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그게 뭔데? – 『인류세』 이야기

인간의 흔적이 담길 지층이 나타나려 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류세라 부르기 시작했다. 인류세라 부르면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더 잘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인간과 지구의 공존을 위해서라면 뭐든 고민해도 좋지 않을까

인류세? 그런 단어 첨 들어보는데

클라이브 해밀턴 저 『인류세』 (이상북스, 2018)
클라이브 해밀턴 저 『인류세』 (이상북스, 2018)

인류세. 요즘 사람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단어다. 며칠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거 같다. 오히려 이 단어를 들어본 사람은 환경이나 생태 문제에 관심이 제법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적어도 한국에선. 며칠 전 친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류세 이야기가 나와 그 단어 들어 봤냐고 물었다. ‘글쎄’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친형은 그래도 인문학적 소양과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분 말고 내 옆에 10년째 인격 수양하시는 아내에게 다시 ‘인류세’라는 말을 들어봤냐고 물어봤다. 식탁 위에 놓여진,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보고 처음 그 단어를 봤다는 말이었다. 아내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다. 책을 많이 좋아하지도 않으며, 생태 환경에 대해 큰 관심도 없고, 아이들 걱정에 유기농 식품을 찾고, 재활용 쓰레기 분리만 챙겨서 하는 소시민이다. 그런 아내가 모른다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물론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중에 이 단어를 들어보거나 관심을 가져본 사람은 드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쉽게 일반화하려는 것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쉽지 않을 듯하다.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인류세, 영어로 anthropocene. 어원을 분석해도 마찬가지인 인간의 시대다. 솔직히 이 책 『인류세』에서 다루는 내용은 처음 환경 생태 분야 서적을 드물게 접하거나 인문학 서적과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에게 권하기는 쉽지 않다. 안타깝지만 인류세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는 약간 결이 다른 책이다. 인류세에 관한 사전적 지식과 일반적 의미들을 담은 책은 아니다. 그럼 무슨 책인가.

그래서 그 책은 무슨 이야기래?

인류세. 2000년 파울 크뤼천이 처음 주장한 개념이다. 인간이 지구의 지질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니 인류anthropos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의 증가, 방사능의 흔적, 우리가 자주 먹는 치킨의 흔적들. 이것들이 이전의 지질과 다르게 구분되는 지층을 형성할 것이라는 말이다. 자 이렇게 이해했으니, 인류에게 닥친 문제가 있다면 이 이해를 기반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인류세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주지는 않나 보다. 늘 그렇듯 개념의 합의는 저 높은 이데아에서나 가능하리라. 현실에선 개인들과 무리에 의해 늘 이렇게 저렇게 이해되고 해석된다. 인류세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인류세라는 개념이 제기된 직후 수많은 과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인류세에 관한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다.”(p.35)

보통 단어,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다르면 그렇게 이해하는 이유가 있을 법하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해가 다른 것은 종종 그 저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저의는 지구를 어찌 다룰까 하는 문제다. “다루다”의 문제다. 이 책에 나온 바로 편을 나누자면 “에코모더니즘”과 “신인간중심주의”으로 나누고, 근본 생태주의는 너무 나이브한 “그냥 지구‘냅둬’주의자들”로 나눌 수 있는데 근본 생태주의에 대해선 많은 논의를 하지 않는다. 에코모더니즘은 인간의 힘과 과학기술로 지금의 난관을 극복한다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즉, 인간이 지구를 완전히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신인간중심주의는 좀 다르다. 지구라는 시스템을 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한다. 물론 여전히 인간도 주체다. 인간과 지구 시스템 서로 주체이기에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신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통제가 완전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이 지구를 완전히 다룰 수 없다. 지구 시스템이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지구에 대한 행위성을 상실한다. 성난 지구는 인간이 원하는 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지구가 화나지 않게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구가 화나지 않아야 인간이 살 수 있으니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주체는 또 다른 주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말은 지구와 인간 사이에도 성립된다. 오독의 여지도 있지만, 대략의 정리다.

이와 같은 주장 안에서 생각보다 많은 철학적 이야기들이 오간다. 이 때문에 입문서로 권하기 갸우뚱한 것이다. 책은 두껍지 않지만, 책에 담긴 철학적 내용이 적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또한 이 생각들의 대결 구도는 포스트모던 관련 논의와도 불가분한 성격이 짙다. 그렇다면 논쟁의 여지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의 개념을 생태와 환경과 관련해서 논의한 부분들도 등장하는데, 이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인류세? 홀로세? 그게 그렇게 중요…, 난 모르겠네”

지질시대 역사상 가장 특이한 지층을 하루도 쉬지 않고 만들고 있다. 사진은 폐타이어 쓰레기장. '인류세의 새벽'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by Cugerbrant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awn_in_the_Anthropocene.jpg
지질시대 역사상 가장 특이한 지층을 하루도 쉬지 않고 만들고 있다. 사진은 폐타이어 쓰레기장. ‘인류세의 새벽’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런데 갑남을녀에게 지질시대 구분이 삶을 사는 데 큰 의미가 있는가. 철수니 영희니, 안그래도 마스크 쓰고 다닌다고 바쁜 사람들이 인류세가 뭔지 홀로세가 뭔지 알게 뭔가. 그나마 포털 사이트에 나온 기후변화 기사는 챙겨 볼 테지. 환경 관련 신문 기사라도 챙겨본다면 ‘지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관심 가지는 영희와 철수가 내겐 더 소중하다.

역사학에서도 시대를 나누기가 쉽지 않고, 시대를 구분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학에서도 그렇게 그럴진대 역사학이랑은 연구 대상의 시간 단위부터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지질학은 말해 무엇하랴. 지질학이 대상으로 하는 시간대는 지구가 탄생하고 난 직후부터인 45억 년이다. 지금 시대를 ○□△라고 하자 해서 바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시대 구분을 해도 인류한테만 의미가 있겠지, 짖어대는 개한텐 무슨 상관이겠는가. 시대 구분을 한다 해도 이 단어를 의미 있게 이해하거나 사용할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을 것 같다.

홀로세라고 해도 인류세라고 해도 지금 글 쓰고 있는 여기 창밖을 내다보면 이산화탄소 방귀를 뀌는 자동차들이 다니고 우리집 음식물 쓰레기통 안에는 어제 먹다버린 닭뼈가 있을 뿐. 닭뼈, 음식물 쓰레기 분리인지 일반 쓰레기 분리인지 구분하는 것이 내겐 더 중요하다. 아내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날이 참 덥다.

김영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만 하다가 2, 30대가 지나가 버린 아저씨. 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옆에 있는 경기도에 사는 지구인. 행복을 찾아 아직도 고민 중인 호기심 많은 호모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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