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buy) 인생에서 사는(live) 인생으로 – 『적을수록 풍요롭다』를 읽고

자본주의와 성장이라는 현대의 교리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자 절대적 진리처럼 여겨진다.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의문도 품어선 안 되며, 여기에 대한 의심은 금기시 되어 왔다. 책 『적을수록 풍요롭다』를 통해 이 견고한 믿음을 깨부수고 새로운 삶을 상상할 것을 촉구한다.

새로워진 이라는 단어

우리는 지금까지 돈을 벌기 위해서 임금 노동을 하고 집에서는 소비로 삶을 채우는 형태가 전부인 것처럼 보고 자랐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삶꼴이라고는 어떤 기업에 들어가, 어떤 일을 하며 돈을 벌다가, 어떤 것을 구매해서 삶을 충당할 것인가가 전부였다. 그것이 당연히 ‘삶’인 줄 알았고 ‘당연한 삶’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떠한 계기로 이러한 믿음이 깨졌다. 한 강연 영상을 통해 처음으로 ‘생태적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생태적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소비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었다. 소비가 지구를 파괴한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때부터 ‘생태’와 ‘자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행동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사실 어린 시절에만 해도 지구온난화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자본주의적 삶에 물들어 너무 오래 잊고 지냈다. 마침 그 무렵부터 건강을 위해 채식과 자연식 위주로 식습관을 바꾸게 되었고, 여러 다큐멘터리를 접하며 마침내 비건을 지향하게 되었다.

비건을 시작한 이후, 모든 식사 준비와 요리를 직접 하게 되면서 나는 삶에 대해서도 다시 느끼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그전까지 식사 준비에 드는 노동은 모두 외부에 의존하며 지냈었다. 어머니가 다 차려 놓으신 밥을 얻어먹었고, 때로는 외식과 배달 음식, 가공식품으로 해결해 왔다. 내가 할 일은 밥을 차리는 일이 아니라 책상 앞에 앉아 실생활에는 쓰이지 않는 수학공식을 계산하는 일이거나 모니터 앞에 앉아 사무를 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식사는 그저 어디선가 제공되어 오는 것이었지, 삶의 중심 활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리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식사가 곧 삶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식사와 식사 준비로 대변되는 일에는 지금까지 나의 눈에 보이지 않던 청소, 빨래 등 주로 어머니가 도맡아 해왔던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이었다. 회사에 출근해 자본가를 배부르게 할 뿐인 노동에 내 시간을 헌납하고 집에 돌아와 겨우 기력을 충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나를 잘 먹이고, 잘 살피고, 잘 돌보는 것이 다시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급 구조를 회복하는 것이 해방의 열쇠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확장되어 결론적으로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발적 소박함과 생명의 중요성, 사유 대신 커먼즈의 회복을 통한 공유, 자급적 생활양식 등으로 나아갈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적을수록 풍요롭다』, 제이슨 히켈 저, 김현우·민정희 옮김(창비, 2021)

삶의 길에 전환점이 생기면서 읽는 책 또한 생태와 사회적 경제,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들로 바뀌게 되었다. 제이슨 히켈이 쓴 『적을수록 풍요롭다』(창비, 2021)의 제목은 이미 생태적 선구자로 유명한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을수록 아름답다’라는 책의 정신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Less is more’라는 역설적 어구를 통해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양적/물질적 풍요대신, 질적/정신적 풍요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 것이리라 짐작해 볼 수 있는 제목이다.

이 책을 펼쳐보기 전, 제목만을 접했을 때는 그저 탈성장에 대해 논하는 대안 경제학 서적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지구를 대하는 사고방식에서부터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의 탈생명화, 탈신비화가 작금의 사태를 불러왔다는 전체론적 관점으로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히 탈성장에 대한 책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애니미즘’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애니미즘의 시각으로 세계를 동적인 공간으로 바라보는 것, 앞으로의 지구에 그러한 관점이 없다면 핵심이 빠진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단순히 성장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식의 현상적 진단만을 하려 들지 않고, ‘현대 사회의 세계관’이라는 문제의 근본부터 파고든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죽은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시 세계를 (re-)animate, 즉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요지다. 저자는 이에 입각해 상당히 희망찬 어조로 바람직한 미래를 엿보여준다. 동시에 전체론적인 관점으로 현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총체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고 차분하게 짚어낸다. 저자의 메시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역사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전개된다. 자본주의가 몰살시켜온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직시한다.

자본주의가 죽여온 것들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많은 것들을 죽여야만 가능했다. 우선 자본주의는 세계로부터 생명을 빼앗아 갔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고, 세계를 ‘인간과 그 나머지’로 구분 지었다. 성장을 위해서 생명의 가치는 가차 없이 절하되었다. 자본주의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확장하기 위해 세계를 모조리 죽은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세계가 살아있다는 관점은, 성장을 위한 착취에 반발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이러한 기득권층의 요구에 걸맞은 철학 사상이 등장했다. 르네 데카르트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기계론적 환원주의는 지구를 유기체로서 인정하는 대신 그저 원자와 분자의 합으로 취급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예컨대 인간만이, 정확히는 인간의 이성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이며 지구상의 육신과 물질은 별 볼일 없는 덩어리라는 것이다. 환원론적 관점에서는 모든 물질과 신체가 그 고유성과 내재적 가치를 잃어버린다. 결국 분해하면 똑같은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A를 분해해 재조립하면 B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물질은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변한다. 자연스럽게 생명 세계는 분해하고 조립하면 그만인 기계로 폄하된다. 세계는 이제 성장이라는 정언명령 앞에 조신하게 무릎 꿇고 파헤쳐지기만을 기다리는 대상이 되었다.

원래 인류가 보기에 자연의 모든 것은 신성했다.
사진: Simon Wilkes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종교적이다. 인간은 어떠한 믿음에 따라서 행동한다. 자본이 신처럼 모셔지고, 경제 성장이 일종의 교리처럼 작동하기 전까지 인간은 ‘애니미즘’이라는 존재 양식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어왔다. 원래 인류가 보기에 자연의 모든 것은 신성했다. 그들 모두에게는 영혼이 있었고, 물질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신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일상 세계 속에 내재해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자연은 살아있는 존재였으며 우리들의 가족이었다. 따라서 자연은 조심스럽게 대해져야 했다. 땅에게서 무언가를 얻어왔다면 무언가를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항상 자연에게 경의를 표해왔다. 그러한 세계관에서 일방적인 착취란 있을 수 없었다. 지금도 아마존 유역 등지에서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비인간 존재를 친척으로 생각하며 상호작용한다. ‘애니미즘’적 존재 양식이란 만물에 내재한 그 고유성과 신비성, 성스러움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자본주의가 명령하는 것과 대치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토착민들의 믿음까지 말살시킬 필요가 있었다. 오랜 시간 땅에 뿌리내리고 땅과 깊이 연결되어 살아왔던 대부분의 농민들은 땅을 살아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그러한 믿음은 자원을 추출하는 과정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인류가 해왔던 것처럼 생태계의 시간을 존중하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은 자본주의의 입장에선 소위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다. 자본은 토착민이 가지고 있던 땅과의 호혜성, 그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그렇게 인간은 점점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갔다.

삶의 질식사

난도질당한 것은 다만 인간의 존재양식이나 신념뿐만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선 인간 그 자체 역시도 살육의 대상이었다.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민중을 짓밟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자본 안에는 민주성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그 둘의 동행이란 단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자본주의란 봉건제 이후 회복된 평등, 커먼즈,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기득권층이 원하는 것은 이익의 독점이지, 이익의 공유가 아니었다. 반면 민주주의는 이익의 공유를 위한 시스템이다. 농민들의 자율 아래 민주적으로 운영되던 사회는 결국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농민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농민들의 반발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농민 반란은 10만 농민 대학살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자연으로의 접근성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만들어진 가난과 빈곤에 시달려야만 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평민들은 식량 생산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에 허덕이며 지속적으로 살해당해야만 했다. 19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인도에서만 3천만 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식민지의 등에 업혀 기생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확장될 수 없었다. 사진: British Library

당시 식민지 개척에 힘을 쓰고 있던 유럽은 아직까지 애니미즘의 정신에 입각해 살아가고 있던 원주민들 역시도 무참하게 죽여 나갔다. 유럽인이 보기에 원주민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무엇, 혹은 생명 이외의 무엇이었다. 자본주의의 확장을 위해서는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자본주의의 기반은 폭력과 식민화다. 식민지의 등에 업혀 기생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확장될 수 없었다.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유럽인들과 조우한 원주민들은 존재를 부정당했다. 그들을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대학살이 펼쳐졌고, 그들의 육신은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학대와 착취 속에서 시들어간 목숨의 수는 지구를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인클로저 운동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과 노동을 죽은 것으로 대체했다. 자급 노동을 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자급 노동 대신 임금 노동에 강제되어야만 했다. 자급자족 경제의 파괴는 대량의 노동자와 소비자 관계를 양산했다. 소비자는 생계에 필요한 의식주를 전부 자본에 의존해야만 하는 삶으로, 이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형태였다. 이제 평민들은 자본 앞에서 자주권을 잃어버렸다. 자본에 삶을 위탁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원하는 일을 최소한만 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자급 노동과 달리 생계의 위협 아래 이루어진 임금 노동은 개인의 삶을 파괴했다. 강제된 임금 노동으로 인해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힘을 스스로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생계의 원천이 되었던 자연을 잃은 뒤, 인간은 자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고 말았다. 자본에 모든 것을 의존해야 하는 소비자는 결국 자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원치 않는 노동으로 삶을 채우느라 공동체는 파괴되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은 더이상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단순히 노동하는 존재로 치환되었다. 인간의 신체는 생산성을 위해 갈아 넣어졌다. 자본주의의 원칙인 가성비의 계산 앞에선 인간도 장사 없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극대화 되었다. 나태함은 죄악이며 이윤추구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의 교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봉된다. 삶이 목적이었던 노동과 달리 노동과 이윤 창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죽은 노동은 영혼을 질식시킨다. 생산성이 점점 더 높아지면 질수록,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했으나 오히려 생산 기계와의 대결에서 지지 않으려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세운다. 근대 자본주의나 현대 자본주의나 인간은 노예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다만 근대에는 외부에 감시관이 있었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 자신이 곧 감독관이자 노동자다.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경제 성장의 정언명령에 이끌려, 다른 삶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소비는 원치 않는 노예 노동에 스스로를 더욱 속박시킨다. 그러나 현대인은 소비자의 선택권이 진정한 자유라고 착각한다. 소비하는 삶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박탈해 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Life의 복원

자본주의는 세상을 죽은 것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생명으로 풍요로웠던 지구는 점차 그 생기를 잃고 죽음의 행성이 되어가고 있다. 삶을 살면서 살아있는 것을 마주할 기회조차 사라지고 있다.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자각 역시 잊고 있다. 우리는 유기체의 원리로 정동하는 세계를 그저 무기체로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기계의 시스템과 기계의 시간에 맞춰 기계 속에 파묻힌 채 기계처럼 살아간다. 자연은 그저 배경이고, 접하는 생명이라곤 전부 인간의 입맛과 의도에 맞춰 길들여진 것들뿐이다. 인간은 자연을 버리고 땅을 떠난 대가로 많은 것을 잃었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작금의 행태를 전부 진보라고 여기며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근대 과학 문명의 이기는 권력의 이기심이 결국 공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 자본주의가 실패했다는 증거는 너무나도 많다. 생태적 한계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자본 앞에서 무력하게 짓밟히고 있다. 자본은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다. 세상에 내던져진 99%의 인간 생명체들은 1%의 자본가를 위해 희생당한다. 자본은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 모두를 양산했다. 절대적 빈곤에 처한 사람들은 만들어진 가난으로 인해 삶의 절대적 조건을 보장받지 못한다. 여기에 상대적 빈곤은 자본주의 사회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는 1%에게도 예외가 없다. 모두의 정신은 자본 앞에서 한 없이 궁핍해진다. 삶은 전쟁터로 변하고 그 어느 때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인 야만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음은 이미 모두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본다.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우리의 문제는 지난 500년 간 인류를 세뇌시켜온 인간-자연, 정신-물질, 우와 열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해 다시 세계를 살아있는 것, 역동적인 것, 신성한 것으로 바라보아야만 해결할 수 있다. 인간사회와 생태계의 위기를 동시에 불러일으킨 것은 우리가 세계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죽은 기계와 물질 덩어리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이익 추구와 탐욕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현대의 절대적 믿음은 이미 정신분열적 사회 문제 현상들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Humus, 대지로부터 온 인간(human)은 다시 대지로 돌아가야만 한다. 애니미즘이야말로 인간 본성에 가까우며, 우리가 앞으로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정신이다.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만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조윤지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을 소명으로 삼아, 천혜의 자연에 따른 마을 공동체로 이루어진 평화로운 지구가 도래하는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농반어로 바다밭과 땅밭을 모두 가꾸는 농사꾼 인어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궁극적으로 생태아나키즘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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