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장] ㉒ 허리가 부러져도 풀들은 자란다

며칠간 쏟아붓던 장맛비가 잠시 주춤하자 아침부터 시끄러운 예초기 엔진 소리가 마을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여름 시골은 풀들과의 전쟁이다. 풀베기 작업이 힘들다 보니 어르신들은 제초제를 사용하신다. 비가 그치기가 무섭게 등에 소독통을 업고 밭 주변에 제초제를 뿌리면 초록색이던 풀들은 누렇게 변했다가 시커멓게 녹아내린다. 사라진 풀들은 내일도 다시 올라올까?

며칠간 쏟아붓던 장맛비가 잠시 주춤하자 아침부터 시끄러운 예초기 엔진 소리가 마을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여름 시골은 풀들과의 전쟁이다. 잠시 해가 얼굴을 내밀 때 곧바로 풀을 제거하지 않으면 긴 장마에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주저하는 사이 풀씨라도 생기면 예초 후 곧바로 다시 올라오기 때문에 그 전에 얼른 제거하는 게 상책이다.

어설프나마 전기 예초기를 들고 리사무소 주변 무성한 풀들을 벴다. ⓒ이상영

풀들이 자라는 걸 보면 정말 경이롭다. 코딱지만한 우영팟에 쪼그려 앉아 이른 봄부터 열심히 검질을 맸지만1 흘렸던 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올라오는 풀들 때문에 허리가 부러진다. 요즘처럼 매일 비가 오는 장마에 자라는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비를 핑계로 2~3일만 모른척하면 무릎 높이까지 자라 마당을 정글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생명력! 30대 이후 내 두피에서 단위면적당 생존 비율이 현격히 낮아진 모발들이 이 풀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반만이라도 닮았더라면 지금 같진 않을 것인데.

마을길과 리사무소 주변도 예외없이 풀들로 뒤덥혔다. 문제는 풀들이 자라는 만큼 마을 할망들의 잔소리도 함께 커진다는 거다. 할망들의 은근하고 깐깐한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청년회장은 태업을 선언했고, 이제 그 화살은 이장에게로 향했다. 그렇다고 매번 사람을 고용해 마을길을 돈으로 해결한다면 조금 과장해 수 천 만원이 들 판이니, 직접 예초기를 들고 나서는 수밖에….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소리가 맹렬한 엔진식 예초기는 뭔가 좀 무서워서 전기 충전식 예초기를 구입해 눈에 보이는 리사무소 주변과 차가 다니기 힘들 정도로 풀이 자란 곳만이라도 작업을 시작했다. 한여름에 긴팔옷, 무릎보호대, 안면보호안경까지 쓰고 예초를 하자니 그간 소중히 찌운 뱃살마저 빠지는 기분이다. 예초기 칼날에 돌들이 부딪쳐 불꽃이 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래서 영혼까지 탈탈탈 털리고 말았다.

리사무소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풀을 베고 있으니 지나가던 마을 어르신이 속도 모르시고 “사람 사서 예초하지 왜 이장이 직접 풀을 베느냐”고 혀를 차신다. ‘어르신, 그럴 수 있으면 을매나 좋을까요?’라는 대답을 복화술로 얼버무려 예초기 소음에 함께 실어보냈다. 어설프고 고달픈 예초작업을 끝내고 점심을 먹는데, 밥을 푼 숟가락이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린다.

풀베기 작업이 이리 힘들다 보니 어르신들은 제초제를 사용하신다. 비가 그치기가 무섭게 등에 소독통을 업고 밭 주변에 제초제를 뿌리면 초록색이던 풀들은 누렇게 변했다가 시커멓게 녹아내린다. 며칠 전 수년간 농사를 짓지 않아 풀숲이 된 우리집 앞 땅에도 땅주인이 제초제를 뿌렸다. 풀들이 사라지자 거기서 터를 잡고 종종거리며 새끼를 낳아 기르던 꿩과 노루 가족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을길을 산책하던 반려견이 제초제를 뿌린 풀을 뜯어 먹은 후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온다.

풀숲에서 새끼를 기르던 노루 가족(좌)이, 제초제를 뿌린 후(우) 자취를 감췄다. ⓒ이상영

풀은 정말 지구상에서 사라져 마땅한 것들인가?

다큐멘터리 영화 《대지에 입맞춤을》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탄소를 대량으로 보관하는 창고가 바로 땅(대지)과 풀이라고 말한다. 대지에 자라는 풀들은 탄소를 영양분의 형태로 바꾸어 뿌리에 저장하고, 미생물들도 탄소접착제를 만들어 탄소를 땅속에 저장한다.

《대지에 입맞춤을》 영화 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

하지만 지금처럼 농경지를 거대한 쟁기로 갈아엎으면 땅속에 보관되어 있던 탄소가 대기중으로 방출되어 지구온난화는 가속화된다. 영화는 풀을 갈아엎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탄소를 땅속에 저장해 지구온난화를 막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것이 간단하고 유일한 마지막 방법이라고.

그러고 보면 산불이 발생해 초토화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고 상처난 땅에 옷을 입히는 개척자들이 바로 ‘풀’이다. 키 큰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오랜 시간 동안 풀들은 자라고 죽고를 반복하며 나무에 양분을 제공해준다. 그러다 나무가 큰 숲을 이루면 그 자리를 미련없이 양보한다. 정확히 말하면 또다시 때를 기다린다.

풀은 아무 죄가 없다. 오히려 풀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지구의 마지막 희망일지 모른다. 흔히 ‘잡초같은 생명력’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그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죽여도 죽여도 다시 올라오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죽여도 된다고. 오늘 죽여도 내일 ‘반드시’ 다시 올라올 거라고.

분명 자연에게는 강인한 생명력과 회복력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애써 모른 척 한다. 그 선을 넘으면 땅도 바다도, 동물도 회복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일도 풀들이 올라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당연한 것인가? 이 풀들이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풀을 깎다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나저나 마을길 예초하기 싫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할 일인가? 어여 장비나 챙겨 풀 베러 가자. 아이고.


  1. 검질을 매다 : 잡초를 뽑는다는 의미의 제주도 방언.

이 글은 『제주투데이』 2023년 7월 31일 자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사진저작권 : 이상영, 넷플릭스

이상영

20년 가까이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사회)를 가르치다, 2018년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로 이주한 초보 제주인. 2019년 초 학부모들과 함께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으로 선출된 후, 2021년 어쩌다 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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