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나, 존재의 얽힘에 대하여 – 〈명신손님과 철현이(손님굿)〉 독후기

20세기 말 천연두는 더이상 위협적인 전염병이 아니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옛사람들이 천연두의 유행에 대처하기 위하여 행하던 마마배송굿도 소멸 중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굿은 적대적인 존재를 향한 환대를 보여주었다. 그런 환대는 코비드19의 유행을 겪고 난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마마배송굿의 일부인 〈명신손님과 철현이(손님굿)〉를 읽어보았다.

천연두라는 손님

천연두는 1979년에 사라진 것으로 공표된 전염병이다. 인류는 종두법을 기원으로 하는 예방접종을 널리 시행함으로써 천연두를 극복한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이 전염병은 인류를 위협했다. 조선에서도 천연두의 유행은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인지 호환마마(虎患媽媽)라는 말이 쓰였다. 이 말은 호환 즉 호랑이가 나타나서 사람을 해치는 일과 마마 즉 천연두의 유행이 재난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조선에서 천연두가 유행하면 마을 하나가 사라져버리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사정은 천연두에 대응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굿인 마마배송굿이 한 집안 차원을 넘어 마을 단위로 행하여진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천연두[마마] 전염 통제가 대단히 어려웠으므로, 천연두를 신격으로 여기면서, 찾아온 천연두 신을 잘 모시고 잘 보내드리는[배송] 의례행위 즉 굿을 하여 천연두를 극복해보려고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창호는 마마배송굿을 “천연두에 걸린 뒤 13일째 되는 날 마마신을 공손하게 돌려보내며 행하는 굿”1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마마배송굿은 집안 차원의 굿 같아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상황을 생각하여보면 한 집안에서 천연두가 유행하면 곧 그 집안이 있는 마을 전체에 천연두가 퍼져나갔을 것이다. 21세기에도 한 가족에게 국한시켜 역병의 유행을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니, 19세기 이전에 천연두 유행을 한 집안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였을 것 같다. 어떤 부유한 집안에서 마마배송굿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마을 전체의 관심사였을 것이고, 굿을 하는 집안도 그런 사정을 헤아리며 굿판을 벌였을 것 같다.

적대와 환대가 엇갈리는 손님굿 무가

천연두를 ‘손님’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재난을 피해 혹은 공포로만 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얽혀있는 듯하다. 사진출처: Alexandr Gerdt

천연두신은 별상2·별성·호구신·호구별성·마마님·강남대한국마마님·손님·명신손님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굿에서 천연두신 기원을 노래할 때 그 신이 외국에서 왔다고 하였으므로 손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이지만, 이 이름에는 재난을 피해 혹은 공포로만 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얽혀있는 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손 없는 날’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손(損)은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사람에게 해코지한다는 악귀 또는 악신3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님’자가 붙어 만들어진 ‘손님’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저항 없이 쓰이고 있다. 오늘날 손님은, 낯설든 구면이든, 나의 존재영역 내지 생활공간에 끼어든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손님이란 말은, 환대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적대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예전에 사람들은 마마배송굿을 손님굿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니, 그 이름만 두고 보면, 그들에게도 마마는 위협적 전염병임에도 경계나 적대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평면적 존재는 아니었던 듯하다.

마마배송굿에는 ‘호구본풀이’가 포함되어있다. 이는 ‘호구노정기(戶口路程記)’라 하기도 하고 ‘손님굿 무가’라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노래를 통해 호구신의 유래와 성격 등이 밝혀지면서, 호구신을 잘 모시고 잘 보내드리는 마마배송굿이 연행되는 이유가 굿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진다.4 박경신은 각 지역에서 다양하게 부르는 호구본풀이의 내용을 김동언 구연본을 중심으로 요약 정리하여 《동해안별신굿무가(제2권)》에 실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세존손님, 호반손님, 각시손님이라는 세 손님[명신손님]5신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온다. 압록강 강가에 이른 손님들은 사공을 불러 배를 빌려 달라고 한다. 사공은 손님네의 청을 거절하면서 각시손님이 타고 있는 가마 문을 열어 보고는 하룻밤 수청 들면 건네주겠다고 한다. 화가 난 손님들은 사공의 목을 쳐 죽이고 사공의 일곱 아들도 천연두에 걸리게 해서 모두 죽이려고 한다. 그렇지만 사공의 아내가 손님네에게 마지막 한 아들만은 살려 줄 것을 간절히 빌어 막내아들은 살려 준다. 손님네는 스스로 배를 만들어 타고 압록강을 건너 서울 김 장자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김 장자에게 박대를 당한 반면, 김 장자의 삼대독자 철현이의 유모로 방아 품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구할머니에게 갔더니 할머니는 손님네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할머니는 급히 김 장자의 집으로 가서 벼 한 말을 빌려 달라고 한다. 김 장자 부인의 도움으로 겨우 벼 한 말을 빌린 할머니는 그것으로 죽을 쑤어 손님네를 대접한다. 노구할머니의 정성에 감동한 손님네는 할머니의 손자나 손녀를 데려오면 천연두를 가볍게 앓게 해 주겠다고 제안하는데, 할머니는 자신이 기른 철현이에게 손님을 잘 시켜 달라고 한다. 손님네가 할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할머니는 김 장자를 찾아가 철현이에게 천연두를 가볍게 앓게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김 장자는 화를 내며 손님네를 모욕한다. 손님네는 할머니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를 데려오라 하여 가볍게 천연두를 앓게 하고 회복시켜 준다. 노구할머니가 외손녀를 위하여 손님배송굿(천연두신을 떠나보낼 때에 하는 무당굿)을 하는 것을 본 김 장자가 또다시 손님네를 모욕하자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한다. 김 장자는 집으로 돌아와 철현이를 깊은 산속에 있는 유점사로 피신시키라고 한다. 손님네들은 김 장자를 혼내 주기로 작정하고 각시손님이 철현이 어머니로 변신하여 유점사로 가서 철현이를 부른다. 영문을 모르는 철현이는 각시손님을 어머니로만 알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철현이는 대문을 넘어서자마자 천연두에 걸려 고통으로 울부짖는다. 철현이가 거의 죽게 되자 김 장자는 어쩔 수 없이 손님네에게 건성으로나마 빌고, 이를 불쌍히 여긴 손님네는 철현이의 증세를 가볍게 해 준다. 그러나 아들이 약간 낫는 기미를 보이자 미련한 김 장자는 다시금 손님네를 모욕하고 이에 몹시 화가 난 손님네는 철현이를 죽게 만든다. 철현이는 죽어서 손님네의 마부가 되었다. 한양의 정승댁을 찾아간 손님네는 그 집의 아들 삼 형제에게 손님을 시켜 주고 극진한 대접을 받은 후 다시 노구할머니를 찾아온다. 그 사이에 노구할머니는 손님네를 잘 대접해 준 덕분에 큰 부자가 되어 잘살고 있었고 반대로 철현이네 집은 거지가 되어 빌어먹고 살고 있었다. 철현이 어머니의 형상을 불쌍히 여긴 손님네가 그 재물들을 되찾아 주니 철현이 아버지도 마음을 고쳐먹고 착한 사람이 되었으며 작은부인을 얻어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6

환대의 확장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선 손님을 적대하는 사람들과 손님을 환대하는 사람 사이의 대비가 확연함을 알 수 있다. 신동흔도 이러한 점에 주목하였다. 코비드19의 유행이 어느 정도 잦아들어 가기 시작하던 시기인 2021년에 쓴 글에서, 신동흔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화의 핵심 화두는 이들 무서운 불청객 전염병 신들을 어떻게 맞이할까의 문제다. 이에 대해 신화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을 서사화한다. 하나는 이를 경시해서 넘보거나 물리적으로 막아서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스스로 물러가게 하는 방식이다. 그 대응 여하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지거니와, 그 일련의 형상에서 코로나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대응을 보게 된다.”7

코로나이건 천연두이건, 전염병을 경시한다는 것은 그 전염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 취하게 되는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전염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천연두의 경우를 보면 이해하였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천연두는 1979년에 사라진 것으로 공표된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류가 천연두에 대응한 방식은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예방접종은 미리 천연두를 가볍게 앓아서 몸속에 천연두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하는 방식의 대처이다. 이것은 이해하는 것도 벽을 쌓는 것도 아니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일단 전염병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대응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전염병을 견디게 하여주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스스로 물러가게 하는 방식이라고 단언하기에는 다소 주저되지만, 결코 경시해서 넘보거나 물리적으로 막아서는 방식은 아니다.

뱃사공은 강을 건너고자 하는 손님들에게 각시손님의 수청을 대가로 요구한다. 이에 각시손님은 뱃사공의 목을 벤 뒤 그 집에 찾아가 자식 칠형제를 차례로 잡아 죽이려다가 뱃사공 아내의 간청으로 막내는 살려줬지만 여러 가지 장애를 안겨준다. 김 장자는 여러 차례 손님들을 무시하고 제압하려 하였으나 거듭 실패하고 점점 더 나쁜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아들 철현이의 죽음도 막을 수 없었다.

모든 타자들은 나와 연결되어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면서도 무엇이 될지 모르는 존재들의 얽힘. 이것이 나와 타자들의 관계인 것이다. 사진 출처: Kier in Sight Archives

뱃사공의 행태는 타자를 도구화하려다가 강력한 역작용을 당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김 장자가 한 일에 대해서, 신동흔은 “오만에 기초한 얕은 술수와 허튼 미봉책”8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21세기의 인류의 코비드19 초기 대응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명이다. 간단한 예방도구인 마스크의 사용을 둘러싸고 사람들과 권력들의 보인 행태를 돌아보면, 장기적인 전망이나 세계의 복잡한 연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만’이라는 평가도 의미 있어 보인다. 코비드19 유행과정을 되돌아보면, 자신 있게 의견을 제시한 경우들 가운데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진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경우가, 자신 있게 제시된 때문인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백신의 효능에 관한 회의는 접어두더라도, 유행 초기에 국제 기구가 마스크 사용이 불필요하다고 공언하여 이를 믿은 국가들의 방역을 혼선에 빠뜨린 것이나, 비타민C와 같은 특정 약품의 효과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이를 따른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감염을 적시에 피하지 못하게 한 경우가 그 예라 하겠다. 그것들은 선의와 공익에 기반한 것이라 할지라도 동시에 지적인 자기과신 즉 오만 그리고 그에 대한 맹신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구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손님들을 대접한다. 이 대접은 굿판을 벌려서 이웃 사람들과 함께 신을 달래서 기꺼운 마음으로 떠나도록 하는 것, 즉 배송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대응에 대하여 신동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염병이 찾아든 상황에서 최대한의 겸손과 정성으로 이를 감당하고 풀어나가는 모습이다. 그러자 전화위복의 역전이 일어난다. 그 정성 앞에 불청객은 스스로 물러나면서 노구할미 집에 큰 복을 남긴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큰 위기를 잘 이겨내면 그것은 삶의 힘이 된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일이다. ‘현실 부정’은 답이 아니다.”9 겸손과 정성은 환대와 함께 하는 것 같다. 이것들은 타자를 인정해야 가능한 것 같다. 인정에는 타자를 모른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 포함될 것 같다. 타자를 대할 때, 나의 경험과 방식에 의거할 수밖에 없기는 하나, 타자를 모른다는 것을 자인한 상태에서 타자를 대한다면, 그 대응도 그만큼 조심스러울 것이다. 한편 타자와 나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겠는데, 일회성도 그 공통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한 번 사라지고나면 나와 같은 것은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존재감은 무(無)에 수렴하기도 하지만, 무엇이 될지 모르는 유일무이의 존재이기에 소중하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타자도 그러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모든 타자들은 나와 연결되어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면서도 무엇이 될지 모르는 존재들의 얽힘. 이것이 나와 타자들의 관계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철현이는 죽어서 손님네의 마부가 되었다”는 것에도 주목할 만하다. 손님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대응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반응들은 칭찬/보상과 비난/처벌이라는 양극 사이 어디쯤에 각각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가혹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모두 상호적일 수밖에 없는 이 반응 가운데 철현이가 손님네의 마부가 ‘되었다’는 것은 손님들과 사람들 사이의 상호성을 확연히 느끼게 하여준다. 아버지 김 장자가 행한 적대가 원인이 되어 철현이가 맞이한 결과가 죽음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계기로 철현이는 생각한 바 없는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팽팽한 상호 적대 속에서도 손님네가 철현이의 존재를 인정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철현이 역시 손님네의 사명에 봉사하는 역할을 스스로 맡음으로써 손님네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신동흔은 철현이의 사후 행보를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손님굿 속에는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아버지 김장자 잘못으로 참혹하게 죽은 철현이가 막내손님이 되어 명신손님들을 따라가는 장면이다. 인간이 질병신으로 바뀌는 장면인데, 인간과 질병의 생명적 연결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면모가 된다. 어찌 철현이뿐일까. 세상의 인간 누구라도 ‘질병의 몸’이 될 수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다. 내 몸에 여러 질병이 있고, 마음에는 더 많은 질병이 넘나든다. 우울과 무기력, 분노와 공격성 등등. 때로 그것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나의 심신을 온통 장악하기도 한다.”10 ‘생로병사’라는 낱말이 있다. 병은 생·로·사와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낱말이다. 신동흔은 철현이가 손님네의 마부가 ‘되었다’는 것이 사람의 삶이 질병과 함께함을 보여준다고 주장한 것 같다. 신동흔은 몸과 마음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상태에서 몸보다 마음에 더 많은 질병이 넘나든다고 본다. 이런 생각은 코비드19의 유행을 직접 겪어 본 결과 강화된 것 같다. 다수의 개인이 감염되고 모든 개인이 감염을 피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인간관계 양상과는 다른 인간관계 양상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신동흔은 전례없는 “오만과 소홀함, 허튼 분노와 무모한 공격”11의 만연을 보았던 듯싶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신동흔은 사람들에게 철현이의 선택과 행보를 보고 ‘인간과 질병의 생명적 연결성’을 상상해볼 것을 권한 듯하다. 신동흔은 “오만과 소홀함, 허튼 분노와 무모한 공격”이 그런 연결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자기가 가장 괴롭다는, 달리 말하자면 ‘나만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느낌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신동흔은 나의 귀한 존재성을 확인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야만 나만 곤경에 처하였다는 식의 유아론적(唯我論的)[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타자도 제대로 인정하게 하여줄 듯하다. 타자를 인정한다면 섣불리 어떤 일회적 존재를 절멸시키거나 훼손시켜서 그 존재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가능성을 없애버려서 세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철현이의 선택과 행보는, 이런 깊은 성찰에 이르게 하는 계기 역할 이전에, 타자와의 연결성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하여준다. 철현이는 자기를 죽게 한 손님들의 길잡이 역할을 스스로 맡았다. 이는, 질병이지만 신이 되어버린 손님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보다 한발 더 나아가, 퍽 많이 다른 양자 간의 경계를 허물고 동행하는 관계 양상의 실제적인 사례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문명은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인 존재를 모르는 타자라 하여 더이상 알려고도 느끼려고도 하지 않고서는 생활이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할 때, 거기에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인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대항해시대에 백인들이 흑인들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한 결과 지금 엄청난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을 아는 이상, 어떤 낯선 존재를 단지 ‘모르는 타자’라고 규정하고 대상화하고 도구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하여 환대를 확장하는 방도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손님굿 무가 속 환대의 여러 양상들은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환대를 확장하는 데 참고가 되어줄 것이다.


  1. [네이버 지식백과] ‘마마배송굿’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 [집필: 김창호(金昌鎬)]

  2. 별상(別上)이라는 이름은 천연두 신의 이름이 아니라 “나라와 집안의 태평과 수복을 도와준다고 믿는 무속신격”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신령은 종래 중국에서 전래된 천연두를 신격화한 호구별성(戶口別星)과 혼동되어 왔으나, 서울 · 경기 지역의 전통적인 무가(巫歌)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1930년대까지도 별상을 모셔 노는 별상거리와 마마신을 모시는 손굿이 이 지역에서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서울 · 경기 지역의 전통무들은 조선왕조에서 사도세자를 위시하여 억울하게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거나 지키지 못한 연산군 · 광해군까지 포함하여 별상신으로 섬긴다. 별상신은 무당의 신당에서 무신도(巫神圖)의 형태로 모셔지는데, 갓에 남철릭이나 홍철릭 또는 곤룡포 등을 입고 반드시 전통(箭筒)을 어깨에 메고 양손에는 청룡도와 등채(채찍)를 들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로써 보아도 별상신이 천연두신과 무관함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별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3. [위키백과] ‘손 없는 날’

  4. [네이버 지식백과] ‘마마배송굿’

  5. 손님굿 무가에 등장하는 여러 손님들을 명신손님이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신손님과 철현이(손님굿)’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참조.

  6. [네이버 지식백과] ‘손님굿무가’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집필: 박경신(朴敬伸)] 여기에도 손님굿 무가를 요약한 글이 〈명신손님과 철현이(손님굿)〉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이 요약이 박경신 요약 정리본보다 무가 속의 세부적 이야기 거리들을 풍부하게 담고있으나, 그만큼 길이가 길어서, 여기에는 소개하지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신손님과 철현이(손님굿)’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7. 신동흔, <질병이라는 신,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하나>, 《한겨레》, 2021-11-01. 신동흔은 이 글에 다음 논문의 주요 내용을 전재(轉載)하였음을 밝혔다. 신동흔, <코로나 위기에 대한 신화적・인문학적 성찰>, 《통일인문학》 제83집,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소, 2020, 167~225쪽.

  8. 신동흔, <질병이라는 신,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하나>

  9. 신동흔, <질병이라는 신,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하나>

  10. 신동흔, <질병이라는 신,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하나>

  11. 신동흔, <질병이라는 신,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하나>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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