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정치 세미나(9월 모임후기)

에릭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에 관한 세미나가 2021년 9월 한달간 매주 일요일마다 오후2시 연구공간L 주최로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되었다. 10월 모임에서도 『자본의 시대』를 이어서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참여 문의: 010.2716.0746

역사와 정치 세미나

■커리큘럼 :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정도영 옮김, 한길사, 2020.

■일시 : 2021년 8월 15일 (일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내용

세미나 소개 및 진행 방식에 대한 논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그로인해 야기된 여러 사회·정치적 현상들을 진단하기 위해 마련된 논의 공간입니다. 『자본의 시대』는 맑스주의 역사가인 에릭 홉스봄의 역사서 시리즈 중 하나로서, 그가 서술한 시대의 궤적을 좇음으로써 현대에 대한 통찰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해 선택한 세미나의 디딤서입니다. 진행 방식은 세미나원의 참여를 높이는 발제의 형식이지만 발제 형태는 발제자의 재량에 따릅니다. 다만 발제자는 준비한 영역에 대해 다른 세미나원들의 길잡이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둡니다. 세미나는 2시간의 본문 파악과 20분 가량의 질의응답으로 구성합니다. 향후 일정은 홉스봄의 시대 3부작 완독과 맑스주의 페미니즘 이론가인 실비아 페데리치의 3부작 완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서문과 말머리: ‘자본주의’(capitalism)이라는 말은 19C 중반에 등장한 세계의 정치·경제를 지시하는 새로운 용어이다. 세계는 자본의 영향 하에 이미 잠식해 있지만 그 태동은 불과 1860년대였다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해 세계 시민의 삶은 자본주의적 전복을 겪는다. 홉스봄은 자본의 최초 순간과 그 팽창 과정을 다양한 맥락에서 진단한다. 시기적으로 1789 ~ 1848 혁명의 시대, 그리고 1848 이후 ~ 1875(대공황이 시작되는 시점)을 구분해 자본의 시대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비유를 통해 자본의 시대를 평가한다. ‘경제와 기술의 드라마’, ‘진보의 드라마’, ‘고난의 드라마’. 홉스봄이 연출한 드라마에 따라 우리는 앞으로 진행될 여러 사건들을 자본의 맥락에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일시 : 2021년 8월 22일 (일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내용

-1여러 국민들의 봄’: 48혁명 이후 영국의 수출물량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프로이센에서는 주식회사가 늘어나고 자본은 경기순환의 첫 시기를 맞게 된다. 유럽 전체가 호황기에 들어서면서 혁명 후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들이 진정되기 시작한다. 더 정확히는 혁명을 지속할 수 있는 분위기로부터 이탈한 것이고 정부들에게 혁명으로 인해 어그러진 지배체제를 수습할 여력을 준 것이다. 홉스봄은 ‘1850년 자본주의적 경기순환의 최초(호황)-1857년 뉴욕 은행 도산으로 시작된 불황-1860년 (대)호황-1873년 빈에서 시작된 불황(대공황)’의 추이로 19C 중반의 경기활황 과정을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최초의 경기활황은 특별한 기술·과학 혁명(생산력의 획기적인 변화)을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축적된 자본의 이윤율 저하의 영향으로 분석한다. 그 영향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는데, 자본의 이윤율 확대와 하나의 자본주의적 세계의 창출이다.

-2대호황’: 세계시장의 조성은 대호황을 예견했다. 사실상 이것이 홉스봄의 주된 논지이다. 영국의 경제발전이 세계시장의 확장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처럼 자본의 시대로 명명한 19C 중반의 경기활황의 원인도 같은 것으로 진단한다. 세부적으로 골드러시, 사기업의 자유화 경향, 자유무역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의 경제발전의 물꼬를 튼 섬유산업은 이후 석탄과 철도와 같은 중공업 분야로 확장되기 시작하고, 1870년 중반 이후 전기·화학 분야의 혁명적 기술발전의 도움을 받아 자본은 대호황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3하나가 된 세계’: 자본주의 발전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팽창하는 형태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주변부로 확산되기 시작하며 세계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의’ 실체로 등장한다. 유럽의 자본가, 탐험가, 선교사들은 더 먼 주변부로 진출하고 뒤이어 종교와 상품들 그리고 함대가 침투하게 된다. 세계가 경제적 측면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불황의 국제적 확산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폭발적인 자본의 팽창은 혁명의 잔해들을 수습하는 지배자들의 유용한 먹잇감이 되었고, 사회주의자들을 패배감에 젖게 만들었다. 결국 이 시기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을 압도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4분쟁과 전쟁’: 경제적인 것의 부흥은 자연스럽게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진출을 허락했다. 동시에 노동계급의 등장, 급진 민주주의 운동 및 국가와 민족과 관련한 복합적 정치국면 등은 분쟁과 전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분쟁은 새로운 민족주의 논의를 가능케 했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사건들을 예로 들고 있지만, 홉스봄이 보기에 본질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의 팽창과정이 전쟁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자본의 팽창이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동하면서 전쟁 가능성도 같은 노선을 밟게 된다.


■일시 : 2021년 8월 29일 (일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내용

-5국민들의 형성’: 민족과 국민국가에 대한 개념적 추이를 공간과 사건을 통해 짚어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민족주의의 출현과 국민국가(nation state)의 형성은 자본의 시대에 맞물려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허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양자는 필연적 연관성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얽혀 접목된다. 전지구적 방식의 자본의 흐름은 반드시 국가 간의 거래에 기반해야 했기 때문에 국민국가를 형성하겠다는 일련의 움직임들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단일한 정치적 구조물을 건설하고자 했다. 즉 ‘네이션’(nation)은 결국 인공적인 가공의 산물이며 민족이라는 불분명한 개념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장치였다. 이에 따라 국가주의와 그에 대항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홉스봄은 민족주의가 갖는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조작된 신화라는 관점을 고수한다.

-6민주주의 세력들’: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장치로 설명하고 있다. 혁명의 시대 이후로 현실 정치체로서의 자유주의는 형식적으로는 과두적이었으나 실상은 민중에게 개방되는 형태로 나아간다. 1848혁명 이후 소수 지배집단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지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혁명의 여지를 잠재울 수 있는 유리한 지배 형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민주주의의 발흥은 정치적 지배의 체계화와 자본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혁명은 더욱 암울한 미래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부의 양극화 현상은 중간지대를 침식하면서 이 시기에 대중이라고 하는, 특히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이 당시 유일한 대중노동 운동은 맑스주의에 입각한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7패배자들’: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는 근거를 자본의 고유한 형태, 즉 호황과 불황의 주기인 자본주의적 경기순환이 나타나는 것으로 제시한다. 영국의 산업화에 따른 국제적 경제활동은 자본의 확장적 성격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홉스봄은 영국의 산업혁명의 원인을 세계시장의 확장에서 찾고 있다. 결국 자본의 시대에 패배자들은 시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식민지 제국들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팽창은 비유럽 국가들에 대한 유럽화를 노골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강요하게 만들었다. 인도, 중국, 이집트가 대표적인 침략의 대상으로서 그 유럽화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고 있다.


■일시 : 2021년 9월 5일(일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내용

-8장 ‘승리자들’: 서유럽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른바 승리자들이 있었다. 앞서 패배자들(이집트, 중국, 인도 등)이 이른바 유럽의 시대의 희생제물이 되었던 것과 반대로 미국과 일본은 서유럽이라는 중심부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강대국이 아니었으나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서부로 얻는데 성공했고 또한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여 지리적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남아메리카는 영국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여전히 노예제를 채택하고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반면 북아메리카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는 상황이었고, 동서를 잇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급속도로 발전을 하였다. 홉스봄이 해석하는 미국의 남북전쟁은 공업화vs농업(남부가 외부적으로는 노예제라는 이슈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홉스봄이 보기에 진정으로 노예제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기보다 이미 남부는 패배를 직감했고 정치적 이슈를 통해 최소한의 이득을 얻어내기 위한 태도였다), 즉 북부의 자본이 확장하면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사태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결과는 북부자본의 승리였고, 영국의 영향권이 미쳤던 남부가 전쟁에서 지게 됨에 따라 미국은 유럽이 손 댈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중심부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조건에 의해 유럽의 직접적 식민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홉스봄이 보기에 서구와 너무 다른 이질적인 문화와 인종에 대한 일종의 편견, 무시로 인해 방치된 이유도 컸다. 그러한 심리적 요인(우월주의, 제국주의 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오히려 자본의 확장에만 관심이 이었던 미국이 일본의 개항을 부추겼고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서구화를 진행하게 된다. 이러한 ‘급격한’ 서구화에 대한 홉스봄의 설명이 인상적이다. 모국어 폐지, 서양 민족과의 혼교를 통한 ‘열등한’ 유전적 혈통의 개량이라는 이른바 사회 다윈주의적 인종이론을 실제로 (일시적이지만) 일본 상층부 인사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단순히 서구화의 과정을 겪었던 여타의 국가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특이한 경우였다는 것이다.


■일시 : 2021년 9월 12일(일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내용

-9변화하는 사회’: 자본주의를 대체할 사회를 구상하는 노력이 무색해질 만큼 사회가 급격하게 변했다. 자본의 확장은 멈출 줄 몰랐고 이에 대항한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위한 운동이 19세기 3사분기에 일어났다. 그것은 ‘식민지 혁명’, ‘러시아 혁명’, ‘미국 혁명’이다. 당시 맑스는 부르주아 사회의 승기를 빼앗을 새로운 전략을 구상했고 앞서 두 혁명에 대해서는 예측 성공했지만 미국 혁명에 대한 예언은 빗나갔다. 영국은 유럽의 최중심부였기 때문에 식민지 혁명은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에서 영국의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 아일랜드 혁명의 급부상을 지켜보면서 맑스가 구상한 첫 번째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공산당선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로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청신호가 되어 이것과 그것이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 혁명이 독특한 점은 자본주의 성숙 과정을 거치지 않고 러시아 특유의 문화인 촌락공동체주의에서 곧장 공산주의적 발전으로 이행될 것이라는 관점이 (심지어 맑스에게 조차, 그렇다고 강력하게 그 입장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미국혁명에 대한 예측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농업공황의 결과 ‘국헌과 국체 전체의 기반’인 농민들의 힘이 약화되고 투기꾼들과 대기업가들이 차츰 정치를 장악하게 됨에 따라 시민들 사이에서 심한 반발이 일어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미국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러시아와 미국을 묶어 2대 강국으로 하나로 치부했으며 이에 대해 홉스봄은 양대국의 발전 양상은 현저하게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이 점을 맑스가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10장 ‘토지’: 토지와 농업부문의 변화는 함께 파악되고 있다. 물론 그 변화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정치적 자유화, 농민봉기 등이 주된 영향을 주었다. 자본주의적 농업의 두 가지 형태인 프로이센형과 아메리카형은 대기업적 경영, 소상공 경영의 전신으로 파악한다. 홉스봄은 농업부문의 변화도 일국적 변화라기보다 자본의 세계적 확장에 의한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상업적 농업의 진행, 자본축적, 임노동인구의 방출과 같은 변화는 세계적 규모에서 파악해야 농촌의 점진적 해체와 변화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일시 : 2021년 9월 19일(일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내용 :

-11장 ‘인구의 이동’: 농업 위주의 삶이 해체되면서 19세기 중반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인구이동이 시작된다. 1848년~1875년 사이에 900만 이상의 유럽인이 유럽을 이탈한다. 물론 이동량을 따진다면 이후 세기와 비교할 수 없지만 전체 인구대비 그 비율이 이례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구이동의 원인은 무엇보다 ‘공업화’에 따른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공업화의 메카인 영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구이동이 발생했다.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농촌 출신이었는데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신대륙을 밟기 시작하면서 급격한 도시화도 시작된다. 도시로 인구가 과밀됨에 따라 갖가지 슬럼가가 생겼고 각종 치안 문제 등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농촌으로부터 이동해 온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산업노동(공장노동의 형태)에 익숙해져야 했고 분업화·전문화의 초기 형태의 노동에 일상을 끼워 맞추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행이라는 개념이 이 당시 생겼다는 것인데 노동자들이 영구이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이민을 간 것이 이른바 서민들의 여행이었다. 반면 중산층의 여행은 말 그대로 여가를 위한 관광이었고 이때부터 관광산업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가 발달하게 된다. 그 이전에 관광산업이 발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안전문제가 걸림돌이었기 때문인데, 철도가 놓아짐으로써 예기치 못한 인재를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먼 거리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철도는 경제의 세계적 확장을 야기했으며 사람들의 이동, 삶의 형태의 변화, 문화의 변형 및 창조까지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3사분기에 이전에는 발길조차 드물었던 해안절벽이나 바다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던 고지대가 휴양지로 대성황을 이루었고 해당 토지 소유자들에게 놀라운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온천장의 활성화는 당대 지성인 및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당시 온천장의 지위는 외교적·정치적·문화적 메카와 같은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근처에는 호화스러운 호텔, 고급 매춘업소, 카지노 등 부르주아적 여가시설이 들어서게 됐다. 가령 나폴레옹3세와 비스마르크가 만난 곳도 대표적인 온천장인 비아리츠라고 언급한다.

연구공간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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