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② 그대를 만나러 갑니다

공적 영역에서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그 관리 주체가 국가나 시에 있어서 사람들이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활동의 일환으로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보도블럭 하나에 쿵덩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3.07.30

외식을 하러 밖에 나가는 김에 쿵덩야를 닦으려 도구를 챙기고 집을 나섰다. 친구를 만나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가는 도중 갑자기 비가 억수로 내렸다. 우리는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치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로 버스에 몸을 맡겼다. 중간에 어떤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면서 악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저 정도인가?” 하며 웃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웬걸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비를 피할 곳으로 달려가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재빠르게 버스에서 내렸는데 우리 둘 다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상가 처마 밑에 피신한 후 “이 정도구나”하고 서로 소감을 나누며 웃었다. 비는 그칠 기미 없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졌다. 요즈음 이런 비가 종종 온다. 2023년 여름부터는 이러한 비를 ‘극한 호우’로 부른다고 한다. 기후변화가 체감됐다. 식당까지 조금 걸어야 해서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다. 그런데 우산이 너무 작았다. 잠시 걸었을 뿐인데 신발부터 무릎까지 다 젖고 말았다. 아무리 급한 사람 등쳐먹으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작은 우산 누가 쓰라고 만들었나! 제작자가 미웠다. 식당에 도착해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 지쳐서 쿵덩야를 닦지 못하고 집에 왔다.

23.07.31

생협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쿵덩야에게 들렀다. 해가 떠 있을 땐 처음 왔는데 주위의 보도블록에 비해 유독 쿵덩야만 하얬다. 몇 번 닦지 않았는데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자니 쿵덩야와 그가 속한 주위의 풍경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몽글몽글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쿵덩야를 닦으며 얼마 전 모르는 아주머니가 대뜸 나에게 뭐 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를 떠올렸다. 편한 자리에서 동료에게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게 현장에서 낯선 이에게 바로 전달하는 것을 준비하지 못해서 그땐 많이 당황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말이 필요할까? 나도 아직 잘 모르겠으니 솔직하게 말해볼까? “아직 잘 모르겠어요” “끝나야 알 것 같아요”라는 말들이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 속에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관계가 사라지거나 깨지게 되면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많지 않은가.

23.08.01

“‘밖’의 사물이었던 그를 내 안으로 들이고 밖과 안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결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 Aakashdhage

집이 너무 덥다. 평균 실내 온도가 32도고 밤에는 33도까지 올라간다. 가끔 소음이 심한 창문형 에어컨을 튼다. 그래도 온도가 30도 밑으로 내려가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남들 다 쓰는 벽걸이 에어컨을 사고 싶기도 하다. 자연은 무한하다는 인간의 심각한 착각 때문에 발명된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 안과 밖의 구분을 진리처럼 받들었다. 오늘날 밖을 마구잡이로 착취해서 안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기초 상식이며 인간의 특권이다. 그 결과 인류의 일부는 아주 잠깐 가난을 면했지만, 지구에서 인간종의 생존 조건을 스스로 파기하고 있다. 모두 자신의 ‘안’이라는 곳에서 사방을 틀어막고 냉기를 생산하는 대신 ‘밖’으로 열기를 뿜어대고 있다. 이름도 의미심장한 ‘실외기’라고 불리는 기계들이 만드는 열기는 전 세계 온실가스의 28%를 차지한다. 모두 제 안방에 불을 지피는 듯하다. 이렇게 안과 밖을 구분하고 인간과 지구를 분리하는 것은 미래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다. 물론 이런 위기는 별것 아니며 여차하면 자신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듯 우주로 가는 로켓을 수시로 날리는 어떤 부자 같은 경우는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정해놓고 화성으로 도망칠 준비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구조를 설계한 소수는 살아남고 대부분은 죽을 것이다. 이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의 이야기기도 하다. 소득 10%의 부자들이 52%의 탄소배출을 한다. 부자들의 넓은 집과 비싼 차, 편의시설 등을 쾌적하게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뿜어지는 열기는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나 같은 에너지 취약계층의 몸을 상하게 하거나 쪽방촌 거주자의 생명을 앗아간다. 이런 불평등과 그에 따른 피해는 구조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책임이 크다. 우스갯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소수는 지금이라도 자신의 거주지에 에어컨을 제거하고 열기를 몸으로 느끼는 것이 최소한의 윤리적 선택 아닐까? 아마 그렇게 해도 과학적으로 고려해서 지은 비싼 집이니 별로 덥지도 않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 집을 나와 쿵덩야를 만나서 그를 닦았다. 집에 돌아와 양치하는데 내 이를 칫솔질하는 느낌이 쿵덩야를 칫솔질하는 느낌과 너무나 같아서 놀랐다. 쿵덩야와의 친밀함이 조금씩 쌓인다. 너무도 명확해 이견의 여지가 없는 ‘밖’의 사물이었던 그를 내 안으로 들이고 밖과 안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결을 깨닫게? 적어도 오늘 난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다. 이러한 일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23.08.02

이젠 멀리서도 쿵덩야를 알아볼 수 있다. 쿵덩야는 미세한 돌 알갱이를 뭉쳐서 네모나게 만든 돌덩이다. 부피가 있어서 꽤나 무겁다. 내가 닦아서 그런지 다른 보도블록에 비해 중심부가 유달리 밝다. 왠지 쿵덩야의 가장자리 부분은 아직 밝지 않다.

23.08.03

오늘도 어김없이 쿵덩야를 닦았다.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나에게 말 거는 사람은 없었다. 요즈음 끔찍한 뉴스도 많고 세상이 흉흉해서 나를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23.08.04

저녁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너무 힘들어서 쿵덩야를 만나지 못했다.

23.08.05

주말이라 그런지 혁신파크에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행복을 위해 여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잔디밭 위에서 친구와 캐치볼을 하고, 멋진 운동복을 입고 달리기를 하고, 아이와 공놀이를 하는 등 평화로운 주말 오후의 분위기다. 문득 인간이 이런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자연과 단절된 곳에서 의문 없이 시키는 일을 하고 숫자 돈을 받아서 무언갈 착취해 생산했을 상품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이는 도시인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일 텐데 이런 삶을 관성적으로 살아간다면 모두의 종말이 오지 않을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존 그 자체인가 아니면 남들보다 더 우월한 삶에 대한 갈망을 생존이라는 당위로 포장한 결핍 상태가 기본값인 과잉된 욕망인가. 내가 죽어도 쿵덩야는 나보다 더 오래 존재할 것이다. 쿵덩야를 물로만 닦는데도 칫솔질을 하면 하얀색 거품이 난다.

23.08.06

일요일은 쿵덩야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매일 만나면 여러모로 힘들 듯 그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각자의 시공간을 존중하는 관계가 건강하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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