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① 나를 이토록 변하게 하는 사랑, 사랑, 사랑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누군가와 접촉해야 하고, 그 접촉이 사랑과 정동과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삶을 유지해가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공통성, 즉 공동체를 끊임없이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각자도생에 지친 이 시대의 외로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재창안하고 재발견할 수 있도록 스피노자가 건네는 사랑의 지혜― 故신승철 선생의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사우, 2019)를 통해 들여다봅니다.

첫사랑이 내 몸을 통과하고 나니

가끔 옛 기억이 떠올라 하던 일을 잠시 멈출 때가 있습니다. 마치 매듭처럼 뭉쳐 있는 생각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무의식중에 툭 걸려 넘어지게 되는 그런 기억들, 누구나 한두 개쯤 가지고 있게 마련이지요. 저에게는 첫사랑의 기억이 그렇습니다. 생각할수록 부끄럽기 그지없고,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중학교에 막 들어갔고, 아이의 티를 막 벗어났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네 서점 누나에게 매혹되었지요. 나이도 저보다 서너 살 많고 그다지 미인도 아니었기에, 매우 당황스러운 감정이었습니다. 굉장히 우발적인 순간이 있었던 거지요. 그 후 그 누나가 꿈에도 나오고,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서 서점 주변을 배회했습니다. 몰래 편지를 전하려는 시도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소심한 사춘기 소년의 손에서 며칠 동안 땀과 눈물과 망설임에 꼬깃꼬깃해진 편지는 결국 서랍 깊은 곳에 초라하게 처박혀버렸지요. 모든 것이 좌절되자 저는 신열에 들떠 앓아누웠습니다. 그것은 불명열(不名熱)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프니 몸도 따라 아팠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에 따르면 마음과 몸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인다지요. 몸 전체가 느끼고 아파하고 세상이 새롭게 감각되는 차원이었습니다. 첫사랑은 늘 실패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패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새롭게 감각하고 느끼는 예상치 못한 시공간의 차원이 개방되는 것과도 같으니까요. 깊게 뿌리내린 기억의 조각들은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해, 환희의 몸, 전율의 몸, 욕망의 몸, 사랑의 몸을 만들어냅니다. 사랑은 저의 온몸을 리셋(reset)했고, 그 몸으로 느끼는 사랑이 만들어낸 세상은 이전의 세상과 무척 달랐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전의 나로 절대 돌아갈 수 없도록 차원 이동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성장통을 겪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건 이후 저는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정동(情動, affect)’의 변화를 무심결에 느끼게 된 것도 같습니다. 물론 그 때 그 소년은 스피노자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사랑이 나의 몸을 거쳐 흘러간 다음에 내가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문득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정동’은 곧 사랑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느끼는 기쁨, 슬픔, 욕망이 정동의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이며, 여기서 우울, 희망, 공포, 연민, 호의, 후회, 겸손 등이 파생된다고 말합니다. 사람마다 희로애락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모두 사랑이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꾼 것일 뿐이고, 그 근본 원인은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정동’이라는 어려운 개념어 대신 우리는 이것을 그냥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엄밀히 말해 정동은 감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스피노자 또한 ‘감정’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감정(emotion)은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기분을 일컫는 개념입니다. TV를 보면서 깔깔깔 웃는 것과, 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웃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전자가 일시적인 기쁨의 감정이라면, 후자는 ‘이 녀석 많이 컸구나’ 하는 감동과 사랑이 담긴 기쁨입니다. 물론 실제 생활에서 ‘저것은 감정’, ‘이것은 정동’이라고 구분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감정과 정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움직일 때가 생각이 많나요? 아니면 꼼짝 안 할 때가 생각이 많나요?” 아마 꼼짝 안 하고 멍하니 있을 때가 생각이 많다고 대답하겠지요. 그러나 움직일 때나 꼼짝 안 할 때나 생각의 비중은 비슷하다고 합니다. 다만 꼼짝 안 할 때 하는 생각은 대부분 개인의 감정생활, 환상, 망상, 의식의 흐름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정동은 움직일 때 하는 생각이고, 곁을 닦고, 보살피고, 아끼고, 정돈할 때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철저히 삶과 관련된 것이고, “왜 그것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는 생각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아끼고, 정돈하고, 보살필 때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은 ‘누군가’에 대한 사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 양치질을 하고, 나를 위해 음악을 듣고,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늘 기쁨이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요. 슬픔이나 연민, 때로는 좌절일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사랑의 다른 얼굴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또는 나 자신의 삶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 하다못해 현관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 행동조차 정동입니다. 그래서 정동의 동의어는 사랑, 돌봄,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이나 정동이라는 관념어가 돌봄, 보살핌, 모심, 살림과 같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와 같은 말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신과 신체가 각기 독립되어 있지만 함께 움직인다는 스피노자의 평행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는 사람의 행동은, 삶도 그렇게 세심하게 가꾸며 살겠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결국 그것은 사랑이면서 동시에 돌봄입니다.

첫사랑의 경험 또한 제 몸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랑의 순간에 갖는 지각, 느낌, 감각은, 신체의 표면 위로 강도, 온도, 밀도, 속도에 따라 기쁨, 슬픔, 분노, 연민 같은 정동의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다시 그려졌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 정동, 욕망이라는 단어가 갖는 느낌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의 기억은 강렬합니다. 마치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 온몸을 관통하면서, 제가 거기에 맞춰 춤추고 발을 구르고 노래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중학교 때 첫사랑의 기억이 점차 신체의 일부로 부드럽게 아로새겨져 있음을 지금도 느낍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할 때

어릴 적 공터에서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놀다 보면 이상한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손에 땀을 쥐며 응원하던 우리 편 아이의 동작에 따라 어느새 내 몸이 자동적으로 움찔움찔하는 것입니다. 사방치기에서 마지막 턴을 하고는 깨금발로 한 칸 건너에 놓여 있는 돌을 아슬아슬하게 집어 올리는 순간, 술래가 큰 소리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고개를 돌리는 틈에 잡혀 있던 동료를 구출해내는 단호한 터치, 손등 위의 공깃돌 다섯 개를 대차게 던져 올린 후 단숨에 받아내는 유연한 손놀림… 물론 저는 놀이에 워낙 재주가 없어서 늘 구경하는 쪽이었지만, 놀이의 중심에 있던 날렵한 친구들의 동작에 나도 모르게 심취해서 몸을 움찔거리곤 했습니다. 그땐 내가 속한 공간 전부가 나였지요. 함께 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 공터를 휘돌아가는 바람, 그때의 공기, 하늘, 냄새마저도 모두 다 말이지요.

요즘도 우리 집 고양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흔드는 고양이 낚싯대에 반응하는 존재가 고양이들만은 아니었던 거지요. 고양이들이 낚싯대를 쫓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어찌나 재미있는지, 나도 모르게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더군요. 손가락마저 고양이 발톱처럼 달싹 세운 채로 말이지요. 그것은 어쩌면 어릴 적 공터에서 놀던 그 어린아이가 불쑥 제 안에서 깨어난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을 ‘유년기의 감성블록’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유년기의 감성블록은, 스피노자 계승자 중 한 명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박사가 고안한 개념입니다. 누구나 어른이 된 후에도 아이의 잠재성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지요. 아이는 접촉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꽃도 되고, 벌레도 되고, 나비도 되고, 새도 됩니다. 그래서 벌레를 만나면 벌레 되기의 몸을, 나비를 만나면 나비 되기의 몸을 만들지요. 단순한 공상이나 흉내가 아닙니다. 아이는 달리고, 손잡고, 듣고, 느끼고, 밥 먹는 몸을,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변용시킬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경험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대신 직장인이라는, 프로그래머라는, 농부라는, 주부라는 정체성 안에 머물게 되지요. 어린 시절 벌레가 되고, 새가 되고, 꽃도 될 수 있던 그 능력은 어디로 갔을까요? 사실 그 능력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 몸에 잠재성의 형태로 숨어 있습니다. 단지 직장인이라는, 프로그래머라는, 주부라는 딱딱한 틀에 갇혀 있을 뿐이지, 우리 몸은 무한한 잠재성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잠재성이 발현되는 시간이 가끔 오곤 합니다. 어떤 사건이 그 잠재성을 툭하고 건드리는 순간이 있거든요. 이를테면 고양이들과 열심히 놀 때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공동체에서 그런 어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농부’ 혹은 ‘주부’의 정체성으로 살던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남들과 어울리다 보면 때론 가수도 되고, 춤꾼도 되고, 재주꾼도 되고, 이야기꾼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몸이 통합된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즉 ‘170센티미터에 몸무게 70킬로그램의 나’라는 주어진 몸이 아니라 변용을 통해 그때그때 출현하고 표현되는 몸에 주목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랑에 의해 돌연변이처럼 여러 가지로 변신하고 변용할 수 있는 몸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요.

그것은 단순히 모방이나 흉내도 아니었고 장래 가수가 되기 위한 훈련도 아닌 진짜 노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몸의 변용이었습니다. 사진: Robert Collins

어릴 적 저는 다락에 올라가 과학실험실을 꾸몄습니다. 그러자 제 몸의 감각은 과학자의 그것으로 변용되었습니다. 샴푸, 스킨로션, 성냥, 시계 부품 등이 저의 연구 재료였습니다. 연구 중에 폭발이 일어나 하마터면 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저는 과학자가 아니었지요. 다만 우주와 생명, 평화를 지키는 과학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때는 노래가 너무나도 좋았던 적도 있습니다. 가족들이 시끄럽다고 화를 낼 정도로 노래를 불렀고, 급기야 모든 대화를 노래처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제 몸의 성대와 음율, 화음은 흡사 가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모방이나 흉내도 아니었고 장래 가수가 되기 위한 훈련도 아닌 진짜 노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몸의 변용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는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무척 사랑해서, 고양이 집사를 꿈꾸었습니다. 고양이를 졸졸졸 따라다니기도 하고, 고양이 걸음걸이를 흉내 내기도 했습니다. 고양이가 먹는 음식물을 미리 먹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를 만지기만 해도 고양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감지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의 고양이들은 절대 내 말에 동의하지 않겠지만요. 또한 저는 천재들은 대부분 머리가 크다는 공통점도 알아냈고, 그 후 벽에 머리를 부딪쳐 머리를 키우는 특훈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들어보니 저는 원래 머리가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당시 저는 천재의 미세한 감각을 갖게 되어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책을 모조리 다 읽었습니다. 물론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은 것은 아니지만, 끝까지 읽은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입니다.

저는 과학과, 노래와, 고양이와, 일반상대성이론을 사랑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저는 과학자였고, 가수였고, 고양이 집사였고, 아인슈타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사랑은 무언가가 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물론 어른보다 아이들이 그런 변용 능력이 더 발달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가 신체를 변용시켜 사물, 상황, 자연, 생명을 사랑하듯, 어른들도 어린 시절의 기억인 유년기의 감성블록을 갖고 있기에 그러한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순간 우리 몸은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변용됩니다.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나 발휘할 수는 없는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힘이고 역능(force)이고, 역량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것은 장래 희망이나 직업 같은 것이 아닌, ‘무엇이 되기’ 혹은 ‘무엇을 사랑하기’라는 특이성(singularity)입니다. 특이성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개념이기에 뒤에서 더 깊이 다루겠지만, 여기서 살짝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능이나 직분, 본질에 따라 ‘학생답게, 주부답게, 노동자답게’라는 말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상상하고 좋아하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나를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유일무이한 것은 특이한 것이기도 하지요. “그는 ㅇㅇ답지 않게 무척 특이한 사람이야”라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겠죠. 어쩌면 철이 없다는 타박을 들을 수도 있겠군요. 이런 특이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는 어른보다 아이가 능하기 때문일 겁니다. ‘무엇이 되기’ 혹은 ‘무엇을 사랑하기’는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쉽게 해냅니다. 사랑할 때 누구나 아이처럼 미숙하고 서툴 수밖에 없는 것도 다 그 때문이겠지요.

유년기의 감성블록은 너와 나, 자아와 대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놀이와도 같습니다. 아동심리학자 대니얼 스턴(Daniel Stern, 1957~)은 아기는 생후 2개월까지 자신과 엄마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이 시기의 자아를 ‘출현적 자아(emergent self)’라고 불렀습니다. 아기는 엄마를 타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젖의 흐름, 시선의 흐름, 손길의 흐름, 똥의 흐름, 음식물의 흐름 등 다채로운 흐름으로서만 인식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아이들은 너와 나의 경계가 없었던 사랑이 충만한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즉 유년기의 감성블록을 갖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사랑의 능력, 공동체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욕망의 흐름(flux)은 우리 모두를 관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냅니다. 사회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직분에만 충실한 기계부품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즉 사랑과 욕망의 흐름은 우리가 색다른 무언가 될 수 있는 예술과 창조, 생산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라이히 박사가 제시한 유년기의 감성블록은, 가수가, 고양이 집사가, 과학자가, 천재가 되려 했던 내 어릴 적 몸의 감각과 변용의 능력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살다가 불현듯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라는 의문이 들 때면 ‘유년기의 감성블록’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아이라는 기억 저편에 있는 오래된 과거 속에서 미래의 소재를 찾아보는 거죠. 사랑이 우리에게 풍부하고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년기의 감성블록이 갖고 있는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일상을 가꾸는 작은 노력이 가진 힘

어릴 적 우리 집 중앙에는 마루로 된 방이 있었습니다.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목재가 아니라 투박하고 옹이가 많은 나무를 그대로 잇대어 만든 구식 마루였지요. 그 마룻장 한구석에 50원짜리 동전만 한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저는 그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구멍에 눈을 대고 가만히 어둠 속을 응시하노라면 마룻장 틈새로 흘러든 희미한 빛 사이로 시야에 들어오는 게 있었습니다. 쌓여 있는 물건들 위로 뿌연 먼지가 한 켜 올라앉아 있고, 그 위에 제가 엊그제 잃어버려 애타게 찾던 도루코 칼이 살포시 누워 있기도 하고, 동생이 여름내 달고 다니던 분홍색 귀걸이 한쪽을 발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잃어버린 몽당연필이란 몽당연필은 모두 거기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구멍을 통해서 보는 마루 밑 세상은 무척 신기했습니다. 어떤 날은 어디서 숨어들었는지 모를 낯선 고양이와 눈이 딱 마주치기도 했지요. 낡고 삐걱거리는 마루가 그 작은 구멍 때문에 저에게는 마치 특별한 비밀을 품은 장소처럼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즈음 집집마다 대청마루 대신 거실을 만드는 게 마을에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우리 집도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온돌을 까는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만의 작은 세계를 잃어버린 게 서러워 한참을 꺼이꺼이 울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사 설명한다고 해도 어른들이 마룻장 구석의 작은 구멍에 대한 어린아이의 애착을 이해해줄 수 있었을까요?

흔히 어른들은 정치나 경제 같은 거시적인 세계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무감각증에 사로잡힌 어른이 되면, 작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귀찮고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랑은 사소하고 작고 미세하고 미시적인 세계에서 싹트는 색다른 감수성이자 정동입니다.
사진: Bence Halmosi

그러나 미시적인 세계야말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작고 미세한 세계, 다시 말해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달지, 책상에 반듯이 앉는달지, 상대방의 눈빛을 부드럽게 응시한달지 하는 미세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영역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사랑과 욕망이 꿈틀대고, 기쁨과 슬픔의 정동이 서식하지요. 어찌 보면 사랑은 사소하고 작고 미세하고 미시적인 세계에서 싹트는 색다른 감수성이자 정동입니다. 아이들은 현미경처럼 미세한 삶의 영역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먼 곳을, 그리고 커다란 것만을 거칠게 보는 어른들의 망원경적 시각과는 비교가 되는 대목입니다.

또한 정동과 욕망이 숨어 있는 작고 미세한 영역에서는 수시로 놀라운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외부에서 수많은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등이 우발적으로 다가와서 내 안에 사건을 만들어내지요. 우발적인 마주침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향기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 “저 웃음의 의미는 뭐지?” “그는 왜 저런 손짓을 하는 거지?” 이처럼 우발적 마주침을 앞에 두고 삶에서의 자기원인(Causa sui), 즉 ‘왜 하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우발성을 보듬어 안을 능력이 우리에게 만들어집니다. 이를테면 옆집 사람이 음악을 크게 튼다면, 그 사람이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라는 자기원인에 따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지요. 이에 따라 우발성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능력을 상승시켜 기쁨에 이르는 것도 언제든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그 옆집 사람에게 더 잘 대해주고 무슨 걱정이 있냐고 말을 건넴으로써 서로 미소와 웃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오해가 쌓이고 더 큰 갈등과 상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이나 슬픔 같은 정서에 대해 스피노자는, 외부에서 다가온 우발성이 신체와 정신의 능력을 상승시키면 기쁨을, 하강시키면 슬픔을 느끼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그 옆집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면 기쁨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오해와 반감만 생긴다면 슬픔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쁨이나 슬픔 같은 스피노자가 말한 정동의 비밀은, 그것이 아주 사소한 ‘우발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발적인 것이 그저 돌발적이고 휘발적인 것이 아니라, 정동의 자기원인이 되어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우발성 개념에 주목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감각의 논리』라는 책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을 소환합니다. 20세기 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진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의 몸을 마치 고깃덩어리와 같이 비틀어진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들뢰즈는 그 고깃덩어리 같은 표현이, 화가가 붓터치의 빗나감을 통해 나타난 돌발흔적을 단지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흔적을 따라가면서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지요.

화가가 우발성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해낸 것처럼, 우발적인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정동을 지도처럼 그려내어 삶을 구성하는 능력입니다. 이를테면 공들여 가꿔온 화분에 어느 날 꽃망울이 맺힌 것을 본 순간, 혹은 힘들게 찾아간 거래처에서 냉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거나, 카페 창문 너머로 낯익은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는 등 사소한 사건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즉 우발적 사건이 정동의 자기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물론 그 우발적인 돌발흔적이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그것을 발견하고 변화의 특이점으로 만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발적인 것은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지만, 우리의 삶 내부에는 수동을 능동으로 바꿀 정동과 사랑의 능동적인 능력, 즉 기쁨의 능력이 숨어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는 이러한 능력을 능동적으로 구성해내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는 극한의 상황을 경험합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나 새해 첫날 유난히 사망자가 많은 것에 주목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기서 나가게 될 거야”라는 희망을 품고 견디어왔던 수감자들은 바로 그날이 되어도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자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던 것입니다. 근거 없는 희망이 죽음을 부른 것이죠.

가족이, 동료가 수없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빅터 프랭클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수감될 당시 완성 단계인 원고를 갖고 있었으나 빼앗기고 말았지요. 그 원고를 다시 쓰기로 작정했고, 수용소에서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원고를 구상하고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깨진 유리조각이라도 주워 매일 면도를 하고 몸을 깨끗이 유지했지요.

전쟁 전부터 삶에 대한 태도와 의미 추구가 중요하다는 이론을 연구하던 빅터 프랭클은 이러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탐색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용소라 하더라도 창조하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바꿀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자연과 생명의 능력을 들여다보면 공생하고 연대하고 협동할 사랑의 능력, 기뻐하고 희망을 갖고 경외를 느낄 정동의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삶을 그저 당연하고 마땅히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그건 이런 거겠지”라고 무미건조하게 단정해버린다면, 우리 신체와 정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능동을 구성할 능력은 축소되어버립니다. 반면 늘 비슷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서 우발적인 것, 사건적인 것, 특이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 능력은 배가되겠지요.

우리는 대부분 그런 경험을 어릴 때 합니다. 아이 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늘 수수하던 엄마가 시장에 갈 때 립스틱을 살짝 바르기만 했는데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학교 앞 문방구에 새로운 딱지가 들어온 것도 빅뉴스가 되었지요. 친구가 큰 맘 먹고 내밀었을 껌 하나에도 사랑과 정동의 힘이 전달되는 것을 느꼈던, 그 작은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아이 때 ‘느꼈던’ 감수성, 정동, 느낌, 감각은 바로 사랑과 욕망을 통해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를 잃고 미래를 잃고 정동과 사랑이 서식할 작고 미세한 영토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 되기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내재한 ‘유년기의 감성블록’에 잠재성의 형태로 숨어 있는 그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말이지요. 지금 우리는 커다란 것, 권력적인 것, 거시적인 것,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세상, 정치적 책략과 전략과 전술이 판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이 되기를 통해 사소한 것에서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모든 삶의 과정이 사랑이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렌즈 세공일을 하면서 한 번도 그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은둔자, 잠행자, 하숙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작은 지역으로 한정된 영토는 어쩌면 삶 곳곳에 숨겨져 있는 미시적인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렌즈 깎는 일이 얼마나 섬세한 일인지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이러한 미세한 일은 마치 아이 때 흙과 장난감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느꼈을 미시적인 감수성과도 같았을 겁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미세한 장인의 감각으로 문제작 『에티카Ethica』에서 정동의 기하학을 그려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욕망이 서식하는 작고 미시적인 영역의 이야기입니다.

미시적인 영역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오늘 점심때 무엇을 먹을지, 반찬은 몇 가지가 나올지, 무슨 옷을 입을지 등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발적인 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적인 세계가 아닌 갑자기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돌발적인 사건입니다. 만약 세상 모든 일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것도 새로울 게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의 반복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이야말로 삶에 활력과 재미를 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 삶이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요? 매 순간 불안에 시달리면서 안정적인 삶을 희구할 것입니다. 물론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여기서 두 가지 삶에 대한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내일이 별 차이 없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매일매일 색다른 사건이 우발적으로 벌어지며 늘 새로움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딱히 어느 쪽이라고 대답하기 곤란한 것은 아마도 우리 삶은 반복적이지만 늘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반복과 차이는 대립하는 명제가 아니라 차이 나는 반복으로 서로 연결된 개념입니다. 이를 잘 규명했던 철학자가 바로 들뢰즈였지요.

우발성은 반복적인 삶에 종속된 사람들에겐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자유로운 사람들에겐 사랑, 욕망, 정동의 생성과 지도 그리기의 능력을 발휘해 삶에 재미를 주는 요소입니다. 이처럼 우발성에 대해 누구는 공포로 느끼고 누구는 재미로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는 흔히 변화가 외부의 우발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우발성이 우리 안에 내재된 자기원인을 촉발하고 변용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치 안에 들어온 이물질을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진주를 만드는 조개처럼 우리의 몸과 살과 삶은 우발적인 것을 감싸고 보듬습니다. 우리의 삶은 꽃망울을 감싸는 꽃잎이나 물건을 감싸는 봉투처럼 감쌈(envelopment)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외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다가오더라도, 만약 내 안에 그것을 통해 변화시킬 자기원인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말 테지요.

반면 외부의 아주 작은 변화도 민감하게 감지하여 내 삶의 커다란 변화로 만들어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외부에서 우발적으로 다가오는 미시적인 것들은 우리 안에 내재한 변용 능력에 따라 구성되어 우리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변용 능력’이란 바로 자연, 생명, 소수자 등의 타자성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타자성을 스피노자는 ‘외부적 사유’라고 불렀습니다. 더 나아가 우발적인 것을 결정론적인 것보다 일차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발적 유물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외부적 사유나 우발적인 유물론은 우리 안의 내재성을 재발견하는 것, 즉 우리 삶이 갖고 있는 품고 돌보고 감싸 안고 사랑하는 능력을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크고 거창한 것을 바라보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의 미세한 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 저는 미세한 흔적과 자취, 틈새를 바라보는 작은 현미경의 능력을 생각해봅니다. 저 멀리 바라보는 크고 거대한 망원경이 아니라, 지금-여기-가까이를 들여다보는 현미경이 삶의 다채로운 무늬와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정동, 사랑, 욕망이 서식하고 숨 쉬고 들썩거리고 있는 자리입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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