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슬픔이 이끄는 길

개인적으로 겪어온 생태슬픔의 형태와 제 마음의 경로는 어떠했는지 적어보았습니다. 그 후, 문제-해결의 새로운 접근법인 퍼머컬쳐의 원칙에 대해 공부하며 얻은 깨달음도 함께 나눕니다.

작년 가을, 이나경 수녀님이 쓰신 「생태슬픔을 넘어 전환의 축복으로」라는 칼럼을 통해 ‘생태 슬픔’이라는 다소 생소한 키워드를 접하게 되었다. 영어로는 Ecological Grief로 불리는 이 개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는데 대표적으로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 생물 종(種), 장소 등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삶, 문화, 정체성의 상실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슬픔(죄책감, 분노, 우울, 무기력 등의 감정 포함)’이라고 정리되고 있다.(Consolo and Ellis(2018))

생태 슬픔을 인지하고 나누기

나는 이 단어를 만나고 난 후, 그동안 내 안에 모호하게 존재하던 감정 덩어리 속 안개가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안에 의미를 가둬 넣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엔 평소에 가지고 있던 답답하고 우울했던 감정이 명료해져서 오히려 좋았다. 이름지음으로 인해 묵은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 듯했다.

이를 계기로 올 초에는 생태적지혜연구소를 통해 〈생태슬픔 배움터〉에 참석해 다양한 분들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온라인으로 한정된 모임이었지만 생태 슬픔이라는 주제 안에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자연 환경을 향한 슬픔이라는 감정을 유별난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더 큰 울타리 속에서 감정을 공유하고 나누는 과정은 매우 소중했다. 그리고 이 연결맺음은 큰 변화를 불러오기 위한 작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거리의 수많은 건설현장을 보면서, 땅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극한으로 몰아세우는 상황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사진출처 : Robert Bye
뉴욕 거리의 수많은 건설현장을 보면서, 땅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극한으로 몰아세우는 상황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사진출처 : Robert Bye

생태 슬픔을 느끼는 마음 작용과 형태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고 한다. 나는 이 모임을 계기로 그동안 내가 겪어온 생태 슬픔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내 마음의 경로는 어떠했는지 생각해봤다. 개인적으로 내가 생태 슬픔을 느꼈던 순간은 몇 년 전 뉴욕의 복잡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건축회사를 다니며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던 중 하루는 문득 땅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맨해튼의 거리를 걷다보면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을 반복하는 공사 현장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 따라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극한으로 몰아세우는 상황이 더욱 부각되면서 땅에게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I Love NY’이라는 뉴욕의 대표적인 슬로건이 모순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칭하는 대상은 과연 누구인지, 사랑하는 대상에게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인간의 만족을 위해 끊임없는 희생만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등 여러 가지 감정과 의문이 드는 과정에서 마음속으로 얘기했다. “많이 힘들겠구나.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동안 건축을 공부하며 여러 방식으로 땅을 다뤄왔지만 이런 감정이 우러나와 말을 건네 본 적은 처음이었다. 현실로 돌아와 바쁘게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 인지하고 있던 환경 문제도 우선수위에서 물러나 이런 감정이 다시 무뎌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 발현된 슬픔은 나를 새롭게 눈뜨게 했고, 생태 슬픔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이 감정적 경험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퍼머컬쳐가 알려준 해결의 실마리

그 후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가던 중 퍼머컬쳐(Permaculture)를 접하고 이론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퍼머컬쳐를 종종 지속가능한 농업(Permanent + Agriculture)이라고 단순하게 번역하기도 하지만 퍼머컬쳐에 관련된 대표 서적인 『가이아의 정원』의 저자 Toby Hemenway는 퍼머컬쳐를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하기 위한 디자인 접근법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퍼머컬쳐라는 개념이 단순히 농업기술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퍼머컬쳐의 주요 디자인 원칙 중에는 ‘문제가 곧 해결의 실마리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상에 문제가 문제로만 남는 경우는 없게 된다. 문제와 해결책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상황을 180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환경 문제를 대할 때도 문제에만 빠져 허우적대는 게 아니라 힘의 주도권을 가지고 해결의 방향으로 시선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인간은 파괴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 변화를 긍정의 방향으로 이끌 힘을 갖고 있는 잠재적 치유자로 바라볼 수도 있다.
사진출처 : Evie S.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인간은 파괴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 변화를 긍정의 방향으로 이끌 힘을 갖고 있는 잠재적 치유자로 바라볼 수도 있다.
사진출처 : Evie S.

퍼머컬쳐가 알려준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은 ‘인간은 본래부터 파괴적이다.(Humans are inherently destructive.)’라는 편견에 관한 것이다. 이 태도는 환경 문제를 얘기할 때 알게 모르게 주입받게 되는 대표적 관념 중 하나이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의 존재가 미워지며 심지어 죄의식까지 갖게 만든다. 또한 여러 기후 위기를 동시다발적으로 겪고 있는 오늘날, 사람들이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동력보다는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퍼머컬쳐를 통해 생태계에 대해 다시 배우다보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발자국(footprint)을 남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무언가 교란(disturbance)을 일으키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며, 중요한 건 어떤 발자국을 남기는지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파괴적인 힘을 가해왔다면, 다른 말로 우리는 그만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같은 크기의 힘을 갖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도 사실은 ‘인간은 파괴적이다’라는 반쪽짜리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이원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양면 모두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인간은 파괴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 변화를 긍정의 방향으로 이끌 힘을 갖고 있는 잠재적 치유자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관점의 전환은 땅을 건드리는 것이 굉장히 조심스럽고 두렵게까지 느껴지기도 했던 내게 큰 용기와 깨달음을 주었다.

생명이 흐르는 각자의 출구를 찾아

최근에 코로나에 걸리며 미각과 후각이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며칠 동안 그렇게 무(無)맛의 음식을 소화시키며 울적해지기도 했는데, 동시에 이 신체 경험을 통해서 감각을 잘 느낄 수 있는 건 큰 선물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레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잘 느낄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겐 축복일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느낄 수 있기에 슬픔을 해소한 후의 개운함도 만끽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깊은 감정은 하나의 응축된 에너지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힘을 어떻게 마주하고 다룰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 관건이며, 이것은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앞으로 생태 슬픔이 이끄는 길을 걸어가며 기억하고 싶은 메시지를 아래에 공유한다.

“길이란 단지 백만 갈래의 길 중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 길에 마음이 깃들어 있는가 (또는 생명이 흐르는가). 그렇다면 그건 좋은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의 『돈 후앙의 가르침』 中

유무

세상에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여정 속에서
표현하고 소통하고 통합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댓글 3

  1. 생태슬픔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이제껏 어슴프레 가졌던 감정들이 어떤거였는지 명확해지네요. 유무님의 여정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쁨니다.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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