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서울과 윤석열의 대한민국, 그 이후를 생각하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다는 실망 속에서도 우리 사회는 충분히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2012년과 2022년 두 번의 대선을 통해 실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순간에 대해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쿨’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호기롭게 오후 6시 이후 텔레비전도 딱 끄고 sns도 들여다 보지 않고, OTT의 쇼 프로그램이나 즐기다가 다음날 아침 뉴스를 열어 헤드라인을 확인하고 “허, 역시!” 한 마디 픽 던지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0년 전, ‘정치 관심없는 요즘 젊은 것’이었을 때의 나처럼.

그러나 나는 출구조사가 나오는 시간부터 텔레비전의 리모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앞으로 이어질 오랜 마음 고생을 예고하는 것임에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출구 조사에서 졌다. 이건 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출구조사가 뒤집힌 예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투표율이 너무나 높다! 게다가 차이는 너무나 근소하다. 내일 아침을 걱정하면서도 눈을 붙였다 뗐다 하며 새벽까지 3사의 개표 방송을 번갈아 보았다. 투표율, 사전 투표 결과의 근소함, 초반 우세가 희망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12시가 지난 이후 실망과 우울로 나는 다음날까지 꼼짝을 하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었다.

이것은 2012년 12월 19일의 이야기이자, 2022년 3월 9일의 이야기이다. 10년의 시차를 두고 이번 대선은 2012년의 기시감을 짙게 불러일으켰다. 박근혜가 당선되던 그날 밤의 분노, 우울, 그리고 포기로 이어지던 그 감정의 롤러코스터도. 당선되지 말아야 할 자와 당선이 예상되는 자가 같다는 분노, 높은 투표율에 대한 기대, 근소한 출구조사. 사실 ‘그 밤’과 너무나 닮아있기에 결과도 동일할 것이라는 예상이 들어서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대 한번도 보지 못한, 1퍼센트 차이도 나지 않는 초근접전이 희망을 품게 만들었고…

길바닥에서 보낸 그 차가운 많은 겨울 저녁들과 어둠을 밝힌 빛들은 다 어디로 갔나? 사진출처 : Dhivakaran S
길바닥에서 보낸 그 차가운 많은 겨울 저녁들과 어둠을 밝힌 빛들은 다 어디로 갔나?
사진출처 : Dhivakaran S

세상이 정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나는 울분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기로 20년 전 어떤 우세하던 대선 후보는, 그 자신도 아니고 아들이 병역을 기피했을지 모른다는 의혹만으로 국민적인 지탄을 받다가 영영 대권에서 실패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이제 사람들은 병역이니 몇십 몇백 억이니 성상납이니 심지어 약물 스캔들에도 웬만해서 꿈쩍하는 모습들이 아니다. “뉴스에서 하도 억, 억 해대니 몇백만 원은 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고 어릴 때 어떤 어른이 뇌던 말을 기억하는데, 그런 느낌인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지배층의 잘못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그걸 바로 잡는 방향이 아니라 그것쯤이라고 용인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알기로는 인간이란 학습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5년 전에 무능하고 자기 생각이라고는 없는 데다 상당히 비합리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고 의심되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바람에, 그 권력을 둘러싼 탐욕스런 무리들이 활약하는 바람이 국가 시스템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학습했거나 적어도 학습했다고 생각했다. 그 무능과 탐욕과 비정상적인 권력 이양에 대해 민주주의 공화국의 사법시스템을 거쳐 준열한 심판까지 함으로써 마무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기시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길바닥에서 보낸 그 차가운 많은 겨울 저녁들과 어둠을 밝힌 빛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치를 개혁하겠다고 외친 사람들은 왜 기득권 지키기 하나만큼은 본인들이 개혁하려는 대상과 다름이 없었단 말인가. 그리고 왜 그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특권의 대물림을 수정하기 위해 시스템을 손보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후안무치를 비판한답시고, 부끄러움을 모른 체하는 세력보다 부끄러움 따위 없다고 말하는 세력을 더 지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은 정말 의문투성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키배’거리로 즐기고 마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가, 선거가 단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고 이기는(혹은 내가 싫어하는 인간들이 지는 꼴을 보고 싶은) 스포츠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추동하는 정치세력에 표를 던져놓고서도 전기세나 의료보험료는 여전히 저렴하고 평등할 것이라 믿는 어떤 분들의 순수함은 존경스럽기는 하되 그것을 이해할 만큼 내 영혼이 그렇게까지 맑지가 않다. 나랏돈이 싸라기 한 톨만큼이라도 북쪽을 향해 흘러간다는 상상에도 흥분을 하지만 나랏돈을 뭉텅뭉텅 떼서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는 뉴스를 보면 거참 능력있다고 칭찬하는 국민이 이 나라의 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나는 아직 거기에 속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에 몸을 기대어야 하는 소시민일 뿐, 브랜드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나를 보호해 줄 성곽도, 부동산의 영토도, 아버지 어머니의 빛나는 이름은커녕 내 이름의 주식 한 주 없는 무산계급일 뿐인 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고루 나누어져야 할 파이를 뭉텅이로, (그것도 껍질은 남기고 가운데만 파내서!) 한입에 털어넣지 말라고 고함이라도 질러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시민사회 활동이 부정되지 말아야

서울시의 사업에 투입된 활동가들은 관의 사업과 함께 자기의 활동을 병행하느라 과로에 갈려나갔다. 사진출처 : Jo Szczepanska
서울시의 사업에 투입된 활동가들은 관의 사업과 함께 자기의 활동을 병행하느라 과로에 갈려나갔다.
사진출처 : Jo Szczepanska

지난 해 서울시장이 바뀐 후 나는 내 직업의 영역에서 이미 그와 같은 경험을 겪고 있었다. 시장이 바뀌었을 뿐인데 내 주위에 열심히 일하던 활동가들은 한순간에 동력을 잃는 것을 넘어 세금 도둑의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예산 삭감을 시작으로 서울시의 새로운 수장은 마을 공동체 활동을 상처입히고 도시재생을 산송장으로 만들었다. 단돈 300원짜리 볼펜 한 자루를 사는 데도 수없는 결제와 증빙을 거치게 만들었던, 그래서 두세 배의 업무량으로 활동가들을 괴롭히는 시스템이 사실은 관변단체들의 불투명한 회계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단체들이 관의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돈은 최저임금 수준의 인건비와 사업비였을 뿐 단체 운영비를 가져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투입된 활동가들은 관의 사업과 함께 자기의 활동을 병행하느라 더욱 과로에 갈려나갔다는 사실에는 입을 다문 채, 관변단체들과의 밀월을 협치라고 부르고 시민사회단체들의 역량 투입은 특권이라고 부르는 궤변 속에 활동가들은 속절없이 모욕을 당했다. 그와 똑같은 일이 내 삶의 전 영역에서 일어나게 생긴 것이다.

거기에다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혐오와 차별을 내세우는 수권 정당의 존재였다. 야만과 천박함도 하버드에서 배워왔다고 말하면 야만이 아닐 수가 있는지, 대놓고 존재를 혐오하고 불평등을 강화하고 차별을 추동하자는 자들이 이렇게 각광을 받을 수가 있을까? 물론 배제와 혐오가 달콤하다는 건 안다. 그리고 입에 달다고 마구 집어삼켰다가는 충치와 당뇨가 온다는 것도 사람이면 다 아는 상식이 아닌가. ‘머리에 힘을 주고’ 차별과 혐오를 외면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그 정도의 위선이라도 부리는 게,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는 합의조차 없는 나라였단 말인가. 이렇게 겹겹이 절망을 하려던 차였다.

2012년, SNS에서 ‘패배’했다고 느낀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의 계정을 정리하고, 이젠 정치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 앞길이나 닦고 돈이나 벌며 살겠노라고 자력갱생의 주문을 외웠었다.

시민단체의 희망은 결국 풀뿌리 시민들

그런데 2022년, 뭔가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여성단체와 시민단체에 기부를 하고 다투어 인증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엄혹한 시절이 다시 올 것이니 싸우는 사람들과 같이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마치 선출되지 못한 자기 현실을 가리기 위해 천박한 방식으로 자기 브랜드를 다져가는 어떤 수권 정당의 당대표가 혐오와 차별을 내뿜으면 내뿜을수록 전장연에 후원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듯이. 그때 그 ‘물결’을 보며 나는 2012년의 어두운 기시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상이 바뀌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극우로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날로 기득권의 강고함을 위해 움직이기만 하는 시스템 속에서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 이후 내가 본 것은 아직 싸우는 시민들의 연대, 어둠을 밝혀줄 또 다른 불꽃의 시작이었다. 이 불을 어떤 방법으로 꺼지지 않도록 이어갈 수 있을까? 활동가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주호

황선영 또는 글 쓰는 주호. 세기말 천리안 통신 활동에서 走狐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을자치와 도시재생활동가. 공유경제와 공유밥상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자. 성북동에서 곰과 강아지와 함께 산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