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의 과학적 근거와 한계점 –생명의 심층적 이해를 중심으로

살처분의 과학적 근거와 한계점 – 생명의 심층적 이해를 중심으로

현재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확산으로 전국 곳곳에 살처분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참혹한 상황에 대해서 소식과 정보조차도 이제 멀어져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밀집사육, 즉 공장식 축산업에 있다는 점이 분명하지만, 환경을 개선하고 변화시키는 것보다 살처분이 경제적으로 낫다는 생각이 횡행하고 있다. 이 글에서 살처분의 역사와 기원, 그리고 타당성에 대해서 점검하면서, 생명을 위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한다.

거의 해마다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와 같은 가축전염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살처분이 반복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올해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까지 발생하여 사육하던 돼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야생의 멧돼지들까지 도살당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생존을 위하여 가축을 사육하고 이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동물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사회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지금과 같은 가축전염병 발생시마다 진행되는 살처분 방식이 효과가 있는 방식인지 그리고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심층적인 생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살펴본다.

1. 살처분의 기원

먼저 살처분의 기원과 한계를 살펴본다. 가축의 전염병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축의 살처분 정책은 클레멘트 11세 교황의 주치의로 활동한 의사 조반니 마리아 란치시(Lancisi, Giovanni Maria)에 의해 최초로 고안되었다. 그는 전염병에 관심이 많아 말라리아와 인플루엔자를 연구했다.

소는 우역(牛疫) 바이러스에 취약하기 때문에, 한번 감염되면 치사율이 100%에 가깝다. 침입균은 직접 접촉이나 오염된 물을 통해서 전파되며 우역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소떼 중 80% 가량이 폐사되는 심각한 전염병이다.  by Antonio Grosz
소는 우역(牛疫) 바이러스에 취약하기 때문에, 한번 감염되면 치사율이 100%에 가깝다. 침입균은 직접 접촉이나 오염된 물을 통해서 전파되며 우역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소떼 중 80% 가량이 폐사되는 심각한 전염병이다.
출처 : Antonio Grosz

우역(牛疫)은 8,000년 전 아시아에서 처음 발생했다. 우역은 고열이 나고 잇몸에 궤양이 생기다가 약 12일 뒤에 설사를 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특히 소가 이 바이러스에 취약해 감염되면 치사율이 100%에 가깝다. 침입균은 직접 접촉이나 오염된 물을 통해서 전파되며 우역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소떼 중 80% 가량이 폐사되는 심각한 전염병이다. 18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우역이 여러 차례 발생하여 무려 2억 마리 이상의 소들이 죽었고 많은 농부와 그 가족들도 굶어죽었다.

우역의 증상과 전파 양상을 연구한 란치시는 “병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교역을 제한하고, 정기적으로 육류 검역을 실시하고, 병든 가축은 석회를 뿌려 매장하며, 아울러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을 통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 이 방법을 교황의 농장에 적용하여 다른 지역의 농장들보다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란치시는 전염병에 감염된 동물을 치료하는 행위 자체가 병을 전파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역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아프리카 지역과 인근 중동 및 인도대륙을 중심으로 대유행하였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수천 두의 소와 물소류가 떼죽음을 당하는 등 세계적 식량 수급 차원에서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우역에 의한 축산업의 피해로 말미암아 1992년 FAO를 중심으로 지구상에서의 우역 박멸 정책(Global Rinderpest Eradication Program, GREP)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살처분 정책의 기원이 되었던 우역은 2011년 공식적으로 천연두에 이어 인간이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종식시킨 전염병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모든 질병에 살처분 정책이 유효한 것은 아니며, 이미 토착화되었거나 폐사율이 높지 않은 질병을 다루는 데는 살처분이 좋은 방법은 아니다. 우역은 완전히 토착화 되지 않은 질병이었기 때문에 살처분과 백신 정책을 통하여 종식이 가능했지만 구제역과 같이 이미 토착화되었고 폐사율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질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관리를 잘해주면 스스로 치유될 수 있는 질병에 살처분 정책은 그다지 좋은 정책이 아니다.

2. 영국과 유럽의 살처분 정책의 확립 과정

구제역이 처음 발병한 곳은 16세기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였으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농부들은 이 바이러스성 침입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구제역은 매우 전염성이 높지만 감염된 가축은 빠르게 회복되고, 젖소는 젖을 전혀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최대 30%까지 가치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가치 감소는 5%에 불과했다. 농부들도 대체로 구제역은 일상적인 질병으로 모든 소가 일생에 한 번은 앓고 지나가는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생각했다. 그에 비해 부유한 농장주들의 고도의 육종을 거친 값비싼 품종의 소들은 면역력이 약해 일단 구제역에 걸리면 심하게 앓았으며, 죽거나 수태가 늦는 경우 입게 되는 손실 또한 훨씬 컸다. 그에 따라 부유한 농자주들의 값비싼 소들을 지키기 위하여 1892년부터 구제역에 대한 도살이 단행되었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나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구제역은 이미 토착화되어 높은 수준의 면역을 갖추고 있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 이들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감염된 가축들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상태로 구제역은 쉽게 전파 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질병의 유입을 통제하겠다는 영국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럽 각국 정부는 1960년대 초 퍼브라이트 연구소(Pirbright Laboratory)에서는 햄스터의 신장 세포를 이용한 바이러스 배양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저렴한 비용의 백신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고 구제역은 발생률은 저하되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1993년 유럽의 단일 시장인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의 출범을 앞두고 유럽은 서로 상충하는 구제역 통제 정책을 개정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1989년 유럽 경제 공동체는 예방 접종 및 살처분 정책에 비용 편익 분석을 실시했다. 이 분석은 두 가지 정책에 따라 10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발생 건수를 예측한 것이다. 그 결과 도살 정책이 대량 예방 접종보다 장기적으로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에 따라 모든 EU 회원국이 구제역 백신 접종을 중단하고 도살 정책을 채택하고, 백신을 접종한 가축 수입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 비용 편익분석은 구제역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바이러스 혈청형, 축종별, 자연 환경과 같은 많은 부분들이 배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비용 편익분석은 경제적인 측면만 비교했을 뿐 살처분 대상이 되는 가축의 생명처럼 경제적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부분 또한 분석에서 배제되었다.

3. 환원주의적 질병관

현재 가축전염병과 관련하여 방역당국이 행하고 있는 방역정책은 원인 바이러스를 추적하기 위한 역학 조사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가축전염병의 원인이 특정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그 바이러스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었는지 찾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이것은 질병을 어떤 요소로 환원시키는 환원주의적 질병관에 매몰된 결과이다.

거의 해마다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와 같은 가축전염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살처분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생존을 위하여 가축을 사육하고 이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동물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KBS뉴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어떤 병? 주의사항은?' 화면 갈무리
거의 해마다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와 같은 가축전염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살처분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생존을 위하여 가축을 사육하고 이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동물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KBS뉴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어떤 병? 주의사항은?’
화면 갈무리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개념은 ‘생리학적 질병 개념’이라 불리는데, 질병의 근원을 병든 사람 내부와 외부의 자연적 힘의 불균형에서 찾는다. 이 이론은 히포크라테스 학파에 의해 주창되었다. 두 번째 개념은 ‘존재론적 질병관’이라 불리며, 질병을 어떤 실체를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실체는 외부에서 침입하여 몸의 어떤 부분에 국소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두 시각은 ‘시스템 의학적 질병관’과 ‘생의학적 질병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시스템 의학적 질병관은 내부와 외부의 다차원적 시스템들의 균형과 조화가 깨져서 질병이 발생한다는 시각이며, 생의학적 질병관은 세균과 같은 외부 요인이 인체에 침입해 특정 장기에 있는 세포의 기능 혹은 구조를 비정상적으로 변화시켜서 질병을 일으킨다는 시각이다. 이 두 개념은 의학 사상을 번갈아가며 지배해왔지만 1880년대 초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가 세균을 발견함으로써 특정 세균이 특정 질환을 일으킨다는 생의학적 질병관이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의학은 과학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미생물이 유기체에 감염되었다는 것만으로 질병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세균은 지구 생명 진화의 토대였으며 지금도 모든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숙주에 감염된 세균은 소화 흡수, 위장관 발달, 면역계 발달, 감염 예방, 위장관 혈관 형성, 수분 흡수 등 숙주에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 세균에 감염된 동물에 비해 오히려 세균에 감염되지 않은 동물은 생리적 활성이 떨어진다. 무균 상태의 설치류는 정상 설치류보다 33%의 물을 더 마셔야 하고 30%의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 무균 상태의 대장은 정상 세균층이 자리 잡은 대장에 비해 물을 재흡수 하는 능력이 훨씬 떨어진다.

4. 숙주와 기생 생물의 유기적 관계

환경의학을 개척한 뒤보(Rene Dubos)는 숙주와 기생 생물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그 어떤 숙주와 기생 생물 사이에서든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공존 상태가 확립되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 또한 “빠르게 숙주를 죽여버리는 병원체는 그 자신도 위험에 빠져 계속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숙주가 되는 사람과 전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 사이에 오랫동안 상호 교류가 계속되어 몇 세대를 거치고 쌍방 모두 수가 많을 때에는 결국 서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 적응 구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형적인 사례는 호주 토끼의 점액종 바이러스(myxoma virus, MYXV) 변이 연구에서 살펴볼 수 있다. 1859년 영국인에 호주에 들여온 24마리의 유럽토끼(Oryctolagus cuniculus)는 강한 번식력과 생태계에 강력한 천적이 없음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번식하여 호주 전역으로 퍼져나가 1950년에는 6억 마리로 늘어나 토종 야생 동물은 물론 가축들마저 물과 풀을 놓고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야생화한 토끼들이 주변의 풀을 모조리 뜯어 먹은 결과 농경지를 손상시키고 생태계뿐만 아니라 호주의 중요 산업인 양털 생산은 물론 농업까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점액종 바이러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연구실 실험에서 점액종 바이러스는 99.8%의 높은 치사율(Case Fatality Rate, CFR)을 보일 정도로 강한 독성을 지녔다. 1950년에 이를 이용한 토끼 구제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호주 토끼 개체 중 90%를 성공적으로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이러스에 의한 토끼의 치사율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하여, 당초 실험실에서는 99.8%, 야생에서도 90% 이상의 치사율을 보이던 점액종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2년 후에는 약 80%, 그리고 6년 후에는 약 20%로 급감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토끼의 적응뿐만 아니라 바이러스의 변화 또한 유발하여 생긴 결과이다.

한때 폭발적인 번식으로 사회문제가 된 바 있는 호주 토끼는, 점액종 바이러스(myxoma virus, MYXV)를 이용한 대대적인 구제 작업으로 인해 개체 중 90%를 성공적으로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이러스에 의한 토끼의 치사율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하여 불과 6년 만에 20로 줄었다. 병독성과 관련된 많은 돌연변이 변화는 상호간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며 복잡성을 띈다. by Gary Bendig
한때 폭발적인 번식으로 사회문제가 된 바 있는 호주 토끼는, 점액종 바이러스(myxoma virus, MYXV)를 이용한 대대적인 구제 작업으로 인해 개체 중 90%를 성공적으로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이러스에 의한 토끼의 치사율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하여 불과 6년 만에 20%로 줄었다. 병독성과 관련된 많은 돌연변이 변화는 상호간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며 복잡성을 띈다.
출처 : Gary Bendig

숙주는 회피, 저항 및 관용의 세 가지 전략을 사용하여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회피는 감염원에 대한 노출 위험을 줄이고, 저항은 일단 감염이 되면 병원균이 주는 부담을 줄이며, 관용은 병원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감염의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킨다. 전염병이라고 규정하는 병리적 현상과 그것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의 병독성은 단지 바이러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병독성과 관련된 많은 돌연변이 변화는 상호간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며 복잡성을 띈다. 그렇기에 한정된 지역에서 오랜 기간 상호 관계를 맺어온 바이러스와 유기체 간에는 상호 적응에 의해 대량 살상을 유발하는 전염병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5. 전염병의 기원

인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한 것은 약 1만 년 전부터이다. 맥닐William H. McNeill)은 그 원인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정착 농업이 시작되고 인간이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인간의 생활권 내로 끌어들임으로써 가축들에 감염되어 있던 미생물들이 인간에게로 넘어올 수 있는 새로운 다리가 생긴 것이다. 두 번째는 약 2,500년 전 문명 중심지들 간에 접촉이 늘어나면서 질병의 전파와 출현을 위한 새 길이 열려 전염병이 세계를 휩쓸었으며, 세 번째는 유럽인들의 세계 탐험이 늘어나면서 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지역에 살던 토착민들이 외부에서 유입된 전염병들에 희생당한 것이다. 이러한 각 단계의 공통점은 인간에 의해 인간과 미생물 각각의 입장에서 환경이 급변하여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인간에 의해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자연 숙주와 바이러스가 맺고 있던 안정적인 관계가 깨지면서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에 감염되고 그에 따라 심각한 증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by CDC
인간에 의해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자연 숙주와 바이러스가 맺고 있던 안정적인 관계가 깨지면서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에 감염되고 그에 따라 심각한 증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출처 : CDC

대유행으로 대규모의 사망을 유발했던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 같은 질병들은 대부분은 다른 동물 종으로부터 왔다. 두창은 아마 개나 소에서, 출혈열은 설치류나 원숭이에서, 결핵은 소나 새로부터, 감기는 말에서, 에이즈는 아프리카 원숭이에서 전파되었다고 추정된다. 지난 30년 동안 파악된 새로운 인간 질병의 75%가 야생 동물이나 가축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현재 알려진 모든 감염병 중 약 60%가 동물과 인간 사이를 일상적으로 왕래하거나, 최근 들어 그런 감염 경로가 확립된 질병들이다. 많은 전염병들이 가축들에게 있던 바이러스가 사람들에게 감염되면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바이러스는 고유의 숙주에게 질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최근 인류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인 SIV(simian immunodeficiency virus, 유인원 면역결핍 바이러스)는 40종이 넘는 아프리카 원숭이와 유인원에서 자연 감염이 발견될 정도로 다양하고 폭넓게 분포한다. 원숭이 집단에 따라 다르지만 30-70%가 SIV 양성 반응을 나타낸다. 하지만 원숭이들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 또 에볼라 출혈열을 유발하는 에볼라 바이러스는 원래 자연계에서 박쥐를 숙주로 삼았지만 자연 숙주인 박쥐의 체내에서는 특별히 두드러지는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뇌염 증상을 유발하며 수백 명의 사람을 죽게 만들었던 니파 바이러스 감염증의 원인체인 니파 바이러스는 자연 숙주인 동남아시아의 큰과일박쥐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 대규모로 떼를 지어 다니는 ‘나는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이 박쥐들은 대개 여기저기 흩어져 살면서 야생에서 열리는 과일을 먹는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벌목과 농경지 확장이 계속되면서 박쥐의 주거지와 야생 과일을 구할 수 있던 숲들이 사라져버렸다. 큰과일박쥐들은 먹이를 찾아 북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말레이시아 반도의 돼지 농장들 근처 과수원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전파된 바이러스들은 이들의 침입에 대비할 면역계를 지니지 않은 새로운 종들을 공격하여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말레이시아 돼지 산업은 몰락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숙주에 감염된 바이러스는 자연 숙주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안정된 감염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구제역은 면역력이 건강한 경우 성축의 폐사율은 1% 미만이다. 또 야생 조류는 조류인플루엔자의 자연숙주로서 다양한 혈청형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검출되지만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간다. 아프리카에 있는 멧돼지들도 ASF의 자연숙주로서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에 의해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자연 숙주와 바이러스가 맺고 있던 안정적인 관계가 깨지면서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에 감염되고 그에 따라 심각한 증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6. 바이러스에 대한 재인식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공포스럽게 생각하지만 바이러스는 숙주를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앞의 토끼에서 점액종 바이러스의 사례도 그렇지만 파필로마바이러스(papillomavirus)도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을 비롯한 포유류와 공진화해왔다. 파필로마바이러스는 사람의 피부와 점막에서 흔히 발견되는 바이러스로 드물게 사마귀나 암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일상적 소견이나 병리적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생물이 숙주-기생체 관계를 맺는 경우, 기생체의 생존은 숙주를 파괴할 때가 아니라 성장하고 증식하는 데는 충분하지만 숙주를 죽이는 데는 충분하지 않은 정도로 숙주의 자원을 이용하는 균형 상태를 달성할 때 가장 안전하게 보장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감염된 숙주가 빨리 죽더라도 그 전에 새로운 숙주로 옮겨갈 수만 있다면 장기간 성공적으로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과도한 개체수 밀도이다. 인구 밀도가 일정 이상의 한계를 넘어서면,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가 사람 이외의 다른 동물 같은 중간 숙주를 거치지 않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직접 전파됨으로써 이런 전염병이 계속 존속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은 작은 공동체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전염병들은 인구가 충분히 많고 밀집되어 있어야만 지속할 수 있다. 특히 감염시킬 새로운 개체들이 적당한 시기에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홍역이나 그 비슷한 질병들을 일컬어 ‘대중성 질병(crowd disease)’이라고도 한다. 맥닐 교수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감염되는 전염병은 도시가 형성되고 그 인구수가 50만 정도 되면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가축전염병도 마찬가지이다. 가축전염병도 개체수가 과도해지면서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데이비드 베네타(David Benatar)는 “공장식 축산으로 인하여 동물의 집중, 시장에서의 중복된 체류, 인간과의 상호 작용은 시장을 동물 전염성 질병에 알맞게 만든다”고 말한다.

지구상에 바이러스와 세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보편적 존재이다. 해수 1ml에는 10⁷개의 바이러스가 그리고 해양 퇴적물 1g에는 10⁸-10⁹의 바이러스가 있다. 바이러스는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간 게놈 연구에 따르면 인간 DNA의 8%가 온전한 바이러스 게놈이며, 이와 별도로 40-50%가 바이러스 유전자의 조각이다. 평균적으로 사람의 폐에는 174종의 바이러스가 있다. 또 지구의 표면과 내부를 통틀어 지구에는 10²⁹개의 세균이 있다고 추정된다. 그들 대부분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또한 큰 도움을 주는 세균들도 있다. 2012년 실시된 인간 미생물 군집프로젝트(Human Microbiome Project, HMP)에서 메타게놈(metagenome) 염기 서열 분석 결과는 각 인간의 장에는 150종 이상의 세균이 정상적으로 존재하며 우리의 내장 미생물 군집(microbiome)에 약 1,000개의 주요 세균 그룹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이러스나 세균은 지구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하여 질병이 발생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전염병을 이들 바이러스나 세균으로 환원시킨다. 인류에게 전염병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가 동물 집단을 인류 공동체 내로 끌어들였거나 바이러스와 각 자연 숙주의 생존 공간인 열대림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동물과 관련하여 또 다른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조장하고 있다. 그것은 공장식 축산이다.

박종무

지구 생명의 근원은 해님이라고 믿는 생태주의자. 해님의 에너지를 받는 지구 모든 생태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희망한다. 특히 동물들이 생태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픈 동물을 치료하고 동물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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