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속에서 이웃 건져서 모으는 나날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관람후기

사람이 삶의 위기를 맞이하여 그 위기 속에서 간신히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웃은 풍경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풍경 속에만 있던 몇몇 사람은 이웃이 된다. 이웃은 비장한 결의나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하여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들은 아주 작은 이끌림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였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가까이에서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게 되는 듯하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뭔가를 평가하거나,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그치는 기색을 보이면, 그에게 이끌리는 사람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풍경 속에서 이웃을 하나하나 건져서 모으는 이찬실 씨의 나날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집시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보고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찬실은 영화 제작자가 되어 지감독과 함께 영화 만들기를 이어가다가 영화 《뒷산에 살리라》 제작을 앞두고 지감독이 갑자기 죽으면서 위기를 맞이한다. 그 위기 속에서 간신히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웃은 풍경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풍경 속에만 있던 몇몇 사람은 이웃이 된다. 영화 시작할 때에 비하여 끝날 때는 이웃의 숫자가 늘어났으니 이 영화는 이웃 늘리기 성공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영화 《친구[親舊, Friend](2001)》 포스터를 장식하였던 문구다. 21세기의 두 번째 해에 태어난 이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들어서던 사람들은 경쟁이 바짝바짝 조여오는 일상을 잠시 벗어나서 우정 판타지에 빠져보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보여준 것은 욕망 앞에 희미해져가는 우정의 덧없음, 개인을 숨막히게 하는 관계라는 굴레의 견고함인 듯하다. 영화 속에서 친구들은 서로를 비교하고 질시하고 죽이고 죽는다. 《친구》의 작가 곽경택은 그의 또 다른 영화 《똥개[Mutt Boy](2003)》에서 친구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면서도 그 관계로 꽉 짜인 지역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한편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속, 21세기의 1/4분기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의 남한 사회를 서식지로 하고 있는, 이찬실 씨가 처한 형편은 어떠한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 LUCKY CHAN-SIL》 포스터, 감독 김초희, 제작 2019, 개봉 2020. 03. 05, 재개봉 2020. 11. 26), 러닝타임 96분.
《찬실이는 복도 많지 LUCKY CHAN-SIL》 포스터, 감독 김초희, 제작 2019, 개봉 2020. 03. 05, 재개봉 2020. 11. 26), 러닝타임 96분.

이찬실 씨는 영화적 동지임에 틀림없는 지감독과 영화 만들기를 이어가다가, 지감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뒷산에 살리라》라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기 직전에, 제작자로서의 역정이 가로막히는 난관에 처하게 되고, 생계마저 막연해진다. 그가 처한 총체적 난관은 세간들을 담은 빨간 고무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지극히 미니멀한 이삿짐을 나눠 든 세 명의 제작부와 함께 홍제동 개미마을의 경사로를 오르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 도착한 새 서식지의 주인 할머니는 가운데 방은 열어보지 말라는 말로 이찬실 씨에게 적대적인 느낌을 주고, 이찬실 씨는 이사를 끝내고 짜장면을 먹는 뒤늦은 시각에나마 산길을 올라와 관심을 보여준 소피를 돌려깐다. 이리하여 누군가의 뒷산 거의 정상 부근의 원치 않았던 장소에서 시작된 생활에서 이찬실 씨는 홀로 된 듯 보인다.

돈이 필요한 이찬실 씨를 소피가 가사도우미로 고용한다. 소피는 후배인 단편 영화 감독 김영 씨를 방문 불어 교사로 고용하고 있기도 했기에, 두 피고용인은 만나게 된다. 이찬실 씨는 김영 씨에게 즉각적으로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을 슬금슬금 드러내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지금 그래도 되는 건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찬실 씨가 뭔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을 때마다 《아비정전 [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1990)》에서 “이 새가 땅에 몸이 닿는 날은 생애에 단 하루, 그 새가 죽는 날이다”라는 독백이 끝난 후, 자비에르 쿠가 오케스트라(Xavier Cugat and His orchestra)가 연주하는 〈마리아 엘레나(Maria Elena)〉에 맞춰 몸을 흔들던 장국영[張國榮, 장궈룽, Leslie Cheung 1956~2003]이 이찬실 씨 내면의 또 다른 자아인 양 등장하여 이찬실 씨와 대화를 나눈다.)

딴은 그러하였다. 이찬실 씨는 모두가 자기를 한심한 듯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 속에서 저지르는 자잘한 실수, 시집 못가고 애도 못 낳아보았다는 유언 무언의 한탄을 되풀이한다. 그러다보니 이찬실 씨는 이런 저런 사람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의 속셈 속에서는 지워져가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박대표 같은 사람 말이다. 카페 〈221B〉에서 만났을 때 박대표는 이찬실 씨를 한국 영화계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는 《뒷산에 살리라》를 시작할 때 즉 지감독이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찬실 씨를 한보[한국영화계의 보배]라고 추켜올려주는 사람이었다. 이찬실 씨의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박대표는 이리하여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풍경의 일부가 되고 만다.

박대표에게 이찬실 씨는 지워져가는 사람이기도 하였지만 소통이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는데, 책임의 51이 박대표에게 있는 것이었다고 할 만한 것이지만 이찬실 씨에게도 49 만큼의 책임은 있는 것이었던 듯하다. 이찬실 씨는 할머니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데도 실패하고, 해질녘 공원에 앉아 아버지가 보낸 위로의 편지를 되짚으며 지감독표 영화의 제작자로서 자기가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곱씹기도 한다. 은근슬쩍 마련한 술자리에서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 小津安次郞 1903~1963]의 《동경 이야기[東京物語, 1953]》를 심심한 영화라고 평가하는 김영 씨의 영화관을 꽤 격렬하게 비판하다가, 김영 씨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Johnathan James Nolan 1970~ ]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데 이르러서는 경멸을 감추지 못하기에 이르지만, 둘 다 장국영을 좋아했었다는 것을 타협점으로 간신히 관계를 봉합한다.

이찬실 씨는 집주인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배움을 돕게 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이찬실 씨는 집주인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배움을 돕게 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풍경의 일부 같았던 사람이 이찬실 씨에게 손을 내민다. 그저 이찬실 씨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할머닌 닭을 요리해서 이찬실 씨에게 먹인다. 닭 요리를 혼자 먹다가 이찬실 씨는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배움을 돕게 된다. 이찬실 씨가 영화 하는 사람임을 알게 된 할머니는 이찬실 씨에게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이 쓰던 가운데 방에 있는 물건들을 가져다 써도 좋다고 말해 준다. 영화를 무지 좋아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의 방이었기에 영화에 관련된 물건들로 가득 찬 가운데 방을 둘러보며, 이찬실 씨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아 성찰에 꽂힌 이찬실 씨는 네티즌의 악플에 마음 아파하는 소피에게도 자아 성찰이 부족하다는 훈계를 날린다. 불어 교습을 받을 때에도 “저는 불어를 잘 못합니다.” “저는 연기를 잘 못합니다,” “저는 머리가 없습니다.” 라는 문장을 써 보는 소피에게 깊은 자아 성찰이 부족하다는 훈계는 불필요한 것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산책하러 효창공원에 가는 김에 김영 씨와 함께하게 된 이찬실 씨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를 생각해 보고자 산책을 하는 것이라고 김영 씨에게 말한다. 그렇지만 정작 한 짓이라고는, 보호본능을 자극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기가 얼어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리거나, “나이가 몇 살이에요?” “결혼은 했어요?” 따위의 질문을 해서 김영 씨의 나이를 알아내고는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 차이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속으로 되뇌거나, “영이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요?” 같은 답하기 민망한 질문을 김영 씨에게 던지는 등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추파를 던져보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지금 여기의 관객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지만, 효창공원이 1950년대의 공원문화의 흔적이 박제되다시피 한 곳임을 아는 사람이나, 이 효창공원 산책 씬에서 잠깐 배경에 깔린 음악에서 이장호의 영화 《별들의 고향[Heavenly Homecoming to Stars, 1974]》이나 김호선의 영화 《겨울여자[1977]》을 떠올릴 수 있는 경험을 가진 관객이라면, 이찬실 씨라는 극중 인물에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집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이 보기에는, 더구나 김영 씨가 겪기에는, 손발이 오그라들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나서, 도리어 원기백배한 채 귀가한 이찬실 씨는 할머니와 마주앉아 콩나물을 다듬는다. “제가 하고 싶다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구요.” “나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이 아무 것도 읎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어요?” “오늘 허구 싶은 일만 허믄서 살어. 대신 애써서 해.”

뜬금없이 용기백배한 이찬실 씨는 김영 씨에게 직진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른다. 이찬실 씨는 자기 마음으로부터도 잘 될 꺼라는 확신을 끌어내고, ‘근심을 피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답게 어제의 걱정에 붙잡혀 있다는 게 뭐냐는 태도를 소피(慅避)가 보이는 것을 보고 다시 용기를 얻어서, 도시락을 싸들고 김영 씨를 찾아간다. “영화 안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영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이찬실 씨는 김영 씨를 그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뒤에서 포옹하는 성추행을 저지른다. “누가 내 쫌 위로해주면 좋겠나봐요.” 이찬실 씨는 성인지감수성이 바닥이라는 비난을 증폭할 수도 있는 변명을 주절거린다. “저는 피디님을 좋은 누나라고 생각해요.” “제가 잠시 미쳤었나봐요.” 이찬실 씨는 도시락 보자기를 떨어뜨렸다가 주섬주섬 수습하며 도망쳐,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귀가한다.

이제 이찬실 씨의 마음 속에서는 여러 자기 암시와 자위와 다짐이 교차한다. 이찬실 씨는 ‘좋은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다’, ‘나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며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가사도우미 일을 잠시 나가지 않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영화 잡지와 영화 DVD, 영화 CD 등을 묶어 내놓는 이찬실 씨를 본 할머니는 말한다. “안고 쥐고 있으면 뭐해. 버려야지 또 채워지지.” 이찬실 씨는 마음 속으로 울었고, 그가 묶어 내놓은 것들은 이제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얼어 죽기 직전에 둘이 맞잡고 방에 들여놓은 덕에 다시 살아나 꽃을 피우고 있는 화분을 옆에 두고, 이찬실 씨는 할머니의 시 쓰기 숙제를 도와주게 된다.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 오 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 이렇게 할머니가 공책에 써 놓은 시를, 보자마자 다 이해했음에도, 이찬실 씨는 묻는다. “음 할머니 이게 모에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잖아요 ……”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할머니는 또박또박 읽어주고, 이찬실씨는 눈물을 쏟는다. 흘려보낸 시간들이 갑자기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던 것일까? 아니면 아직 닿아보지 못한 궁극의 경지가 가까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마치 모든 것을 다 겪은 듯 예술가로서의 여정을 결산하려했던 자신의 무지와 오만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할머니가 잠든 깊은 밤, 이찬실 씨는 묶어 내놓았던 것들을 다시 방안으로 들여서 마음 속의 또 다른 자기와 함께 정돈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년 11월 재개봉 포스터,.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년 11월 재개봉 포스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불어 시를 번역해 읊어주는 후배 김영 씨와 따뜻한 햇살을 즐기던 소피 옆에서 이찬실 씨는 무덤덤하게 가사일에 열중한다. 소피는 이찬실 씨가 좋은 시를 듣지 못했을까 조금 아쉬워하지만 그보다는 후배 김영 씨와 언니 이찬실 씨의 집을 방문하는 일을 성사시키는 데 집중한다. 그 와중에 소피는, 후배 김영 씨가 이찬실 씨를 누나라고 부르며 선배라고 부르는 자신보다는 누나라고 부르는 이찬실 씨와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은근히 기정사실화해준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겨울밤, 소피와 김영 씨 그리고 제작부 세 사람은 전구가 타버려서 실내조명이 꺼진 이찬실 씨의 방을 방문하고, 그들 여섯 명은 전구를 구하기 위해 겨울밤 산길을 함께 걷게 된다. “언니 …… 오늘은 정말 달에게 맹세하고픈 깊고 깊은 겨울밤이야.” “맹세는 하지 마라. 달도 변하는데 뭔들 안 변한다꼬 ……” “먼저 가라. 내 비촤주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걷다보니 이찬실 씨는 뒤에서 일행의 앞길을 비춰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밤길을 앞서 걷는 이웃들을 보며 이찬실 씨는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를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본다. 이찬실 씨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 쌓인 눈으로 온통 빛나는 세상으로 나서는 자기 자신을 상상한다.

영화 속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소중하거나 믿음직한 사람이었다가 점차 이찬실 씨의 삶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의 일부분으로 스며들어가버린다.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떠남이 영화적 동지 지감독을 풍경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버린다. 박대표는 스스로 아주 씩씩하게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경우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찬실 씨가 박대표를 냉큼 풍경 속에 던져 넣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제작부 세 사람은, 도저히 풍경 속에 놓아둘 수 없는, 엄연한 이웃이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찬실 씨는 소피가 이미 자신의 이웃이 된 지 오래 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소피는 후배 김영 씨를 이찬실 씨의 중요한 이웃으로 맺어주기도 하였다. 그저 이찬실 씨의 삶의 궤적 주변에서 스쳐가는 풍경의 일부였을 수도 있는 할머니는 이찬실 씨의 삶의 중심으로 스며들어 가장 중요한 이웃이 된 듯하다. 영화가 시작될 때, 이찬실 씨의 이웃은 누구인지 다소 불분명하였었다. 그의 삶의 배경이 되는 풍경과 삶의 현장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가 끝날 때 이찬실 씨는 비교적 확실한 이웃을 적어도 여섯 사람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 이웃들은 비장한 결의나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하여 이웃이 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들은 아주 작은 이끌림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였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가까이에서 이찬실 씨의 편이 되어주게 되었던 것 아닐까? “우리편들덕부내참좋은상받었어요우리편들채고야채고야사랑합니다” 2021년 대한민국 마케팅 대상 파워 인플루언서 부문을 수상한 박막례 씨가 그의 유튜브 커뮤니티에 올린 인사 글이다. 그는 ‘팬(fan)’을 꼬박꼬박 ‘편’이라고 말하여왔고 이 인사 글에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영화 속 사람들이 이찬실 씨의 이웃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박막례 씨가 즐겨 사용한 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사람이 없지 않을 듯하다.

“이들의 이웃됨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이 영화와 관련하여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찬실 씨는 영화 시작부터 중반까지 끊임없이 뭔가를 평가하거나, 정의하거나,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거나 오만을 인정한다. 이러한 자각과 인정 덕분에 그의 이웃은 하나 둘 늘어난 것 아닐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을 차갑고 메마르게 경계하는 사람에서 이끌림에 그냥 이끌려 가보는 사람으로 변해간 것 아닐까? 극장의 편한 의자가 무색하게 정색을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보면 뻔한 내용의 연속일 수도 있을 이 영화는, 이찬실 씨처럼 이끌려가는 태도로 극장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상태에서 보면 좋은 의미에서 꽤나 펀(fun)하고 쿨(cool)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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