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힘, 삶의 이야기 – 〈목화마을 문래, 인문학 탐방〉 참여 후기

2023년 10월 14일에서 11월 4일 사이에, 나는 〈목화마을 문래, 인문학 탐방〉에 참여하였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강의·탐방·실습·체험 등 서로 다른 유형의 작은 활동 일곱 개가 주말마다 차례로 열렸다. 이 활동 참여 후기를 적어본다.

1014방직공장에서 문래예술촌으로강사 : 홍승하

홍승하 님은 오목교에서 문래동 쪽을 바라보며 부모님과 함께 찍은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1968년생이고 영등포 지역에서 여러 활동을 하며 살아왔다고 하였다. 영등포에 55년 동안 살면서 영등포의 변화를 겪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19세기 말에 영등포에 경인선과 경부선이 지나는 영등포역이 생긴 것이 변화의 기점이라고 설명하였다. 그 이후 영등포의 변화를 설명하여주고 참고가 될만한 유튜브 컨텐츠도 소개하여주었다. 그의 설명은 이후에 이어진 문래동 탐방 등 여섯 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질의 응답 시간에 나는, 산업체 부설학교 졸업생들이 아직 영등포에 사시냐고 묻고, 사신다면 영등포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밝혔다. 나중에 찾아보니, 방림방적에 부설되었던 동명상업고등학교가, 강의가 진행된 경계없는 예술센터 북쪽 근접한 곳에 있었다. 이 학교는 방림방적 노동자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던 야간학교다. 나무위키 ‘산업체 부설학교’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본래 주소는 문래동 3가 54였으나 폐교 이후 잠시 동안 문래동 3가 45가 되었다가 해당 부지에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다시 지번이 변경되었다. 방림여자상업고등학교로 설립되었다가 1990년대 개칭. 2000년 방림 영등포공장 폐쇄로 폐교 후에도 건물은 노숙인 쉼터인 ‘자유의 집’으로 사용되다가 2003년 주택건설업체에 매각되어 철거. 현재 금호 어울림 아파트가 들어섰다.” 내 생각에, 동명상업고등학교와 같은 산업체 부설학교들은 노동자들의 자기 전환의 기회였다. 그 학교 출신들 가운데는 주어진 여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를 변화 발전시켜간 사람들이 다른 학교 출신들보다는 더 많을 것이고, 그들이 영등포에 정착하였다면 영등포의 변화를 남다르게 볼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한 질문이었는데, 애초에 이런 생각 자체가 그리 구체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였다. 오히려 방림방적 노동자였던 사람들은,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변화를 이루고 나면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미련없이 문래동을 떠났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나는 1960년대에 세워진 성공회 영등포성당(영등포구 도림로 430)이 문래동의 바람직한 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이 교회 북쪽의 그리 넓지 않은 길 너머에, 지금은 문래 에이스 테크노타워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그 이전에는 방림방적 노동자의 기숙사가 들어서 있었다. 성당은 또한 도림로를 사이에 두고 문래동 우체국과 마주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성당은 방림방적 노동자 기숙사와 문래동 우체국 사이에 있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방적공장의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에게 기숙사 못지않게 우체국도 중요한 기관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탄절이 되었는데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성탄 장식으로 반짝이는 성당의 뒷마당이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뒤에 생각하여보니 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20세기 후반 방적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우체국을 많이 이용했었던 것은 분명하니, 우체국과 기숙사 사이를 오가며 그들이 성당을 그저 지나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야근반은 새참을 라면 한 봉지씩 주는데 끓여 먹을 사람은 난로 위에 한꺼번에 끓여서 나누어 먹고 안 먹은 사람은 본인에게 주었다. 같은 방에 있는 언니는 그 라면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고향집으로 보냈다 동생들이 너무 기다려서 안 먹어도 배가 부른다고 했다.” 네이버 블로그 《풀잎소리》에 있는 〈내 나이 열아홉 살〉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방림여고’에 진학하기 위하여 방림방적으로 직장을 옮겼다고 하였다. 이 글의 내용이 맞다면 한달 동안 모은 라면을 고향의 동생들에게 보내주기 위하여 우체국과 기숙사 사이를 오간 여성 노동자가 있었을 것이다.

총 7차에 걸쳐 진행된 프로그램의 이모저모. 사진제공 :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1015문래동 구석구석 돌아보기강사 : 최영식

최영식 님의 안내로 문래동 곳곳을 돌아보았다. 일제가 영등포에 제일 먼저 지은 공장이 피혁공장이었던 이유가 오랫동안 육식이 금지되었던 일본에서는 큰 피혁공장이 혐오시설일 수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는 최영식 님의 설명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이해해 본 사람이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혀주는 예시였다.

갤러리들이 밀집한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와서 문래동 우체국 바로 옆까지 갔을 때, 〈서여사네〉라는 식당 입구 왼쪽 하얀 색의 작고 예쁜 문이 예전 그 자리에 있었던 소규모 공장의 화장실 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내가 예전에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자전거 수리점 2층에 살았을 때 이용했던 세탁소 옆 화장실을 떠올렸다.

최영식 님의 안내로 문래동 구석구석을 돌아보던 중, 술술센터(영등포구 도림로133길 15)를 지나쳤다. 술술은 예술과 기술을 의미한다. 술술센터는 많은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시민들이 흥미를 가지고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꽤 오래 전 문래예술공장(영등포구 경인로88길 5-4)을 지나쳤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문래예술공장은 정말이지 너무 썰렁했고 ‘불친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관청이 문화에 개입하는 것은 별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비하면 술술센터는 썰렁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아 보였다. 거의 10년의 시간이면 꽤 긴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이에 관청에서 일하는 방식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관청이 문화에 개입하는 것을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1021목화와 기후위기 버리는 옷감 업사이클링강사 : 김은제

목화가 처음 재배된 곳은 아니었지만, 한때 실 공장들과 옷감 공장들이 많았기에 목화마을이라는 별명을 얻을만한 동네인 문래동에서, 버리는 옷감 업사이클링을 직접 해보며 기후위기를 초래한 대량생산과 쉬운 소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행사였을 텐데, 나는 감기가 심하여 참여하지 못하였다.

1022문래동의 발명; 떠나는 사람들 남는 사람들강사 : 이무열

이무열 님의 강의에서는 아주 많은 관념들이 제시되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이 강의는 많은 관념들을 제시하였기에 중요한 강의이다. 강의에서, 수 많은 관념들이 내 귀를 스쳐갈 때, “철학은 관념입니다” 라고 잘라 말하였던 어떤 철학자가 생각났다. 1980년대 말에 그 철학자는 ‘왜 철학과 교수들은 실천을 도외시하고 이론을 강의하는 것만 고수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위와 같이 짧게 답하였다. 철학은 관념이라고. 내가 그 철학자의 철학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가 위와 같은 짧은 대답을 남긴 이유를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지만, 그 대답을 들은 후 나는 철학은 관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요즈음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지만, 철학사를 보면 예전에 철학자들은 세계의 변화를 관조하고 그것을 하나의 관념으로 설명하였다.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그 관념은 영원히 유효할 수 없다. 그러나, 한시적으로나마, 그 관념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사상이라는 도구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무열 님은 많은 관념들을 제시하였고, 도시를 ‘발명’하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때때로 그 관념들을 자신의 실천의 지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에 얽매라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실천의 수단으로 삼으라는 것. 이것이 이무열 님이 수많은 관념을 열거한 이유일 듯했다.

이무열 님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즐거우면 멀리서 사람이 온다”는 말도 하였다. 이 말은 “재미있어야 돼”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을 듯했다. 또한 이무열 님은 당대의 상식에 반하는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공간[space]을 장소[place]로 만들 것이라면서,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로 예술가와 소수자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조적 파괴[innovation]를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은 상인들이라고 하지들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창조적 파괴가 상인들의 것이라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곳의 상인들은 제대로 된 상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창조적 파괴를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은 상인들이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큰 상인들이 창조적 파괴를 그리 제대로 수행하는 것 같지 않은 한국의 자본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028〈『모랫말 아이들속 문래동 읽기강사 : 강영란

동화작가 강영란 님의 안내로 황석영 소설 『모랫말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강영란 님이 동화작가이기 때문에, 동화가 다른 이야기들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에 대하여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황석영의 자전적 소설 『모랫말 아이들』은 문래동을 포함한 영등포 일대에서 작가 황석영이 초등학교 입학 전후의 시기를 보내며 체험한 것을 소설화한 것이다. 이 시기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즉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던 때까지의 시기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 소설에 반영된 황석영 작가의 그 시절 체험은,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다는 것 만으로도 접해볼 만하였다. 강영란 님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예전 영등포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신데다가 홍승하 님의 강의에서 영등포의 역사도 듣고, 최영식 님이 이끈 답사에서 둘러본 문래동 이곳저곳 가운데 어린 황석영 작가가 지나다녔을 만한 곳도 있었던지라, 소설의 배경이 되는 풍경을 머릿속에서 꽤 실감나게 그려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어린이, 소수자를 발견하고 긍정하다’ 라는 제목의 『모랫말 아이들』 독후기1를 쓰게 되었다.

1029문래동의 도시생태학예술행동과 커먼즈강사 : 권범철

처음 생길 때 문래예술촌과 함께 하셨던 권범철 님은, 문래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자본주의가 모든 문화를 상품화하는 매커니즘에서 어떤 문화 예술도 벗어나기 지극히 어려우며, 거의 모든 도시정부 또한 자본과 최소한이라도 제휴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문화 예술을 상품화하려는 자본과 어느 정도 함께하거나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서주기 마련임을, 여러 도시정부의 예를 들어 설명한 듯했다. 또한 도시정부 역시 권력이다 보니 문화 예술을 지배 대상 목록에서 빼줘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지는 못하는 것 아니냐는 견해를 시사한 듯했다. 결국 권범철 님은 숨막히지만 거부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 것 같았다. 권범철 님의 생각이 맞다면, 전국적으로 시도되는 도시재생기획들 그리고 2008년 이후 전지구적 흐름이 되었고 오세훈 시장이 내세운 것이기도 한 ‘창조도시’ 혹은 ‘창의문화도시’ 그리고 ‘컬쳐노믹스’·‘아트팩토리’·‘서울시 창작공간’ 등도 자본이 문화 예술을 상품화하고 도시정부가 문화 예술을 권력의 통제 아래 두려는 기획에 덧씌워진 멋진 겉치레일 듯 싶었다.

권범철 님은, 예술하기와 공통장 구축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과정에서, 2008년에 수도도 난방도 없었던 세연정밀 2층의 공간이 예술가들의 활동과 서식의 장소가 된 데서 비롯하여, 문래우체국 맞은 편 길 건너에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서식하는 장소들[문래예술공단?]이 점점 생겨나고, 예술가 반상회가 열리면서 공통장[commons]이 생기는 듯하였으나 부침을 계속하다가, 그 장소에서 경부선 쪽으로 큰길을 건너가야 하는 후미진 곳에, 2010년에 정부가 문래예술공장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예술하기와 공통장 구축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적 논의보다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문래동에서 일어난 변화를 상상하여 보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흥미로움에는 이론적 논의로 접어들 수 있는 틈도 있었다.

권범철 님에 의하면 맑스는 자본주의가 인클로저에서 싹텄다고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는 데 피터 라인보우의 『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를 읽은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도시정부들이 하는 일이, 숲에서 땔감을 줍거나 토끼라도 사냥하는 것을 금지한 ‘나쁜 존 왕’의 울타리치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나쁜 존 왕’의 생각은 “사회는 없다 가족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 마가렛 대처를 거쳐 “큰 사회”를 내세운 21세기 영국 보수당에까지 이어졌다고 권범철 님은 설명하였다. 대처와 보수당의 구호는, 가족만을 허용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봉쇄하려는 의도를 숨긴 말로써 기존의 자본주의와 그것에 제휴한 권력에 바늘만큼의 파열구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야욕을 멋들어진 말로 포장한 것으로 보였다.

문래근린공원에서 참가자 기념촬영. 사진제공 :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이런 자본과 권력의 행태를 보면서도 ‘개는 겁먹었을 때 더 크게 짖는 법’이라고 생각하였는지, 권범철 님은 공통장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도시에서 예술하기’라는 제목의 별도의 유인물에서 예술가들의 백수생활이, 겉으로 보기에는 지속 불가능한 행위지만, 자본주의의 법칙에 갇히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여, 자본주의는 백수생활을 두려워한다는 투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것이 〈예술행동[예술하기]와 커먼즈〉라는 제목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인구가 줄면 소비가 줄어서 사회가 경제가 무너진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점점 더 많은 상품을 빨리 잘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열적 f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들어보아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2

114도심 속 생태명상강사 : 문윤형

문래근린공원 잔디밭에서 있었던 〈도심 속 생태명상〉에서는 자연 생태계와 하나가 되기 위한 몸짓을 다양하게 해 보았다. 이 몸짓들은 여러 이유로 나의 몸이 특정한 자세에 고착되어있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하여주었다. 문윤형 님은 생태계가 파괴되는 큰 사고를 기억하고 그 위험을 널리 알리고자 한 사람들이 추었다는 춤도 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것은, 생태계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주기도 하였고, 춤추는 사람들의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몸짓들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였다.

몸짓들이 꽤 힘든 것이어서 중간에 휴식시간을 가졌는데, 문윤형 님은 그 시간에, 문래동이라는 장소에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과 각자 사이의 인연과 그에 따른 추억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공원에서 찾아와서는, 그것을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였다. 나는, 배급된 과일주스를 다 먹고 남은 빈 테트라팩을 들고, 꽤 오래 전 설날에 영등포 청과시장에 들럿다가 남도극장에서 설날 귀성하지 못한 사람들과 《깊고 푸른 밤》을 본 이야기, 그리고 그보다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80년대 초에 여의도와 영등포를 비교 체험하러 영등포에 왔다가 경원극장 내지는 연흥극장에서 《호메스》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상영된 알랭 들롱 주연의 프랑스 느와르 《3 hommes à abattre》3>를 본 이야기를 하면서, 남도극장·경원극장·연흥극장이 지금은 없다고 말하였다.

생태명상을 끝내면서 문윤형 님은 50년 뒤의 문래동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하였다. 나는,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라는 토를 달면서,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답하였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생태계의 법칙에 위배되는 말이었다. 생태계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일단 변화를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인 위에서 보다 나은 변화 즉 진보를 꾀한다. 그런데, 현명한 사람들의 그 현명함이 ‘허용’한 변화가 낳은 지금의 현실은, 인류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나로 하여금 가지게 하였고, 그런 나에게 문윤형 님의 마지막 질문은 쉽지 않은 것이었고, 나는 앞뒤 자르고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답해버렸던 것이다.

후기의 후기

활동을 하다보니 상상력이 19세기 말 이후의 영등포로 제한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 이전의 영등포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졌다. 20세기의 영등포가 21세기의 영등포에 영향을 주었듯, 18세기 그리고 그로부터 더 거슬러 올라간 세기의 영등포도 21세기의 영등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번 활동이 영등포구의 다른 지역과 영등포구에 인접한 지역들에 대하여 더 깊고 넓게 생각하여보는 활동의 단초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방을 하면서 ‘지리의 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지도를 보고, 직접 돌아다녀보고, 약도를 그려보기도 하는 것을 통하여 문래동의 여기저기에서 보이지 않던 통시적 공시적 연관들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1. 이유진, 〈어린이, 소수자를 발견하고 긍정하다 – 『모랫말 아이들』 독후기〉, 매거진 《생태적 지혜》

  2. 권범철 님은 매거진 《생태적 지혜》에 〈[도시에서 예술하기] ① 공통하기와 예술하기〉와 〈[도시에서 예술하기] ②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연마하기〉 등의 글을 연속해서 실었는데, 이는 아마도 2023년 10월 29일의 강연 〈문래동의 도시생태학; 예술행동과 커먼즈〉의 내용을 다듬은 것인 듯하다.
    ・ [도시에서 예술하기] ① 공통하기와 예술하기
    ・[도시에서 예술하기] ②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연마하기

  3. ‘세 번째 희생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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