 생길만한 공간과 관객을 특정하고 활동하겠다. 예를 들어 기후 악당으로 지목된 대기업의 빌딩 앞에 있는 보도블록 하나를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닦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활동에선 나를 이롭게 하는 보도블록과 내가 관습적 관계에서 벗어나서 어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복잡한 요소들을 깊게 생각하기 전에 일단 시작부터 하고, 지속하기 수월하게끔 집과 가까운 곳을 찾다가 서울혁신파크로 갔다.

23.07.23

서울혁신파크의 중심부 광장 근처 보도에 툭 튀어나온 블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왠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위도 37.6079485, 경도 126.9338435 그 보도블록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치상의 위치다. 기록을 마치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23.07.24

나는 하나의 보도블럭을 정해 닦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 Arcaion

보도블록을 닦을 도구를 준비했다. 곰팡이가 슬어 한 번도 쓰지 못한 새 칫솔, 여행 중 실수로 질 좋은 내 수건과 색이 같아 바꿔 가져온 질 나쁜 수건, 그리고 물을 가득 채운 분무기를 작은 가방에 챙기고 집을 나섰다. 시간은 저녁 8시 반. 해가 져서 어둑했고 혁신파크엔 산책하러 나온 동물과 사람이 많았다. 보도블록에 도착했는데 하필이면 보도블록 바로 앞 벤치에 아주머니 두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나는 왠지 긴장되어 그들을 등지고 앉아 빠르게 보도블록을 닦았다.

23.07.25

이번엔 운동도 할 겸 친구와 함께 달려서 혁신파크에 갔다. 중간에 소나기가 내렸지만 우릴 막을 수는 없었다. 도착해서 물을 뿌리고 칫솔로 세심하게 문지르고 걸레로 훔치고, 깨끗한 걸레로 한 번 더 닦으며 마무리. 아직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비가 계속 내렸다. 주위에 건물 밑이 뚫려서 비를 피할만한 꽤 큰 공터가 있어서 그곳으로 갔다. 이미 사람들과 동물들이 피신해 있었는데 그곳에서 놀이동산에서 볼 법한 루돌프 머리띠를 한 도베르만과 그의 주인인 듯한 남자를 봤다. 난 신기해서 자세히 봤는데 붕대로 만든 머리띠였다. 다음날 책을 보다 우연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인간의 추악함을 느꼈다.

23.07.26

보도블록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 생각하다가 ‘쿵덩야’로 정했다. 이는 어떤 줄임말인데 친구에게 이 줄임말을 설명했더니 이름의 친근함에 비해 뜻이 별로라고 해서 앞으론 밝히지 않기로 했다. 문득 처음 쿵덩야를 선택할 때 떠올랐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너무 싫었다. 모난 돌이 정도 맞고 예쁨도 받을 텐데, 난 고등학교 졸업 이후 정 맞을 정도로 무언가에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선택했던 그 돌에 마음이 가지 않았고 그 돌 대신 다른 돌과 관계하기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생협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에 혁신파크에 들렀다. 모난 돌을 중심으로 상하 좌우에 붙어있는 돌 중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개중 상처가 가장 많은 돌이 있어 그 녀석을 쿵덩야로 정하고 열심히 닦았다. 쿵덩야의 위치는 위도 37.60854 경도 126.9341328다.

23.07.27

쿵덩야를 만날 채비를 했다. 이번엔 집의 곰팡이 제거 후 남은 락스물을 챙겼다. 쿵덩야 앞으로 도착해서 락스물을 뿌리니 특유의 꼬릿한 냄새가 났다. 락스는 원래 무취인데 세균을 만나 반응하면 냄새가 난다고 한다. 칫솔질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앞에서 검은 그림자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올려다보니 모자를 푹 눌러쓰고 까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중년 여성이 쭈그리고 앉아서 땀 흘리며 쿵덩야를 닦던 나에게 물었다. “뭘 뿌리는 거에요?” 난 당황했다. 왠지 락스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아… 아… 물이요”라고 답했다. “왜 거길 닦고 있는 거예요, 이 야밤에?”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난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색하게 실실 웃었다. 아주머니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내 활동을 지켜봤다. 난 닦기를 마치고 따릉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행동의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이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 몰랐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23.07.28

오늘은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쿵덩야를 닦았다. 친구는 이사를 해야 하는데 시기가 맞지 않아 이삿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짐을 잠깐 보관했다가 시기에 맞춰 날라주는 보관이사라는 것도 있더라고, 친구에게 알려줬다. 평소 문제가 생기면 걱정부터 앞서는 친구를 위해 ‘선덜덜 후조치’ 하지 말고 ‘선조치 후덜덜’ 하라고 말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통화하며 쿵덩야를 닦아도 되는 걸까? 이 활동이 몰두해야 하는 일이나 미술 작업의 영역이 아닌 라디오를 틀어놓고 설거지하는 것처럼 일상의, 살림의 영역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하지만 쿵덩야는 이 태도를 어떻게 느낄까? 건성으로 닦는다고 생각할까?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하길 바라지 않을까? 얼마간은 쿵덩야를 닦을 땐 그에게만 집중해야겠다.

23.07.29

촬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친구들을 만나 새벽까지 노느라 쿵덩야를 만나지 못했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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