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경제학 탐색

현대사회에서 경제학적 판단은 모든 정책 결정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은 현재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지속가능할 때에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에 빈번하게 벌어지는 이상기후 현상들은 기존 작동방식의 지속가능성을 의심케 한다. 이런 점을 시각화하기 위해 『도넛 경제학』의 저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도넛 모형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21세기의 경제학은 어떤 모델이어야 하는지 살펴보자.

전후 80년간 경제는 쉼 없이 성장했다. 인류는 영원히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 왔다. 과연 기후변화 시대에도 이 믿음은 지속될 것인가? 
by rupixen
전후 80년간 경제는 쉼 없이 성장했다. 인류는 영원히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 왔다. 과연 기후변화 시대에도 이 믿음은 지속될 것인가?
출처 : rupixen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여러 차례의 국지전 및 경제 위기가 있었지만, 20세기는 인류에게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의미 있는 지표들은 기대 수명과 가처분 소득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50년에는 어느 나라건 신생아의 평균 기대 수명이 48세에 불과했지만, 2010년에는 71세에 이르렀습니다. 1990년 이후에만 하루 소득 1.9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극빈층이 절반 이상 줄었습니다. 20억 명 이상이 처음으로 안전한 식수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영의 결과인 인구 증가는 그 사이에 40%에 달합니다. 1950년에 태어난 사람은 인생 전체를 통해 인류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놀라운 번영의 결과를 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의 번영은 지속된다는 신화의 걸림돌 : 불평등과 기후변화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대다수의 학자들은 인류의 번영이 지속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번영의 속도도 20세기만큼 빠르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인류는 더 많은 (행복에 필요한) 물질을 향유하고 더 오래 살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하면 언젠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사소한(?) 문제들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불평등입니다. 2015년에 5세 이하 아동 600만 명이 사망했는데, 사인의 절반은 설사와 말라리아처럼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아동 300만 명 이상이 복지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빈곤층도 확대 되고 있습니다. 1.9달러 이하의 극빈층이 놀랍게 줄어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2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하루 3달러 이하로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2015년 현재 전 세계 부자의 상위 1퍼센트가 나머지 99퍼센트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류의 문명은 분명히 진보 했으나, 세상은 놀랄 만큼 불평등해졌고, 그만큼 불안정해진 셈입니다. 이런 불평등은 물질적 생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분배의 비효율성일 것이라는 의심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심은 현재의 경제 모델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질문을 낳게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생태적인 한계입니다. 생산의 영역에서 사소해 보였던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무한정 제공할 것 같았던 지구 시스템에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생산은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하고, 더 많은 에너지 수요를 요구합니다. 한계에 다다른 지구 시스템은 과거와는 다른 작동방식을 보여줍니다. 기후변화 문제가 그것입니다. 산업혁명 시대를 기준으로 지구의 평균온도는 이미 1도 이상 상승했고, 2025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심각한 물 부족 지역에서 살게 되고, 2035년경에는 1.5도를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이 추세대로 가면 2100년이 되면 4도나 높아질 것입니다. 이는 인류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홍수, 가뭄, 태풍, 해수면 상승 등의 거대한 기상 이변을 불러올 것입니다. 또한 해양에 대해 착취와 오염이 바다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초과한 듯 보여집니다. 과도한 남획에 따라 바다 어장의 80퍼센트 이상이 고갈될 것으로 예측되며, 1분마다 한 트럭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버려지고 있습니다.

도넛경제학, 21세기 경제학 패러다임을 제안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류경제학과 생태경제학을 둘러싼 논쟁의 지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의 핵심이 되는 지점은 의외로 간단해서,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경제학 모델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괄하고 있는가?

이런 점을 시각화하기 위해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는 도넛 모형을 제시했습니다. 간단하게 보면 이 모형은 문명의 최소 기반과 생태적 한계 사이의 안전한 구역을 표시한 것인데, 이를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생태) 경제학 모델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도넛 모델에 제시한 대로 21세기 경제학은 그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레이워스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탁월한 솜씨를 보여줍니다. 연필만으로 생태 경제학을 묘사한 것처럼, 하나의 표로 20세기와 21세기 경제학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20세기 경제학 21세기 경제학
시장 효율적이므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여 작동하게 할 것 강력한 것이니, 사회와 자연에 지혜롭게 어우러지게 할 것
기업 혁신적이고, 변화에 탄력적이니 주도권을 줄 것 혁신적이고, 유연한 조직이니 목적을 부여할 것
금융 오류를 범하는 법이 없으니, 신뢰할 것 시스템의 한 부문이니, 사회의 목표에 부합하게 할 것
방식 여러 의미를 횡단하고 이행하고 변이함 의미화, 모델화, 표상화
무역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니, 모든 국경을 개방할 것 양날의 칼이니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할 것
국가 무능하고, 변화에 비탄력적이니 경제에 간섭하지 못 하게 할 것 경제 시스템의 유일한 판결자이니, 그에 맞는 역할을 하게 할 것
가계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지 못 하니, 여성들에게 맡겨 둘 것 사회적 가치 창출의 핵심이니, 이들의 기여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할 것
코먼스 비극으로 끝날 것이니 빨리 팔아버릴 것 창조적인 것이니 그 잠재력을 한껏 풀어 둘 것
사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무시할 것 생활의 기초이니 그 안에서 여러 관계가 풍성히 자라게 할 것
지구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것이니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갈 것 생명의 근원이니 그 한계와 경계선을 존중할 것
권력 경제와 무관하니 언급하지 말 것 어디에나 속속들이 침투하니 남용되지 않게 할 것

그러면서, 21세기 경제학 모델의 패러다임을 위한 7가지 사고방식을 제안합니다.

사고방식 20세기 경제학 21세기 경제학
1. 목표를 바꿔라 GDP 성장에서 도넛으로
2. 큰 그림을 보라 자기 완결적 시장에서 사회와 자연에 연결된 경제로
3. 인간 본성을 자연스럽게 하라 합리적 경제인에서 사회 적응형 인간으로
4. 시스템의 지혜를 배워라 기계적 균형에서 네트워크의 역동적 복잡성으로
5. 분배를 설계하라 경제가 성장하면 분배가 개선된다에서 분배가 중심이 된 경제를 설계함으로
6. 재생하라 경제가 성장하면 환경도 개선된다에서 재생이 중심이 된 경제를 설계함으로
7. 성장에 대한 맹신을 버려라 성장에 대한 중독에서 성장의 효용에 대한 회의로

번영과 발전의 정의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책의 전반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강조하는 말은 (위의 표에도 있지만) GDP에 대한 맹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경제 정책의 목표를 불완전한 지표인 GDP의 성장에만 두지 않고, 생태와 복지에 균형점에 두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도넛 모형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생태경제학은 경제계를 생태계에 포함된 하위 체계로 보기 때문에, 생태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재와 같은 경제성장은 생태계를 공유하게 될 미래세대의 권리(경우에 따라서는 여타 생물종의 권리까지도)를 침해하는 비윤리적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태경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 현재 경제 행위의 기초가 되는 시장원리를 일정하게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생산과 소비를 규정하는 시장을 통한 경제체제는 생태계의 복잡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태계 이용에 대한 정도는 경제적인 시장원리가 아니라, 생태계의 수용 한도와 미래세대의 권리를 감안한 사전 예방적 원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 『도넛 경제학』
책 『도넛 경제학』

그러나 레이워스를 비롯한 여러 생태경제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GDP성장이라는 도그마를 대체할 만한 도구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도넛이 이 역할을 해주면 좋겠으나, 정책결정권자가 수용할 만한 모델이 되기에는 아직 미흡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몇몇 사례들은 생태경제학이 경제 정책 수립의 주요한 바탕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비칩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가 지구에 입힌 손상을 처음으로 깊이 자각한 세대이자 번영과 발전의 정의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세대다

이 표현처럼 우리 세대는 인류사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생태경제학의 단어를 빌리면,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입니다. 우리가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사회가 스스로 궤도를 바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현재의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의 생태 경제학자들이 이 경제학을 단순히 ‘ecological economics’가 아닌 ‘ecological economics in action’이라고 부르려 하는 것처럼 분명한 행동 표준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개개인들의 새로운 다짐이 필요해 보입니다.

전병옥

기술마케팅연구소 소장. 고분자화학(석사)과 기술경영학(박사 수료)을 전공. 삼성전자(반도체 설계)에서 근무한 후 이스트만화학과 GE Plastic(SABIC)의 시장개발 APAC 책임자를 역임. 기술의 사회적ㆍ경제적 가치와 녹색기술의 사회적 확산 방법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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