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詩가 피어난다

효율적으로 간명하게 정리된 몇 마디 말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망설임의 표정이나 몸짓, 눈빛, 작은 떨림 등을 온전히 다 담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얼굴을 맞대고 앉아 표정을 보고, 안색을 살피고, 앞에 놓인 커피 향을 함께 음미하면서 둘 사이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 순간, 메말랐던 내면이 촉촉해지면서 우리는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詩 쓰는 고양이 모모
詩 쓰는 고양이 모모

녀석은 그야말로 ‘업둥이’였다. 옆 건물 지붕 위에 사는 길냥이 부부가 병든 제 새끼를 작업실 현관 앞에 물어다 놓은 것이다. 고양이가 글씨를 쓸 줄 알았다면 필시 ‘아픈 아기를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남겼을 터였다. 피 끓는 어미의 절규를 짐작하고도 남을 만큼 아기냥의 몰골은 처참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몸은 앙상하게 말라서 갈비뼈가 다 드러났고, 눈에서 나온 진물이 얼굴을 뒤덮어서 아예 앞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항문은 엄지손톱만한 마른 똥을 매단 채 불쑥 탈장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그런 꼴을 하고도 기어이 살겠다고, 물에 불린 사료를 입에 대주면 할딱할딱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날부터 팔자에 없는 고양이 병수발이 시작되었다. 눈이 안보이니 벽이나 가구에 쿵 부딪히는 충돌사고는 일상이었고, 변비로 꽉 막힌 대장이 방광을 조절하는 중추신경을 누르는 바람에 방안에 오줌을 뚝뚝 흘리고 다녔다. 갈수록 약은 더 늘어났고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리며 관장을 해줘야 했다. 나는 점점 작업실에 밤늦게까지 남아있는 날이 늘었고, 출근시간도 앞당겨졌다. 아침에 작업실 문을 열 때마다 혹시 밤사이 병약한 목숨이 꺼져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녀석이 말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련만, ‘너 지금 필요한 게 뭐냐?’ 물어도 눈먼 아기냥이는 그저 이애옹 이애옹 작은 소리로 울어댈 뿐이었다.

이름은 ‘모모’라고 지었다. 안약을 꾸준히 넣으면서 다행히 눈도 슬슬 보이기 시작했고, 녀석에겐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었던 변비 문제도 해결되었다. 장애는 조금 남았지만 어느새 장난기 많은 청소년 냥이로 쑥쑥 자라났다. 그리고 그동안 나도 조금 자랐다. 부끄럽지만 이 에피소드는 고양이 모모가 아니라 내 내면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합리적인 말로는 다 설명 못할, 풍부한 삶의 향기

다들 알겠지만, 누군가를 보살피는 행위는 그 대상에게 도움을 주는 것 이상으로 나 자신을 성숙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동물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에 더더욱 그러하다. 또박또박 합리적인 말로 의사전달이 안 되다보니, 상대방이 보내는 소리, 냄새, 몸짓, 색깔, 눈빛 등등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오늘 변 색깔을 보니 상태가 좀 나아진 걸까? 저 울음소리는 배가 고프다는 걸까, 놀아달라는 걸까? 배를 문질러주면서 눈꼽을 떼주면서 조심스레 이런저런 신호를 살핀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신호일수록, 성급하게 판단한 내 짐작이 틀릴수록, 그 다음번에는 더 많은 고민과 더 미세한 배려가 뒤따르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 시간동안 그 녀석 또한 나와의 교감을 위해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세심하고도 복잡한 내면의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이 마치 시(詩)와 같다고 느꼈다. 더 예민한 촉수와 미학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관계는 그렇게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닐까?

너와 나 사이를 이어줄 시적상상력이 필요한 때

혹시 고양이 모모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간이었다면 관계가 더 쉬웠을까? 나는 오히려 말로 대화할 수 없는 동물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같은 언어로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의 깊은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간명하게 정리된 몇 마디 말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망설임의 표정이나 몸짓, 눈빛, 작은 떨림 등을 온전히 다 담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요즘처럼 카톡 메시지 몇 마디, 이모티콘 몇 개에 소통을 의존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앉아 표정을 보고, 안색을 살피고, 앞에 놓인 커피 향을 함께 음미하면서 둘 사이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너와 나 사이에 시(詩)가 피어나는 순간, 메말랐던 내면이 촉촉해지면서 우리는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고양이 모모는 오늘도 내 무릎 위에 앉아 고로롱고로롱 시를 쓰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병원보 2018년 여름 vol.90에 실린 글입니다.

시루

시루는 내 할머니가 쓰던 마녀의 수프 냄비. 오래된 지혜로 빚어낸 그 그릇에, 내일의 지혜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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