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환의 이야기 -생태 위기 속에서 아이스퀼로스의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 읽기

아이스퀼로스의 희곡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는 인륜과 규범 자체 그리고 그것들의 급격한 변동 등 대단히 무거운 주제에 대한 성찰의 실마리를 담고 있는 텍스트로 평가되어왔다. 이 텍스트는 생태 위기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자기 전환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 같다.

조금 기이한 심판장을 보여주는 드라마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

아이스퀼로스 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숲, 2008)
아이스퀼로스 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숲, 2008)

역자 천병희 씨는 아이스퀼로스의 고전 비극 희곡들을 번역하여 한 권의 책1으로 묶어 내면서 제시한 ‘작품 소개’를 통하여,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존하는 유일한 비극 3부작인 이른바 『오레스테이아』(Oresteia ‘오레스테스 이야기’란 뜻)의 세 번째 작품 「자비로운 여신들」2은 오레스테스가 죽은 어머니의 혼백이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며 찾아간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에서 시작된다. 오레스테스는 아폴론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아폴론은 오레스테스에게 아테나이로 가서 재판을 받도록 지시한다, 아테나 여신의 주재로 아레이오스 파고스 법정에서 고소인인 복수의 여신들과 변호인인 아폴론의 피고인 심문이 끝난 뒤 아테나이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투표가 진행된다. 유죄와 무죄의 투표가 동수를 이루자, 아테나 여신의 캐스팅 보트에 의해 오레스테스는 무죄 방면된다. 복수의 여신들은 격분하여 아테나이에 새로운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테나 여신은 이들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이른바 ‘자비로운 여신들’로 순기능을 하도록 설득한다.”3

왕 아가멤논과 왕비 클뤼타이메스트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죽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아들이 어머니를 죽인 것이다. 극은 이 사건이 아테나이의 아레이오스 파고스 법정에서 다뤄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테나이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투표로 결과가 정하여지는 것 등 대체적인 상황을 보면, 이 극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극 속의 상황을 재판이라 치면, 거기에는 원고와 피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원고·피고를 중심으로 법정에서 대립하고 있는 진영을 정리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듯하다.

원고: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혼백

피고: 오레스테스

원고 변호자: 복수의 여신들

피고 변호자: 남신 아폴론

법정 주재자: 여신 아테나

배심원: 아테나이 시민들

기울어진 심판장에서 행하여진 선의의 간섭

정체성에 따라 열거하여 보자면, 이 극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남신, 여신들, 왕자, 시민들, 혼배이라 할 수 있다. 열거하면서 어떤 존재를 먼저 적어야 하나 잠깐 망설였다. 이 존재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희곡을 읽다보면 이들 사이에 위계질서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등장인물들은 엇비슷한 힘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투표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목소리를 내지도 않지만, 여신 아테나와 거의 동등한 투표권을 가진 듯하다. 투표 결과가 1:1이 아닌 상황에서는 여신 아테나의 표와 배심원 하나하나의 표의 무게가 같다는 말도 나온다. 그렇지만, 투표 결과가 1:1인 상황이 벌어지자, 여신 아테나의 표가 더 무겁게 여겨져서 그것이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결과가 오레스테스의 면책이다. 여신 아테나가 오레스테스의 어머니 살해라는 죄를 벌하는 것을 반대하는 쪽에 투표한 것이다. 여신 아테나는 투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오레스테스를 위해 이 투표석을 던지노라. 나에게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니라.” [735~736]4 이러한 말이 곧 투표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주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심판장이 어느 한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충분히 보여준다.

기울어진 심판장은 선의의 간섭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복수의 여신들이 심판의 결과에 불만을 터뜨리자, 아테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대들은 가서 이 엄숙한 피의 제물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시오. 그리고 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래에 붙들어놓고, 유익한 것은 올려 보내 이 도시가 승리하게 하시오!” [1006~1009]. 복수의 여신이 아니라 자비로운 여신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천병희 씨는,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이른바 ‘자비로운 여신들’로 순기능을 하도록 설득한다”고 설명하였다. 적절한 설명 같다. 우선 ‘새로운 질서’라는 말에 주목하여야 할 듯하다.

아주 먼 옛날에는 여자가 제사장이었다고 한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남자가 제사장을 도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변화의 순간에 여자 제사장은 급격히 초라하고 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복수의 여신은 복수가 중요한 사회의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복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중요해진 사회에서 복수의 여신은 계속 중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 속 여신 아테나는 이러한 상황 변화 속에서 복수의 여신들에게 자비로운 여신이 되라고 권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더 이상 복수가 중요한 세상이 아니니 복수의 여신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역할을 하도록 하여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주기 위해 선의의 간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전환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에서 복수의 여신들은 줄곧 자기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막판에 가서 여신 아테나의 선의의 간섭를 받아들여 자비로운 여신으로 변신할 것을 다짐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복수의 여신들이 보여주는 처신은 아주 구차하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그런 처신이 구차해보이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창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듯하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시종일관(始終一貫). 이런 것들이 좋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때와 장소와 상황을 막론하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 품은 마음 변치 않는 것이 그냥 관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사회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이득이 되는 세력이 큰 힘을 가지고 있다면, 관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이야기를 사회에 널리 퍼뜨리고자 할 것같다. 사회를 자신의 이윤 창출에 맞게 설정해 놓은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자기가 설정하여 놓은 경로를 공동선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것 혹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세’이라고 선전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경로에 의존하는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은밀히 의식화하려 들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복수의 여신들이 보여 준 바와 같이 너무 가볍게 변신하는 태도 앞에서라면, 관성을 미덕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나 은밀한 의식화 따위는 힘을 가질 수 없을 것만 같다. 복수의 여신들의 변신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유연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아테나의 간섭은 선의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꽤나 관용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일편단심과 시종일관을 표방하는 태도는 기존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에서 이익을 보는 세력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부작용의 고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에서 경쾌한 변신을 보여주는 것은 복수의 여신 만이 아니다. 다음의 대사를 보자; “이제 피는 잠들고 내 손에서 말라버렸으며, 모친 살해의 오염은 씻겨나갔소이다. 오염이 신선할 때, 포이보스 신의 화롯가에서 새끼 돼지의 제물에 의해 정화되고 제거되었던 거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찾아갔는지-그분들은 나와 만났어도 피해를 입지 않았소- 처음부터 시작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요.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정화되기 마련이니까요.]” [280~286] 오레스테스는 마치 피묻은 손을 씻어내면 아들로써 어머니를 죽인 죄는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인 양 말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정도로, 경쾌하게 태도를 바꾸고 있다. 오레스테스의 이러한 말을 고대 그리스 사회가 규범의식이 아직 확고하지 못한 사회였다는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누군가 그러한 판단을 한다면 역으로 그가 지나치게 익숙한 경로에 의존하여 관성적으로 사고하는 데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물건을 더 많이 팔기 위해서 하는 수많은 광고들은 그 자체로서는 대단히 창의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특정 물건을 욕망하게 만들고 그 결과 물건을 만드는 원료 즉 생태계의 특정 부분에 대한 편중된 사용을 계속하게 만든다. 사진출처 : Vlad Alexandru Popa
물건을 더 많이 팔기 위해서 하는 수많은 광고들은 그 자체로서는 대단히 창의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특정 물건을 욕망하게 만들고 그 결과 물건을 만드는 원료 즉 생태계의 특정 부분에 대한 편중된 사용을 계속하게 만든다. 사진출처 : Vlad Alexandru Popa

지금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치관의 혼란을 걱정한다. 규범의 동요를 걱정하기도 한다. 다 해볼 만한 걱정인 듯하다. 이에 못지않게, 지나친 경로 의존이나 관성적 사고도 심각한 걱정거리인 듯하다. 물건을 더 많이 팔기 위해서 하는 수많은 광고들은 그 자체로서는 대단히 창의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특정 물건을 욕망하게 만들고 그 결과 물건을 만드는 원료 즉 생태계의 특정 부분에 대한 편중된 사용을 계속하게 만들고 그것은 생태계에 심한 불균형이 빠른 속도로 일어나게 만드는 것 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몇몇 사람이 광고가 조장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다른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면, 그런 선택은 생태계의 불균형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인륜과 규범 자체 그리고 그것들의 급격한 변동 등 대단히 무거운 주제에 대한 성찰의 실마리를 담고 있는 텍스트로 평가되어 온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에서 하필 복수의 여신들과 오레스테스가 보여주는 자기 전환 같이 부차적이고 미미한 현상이 눈에 뜨인 까닭은, 지금 여기에서, 광고가 조장하는 획일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자기 전환, 달리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철저한 관철과 그에 따른 생태계의 균형 파괴를 늦추고 균형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한 자기 전환이 요청되는 시점이라는 걱정이 작동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1.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고양: 숲, 2017.

  2. 위와 같은 책, 147~194쪽.

  3. 위와 같은 책, 148쪽.

  4. ‘[ ]’ 속의 숫자는 원전에 표기된 행수이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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