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와 틈새가 더 중요하다 – 「궁상이와 명월각시」 독후기

함경도에서 행해지는 망묵굿의 일부분을 떼어 만든 이야기 ‘궁상이와 명월각시(궁상이굿)’를 읽으며,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여지와 틈새에 관하여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인정(人情)

한국 민속에 망묵굿1 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함경도 지방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천도하기 위해 행하는 무속의례이다. 여기에서 천도(薦度)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보다 좋은 세상으로 가게 함을 뜻한다. 불교의 천도재는 그런 목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의례이고, 천도재가 무교에 스며든 결과 형성된 굿이라 할 수 있다. 망묵굿은 또한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해 행하여지는 굿인 까닭에 그 속성에 따라 사령[死靈]굿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망묵굿은 밤낮으로 일주일 동안 행하는 대규모의 굿이다. 최길성은 이 굿을 22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마지막 단계인 ‘하직천수’가 불경인 『천수경』을 창하여 망자의 저승길을 비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에서도 이 굿이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교 의례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망묵굿은 죽은 사람의 넋을 천도하기 위해 행하는 무속의례이다.
사진 출처 : panyawat auitpol

최길성은 이 굿의 제18단계를 ‘돈전풀이’라 이름 붙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망자가 저승가는 길에 인정(돈)을 써서 고비를 넘기는 것을 서술하고 전신(錢神)의 내력담을 창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남편과 해후한 궁상선비와 명월각시가 후에 돈이 얼마든지 나오는 망태기를 얻었다는 내용이다.”2 . 장례식에 참례하여 장지까지 따라가 보면, 관을 땅에 묻는 과정에서 묘지를 조성하는 노동자들이 참례자들에게 저승 가는 노잣돈을 낼 기회를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참례자들 가운데 망자와 가깝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그 돈이 묘지 조성 노동자들에게 갈 것으로 알면서도, 선선히 노잣돈을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비공식적’으로 오고 가는 노동의 대가를 오래 전에는 인정(人情)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적은 임금을 받는 관리들이 민원인의 편의를 보아줬을 때 그 민원인이 관리에게 감사의 표시로 주는 금품도 인정이라 하였다. 이 또한 비공식적으로 오고 가는 노동의 대가라 할 수 있다.3 돈전풀이는 망자의 혼령이 좋은 곳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돈이 필요함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돈전풀이는 굿을 해 주는 무당에게 망자의 가족 친지가 성의를 표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진 것인 동시에, 그런 방식으로 금품이 오고 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망묵굿을 22단계로 나눌 때 제18단계는, 망자가 저승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고비를 넘기는 데 인정(돈)이 필요함을 설명하는 단계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참례자들이 인정을 베푸는 것은 곧 굿을 해 주는 무당에게 망자의 가족 친지가 성의를 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착함과 베품

이렇듯 돈에 관련된 이야기를, 망묵굿은 전신(錢神), 즉 돈의 신인 궁상선비와 명월각시의 내력담을 바탕으로 풀어나간다.4 [네이버 지식백과]에 ‘궁상이와 명월각시(궁상이굿)’5 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이것은 망묵굿 속 궁상선비와 명월각시의 내력담을 정리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궁상이6 는, 만 가지 재주를 지녔음에도, 본래 살던 신선들의 세상에서 쫒겨나, 사람 세상에서 천하 절색 명월각시7 와 부유하게 살았다. 그런 궁상이는 배선이와 내기 도박을 즐기면서 많은 것을 잃는다. 명월각시의 만류에도 내기 도박을 계속하던 궁상이는 배선8 이와 명월각시를 걸고 한 내기에서마저 져버린다. 명월각시는 궁상이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마련을 하여두고 배선이에게 끌려가고, 홀로 남은 궁상이는 위기를 맞지만, 명월각시가 마련하여둔 것들 덕에 목숨을 이어가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변의 존재들에게 베푼 선의에 대한 보답에 힘입어 위기에서 벗어나, 명월각시를 찾아갈 수 있게 된다. 한편 노름빚으로 배선이에게 끌려간 명월각시는 “하루 바삐 자리 갖춤을 하자”는 배선이의 성화에 시달리자, 부부가 되기 이전에 널리 선심을 쓰는 것이 좋으니 거지 잔치를 열자고 배선이에게 청하고, 배선이는 이 부탁을 마지 못해 들어주게 된다. 그리고 명월각시가 의도한 대로 궁상이가 이 잔치에 오자 명월각시는 끌려올 때 단단히 챙겨 온 궁상이의 구슬옷을 내걸면서 그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자기의 배필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궁상이만이 그 옷을 입을 수 있어서, 명월각시는 “이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명월각시는 그렇게 남편을 되찾고는 남편을 시켜 외방 장사를 하게 해서 잃었던 재산을 다시 불리고 잘 사는 것이었다. 궁상이는 그렇게 인간세상에 나와 하늘에 죄지은 것을 벗고서 다시 선간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여지와 틈새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는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개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분명 세상을 좀 따뜻한 곳으로 만들 것이다.
사진출처 : Asad Photo Maldives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선 궁상이가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기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다 못해 배우자까지 내기에 걸어 잃는 것도 한심하지만 배우자인 명월각시의 현실적인 권고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한심하다.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를 보여줌에도, 이야기 속 궁상이는 미성숙한 존재라고 느껴진다. 궁상이만이 아니라 꽤 많은 한국 남자들에게서 궁상이와 비슷한 행태를 본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새삼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는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개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분명 세상을 좀 따뜻한 곳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 덕에 궁상이는 돈의 신[錢神]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분명히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남편과 해후한 궁상선비와 명월각시가 후에 돈이 얼마든지 나오는 망태기를 얻었다”고 하면서 그 과정을 전신(錢神)의 내력담이라고 하였으니, 명월각시도 돈의 신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신이 되게 하였을까? 궁상이와 배선이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거지 잔치를 여는 것을 보면 명월각시는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명월각시는 배선이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 이모저모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준비한 것들은 다 시의적절한 것들이었음이 밝혀지고, 그의 노력은 성공으로 끝을 맺는 듯하다. 명월각시의 노고가 궁상이의 노고보다 압도적으로 더 크고 무거워 보인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여지껏 명월각시의 노고의 크기와 무게에 대하여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를 하여 왔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에 지나치게 후한 평가를 하느라고 그러한 마음과 태도가 실질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여주는 노고들에 대해서 적절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월각시가 한 노고의 성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명월각시는 여지를 만들고 틈새를 벌리기 위하여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궁상이가 저질러놓은 일들 때문에, 궁상이 자신뿐만 아니라 명월각시 역시 선택의 폭과 행동반경이 형편없이 좁아져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명월각시가 한 일들은 이미 정하여진 목표를 염두에 둔 준비라기보다는 궁상이와 자기 자신의 선택의 폭과 행동반경이 조금이라도 더 넓어질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고 틈새를 벌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배선이에게 끌려가기 전에 명월각시는 소고기를 솜처럼 말려 그것으로 궁상이에게 누비옷을 지어주는데, 그것은 갑자기 먹을 것이 없게 된 궁상이를 살려주는 식량이 되어준다. 이 외에도 명월각시가 궁상이를 위해 해준 일들은 궁상이가 예기치 못한 위기에 처하였을 때 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하여준다. 명월각시가 배선이에게 대응하는 방식에서는 틈새를 벌림으로써 선택의 가능성을 키우고 행동반경을 넓히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만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거지 잔치 자체도 그렇거니와 그 잔치를 통해 석달 열흘 그러니까 100일이라는 시간을 얻어내는 것은 틈새 벌리기의 더욱 전형적인 예라 할 만하다.

이야기의 초입에서 배선이는 판판이 자신의 욕망을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명월각시의 태도나 궁상이의 생활방식을 배선이의 욕망이 누르고 세계를 관통하는 법칙의 자리에 등극한 듯한 느낌을 준다. 명월각시는 배선이에게 끌려가게 되었는데 궁상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명월각시와 궁상이의 미덕은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할 듯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월각시가 몇 가지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명월각시가 취했던 조치들은 명월각시와 궁상이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키우고 행동반경을 넓혀주는 쪽으로 활성화된다.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가 오랫동안 찬사를 받아온 까닭은, 오랫동안 세상에 그것이 꽤 많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마음과 태도가 충만한 상태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배선이가 보여준 생활방식의 폐해만 보아도, 이 폐해가 누군가의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에 의하여 충분히 완화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배선이의 생활방식을 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명월각시가 만들고 벌려놓은 여지와 틈새는 일단 사람을 숨쉴 수 있게 하여줄 것만 같다. 만약 이 이야기 속 배선이가 보여준 것과 비슷한 생활방식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여 그것이 세계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법칙이 되다시피한 상태가 되면, 일단 숨이라도 쉴 수 있는 여지와 틈새를 찾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생겨날 듯하다. 그리고 어찌보면 바로 지금 여기가 배선이의 생활방식이 세계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법칙이 되어가고 있는 곳일런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곳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궁상이와 명월각시(궁상이굿)’를 읽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의 눈은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보다는 명월각시가 만들어내는 여지와 틈새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될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는 궁상이가 보여준 착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태도 못지않게 명월각시가 만들어낸 여지와 틈새도 중요하다. 아니 여지와 틈새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망묵굿’ (집필: 최길성) 토세굿·망묵이굿·망령굿·사령굿 등 다른 이름도 있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망묵굿’ (집필: 최길성)

  3. 이러한 역사 속의 인정을 “지난날, 벼슬아치들에게 몰래 주던 선물이나 뇌물”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4. 이 내력담과 전개가 유사하면서도 주인공은 ‘궁상이’와 ‘해당금이’이고 그들이 각각 해와 달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있다.

  5. [네이버 지식백과] 궁상이와 명월각시(궁상이굿)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6. ‘가난하게 살 얼굴’[궁상(窮相)]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7. ‘온 세상을 비추는 밝은 달’[명월(明月)]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8. ‘착하게 살지 않기’[배선(背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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