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모두가 억울하다 -이야기 ‘바리공주’를 읽으며 더 나은 공동체를 생각하기

평생을 완벽하게 행복만 누리면서 살아서 여한이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삶은 지극히 드물 것이다, 여한은 그저 개인의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쌓이는 것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얽히고 쌓여가는 것이기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여한 없는 삶 아니 여한 없는 죽음에 근접한 더 나은 공동체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야기 ‘바리공주’를 읽으며 그 조건을 생각해 봤다.

이야기 ‘바리공주’는 ‘바리데기’·‘오구풀이’·‘진오귀굿’·‘칠공주’·‘무조전설(巫祖傳說)’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리공주다. 바리데기라고도 한다. 이 존재는 신 내린 무당[세습무]에게 내린 신으로, 지노귀굿에 모시는 신이다. ‘지노귀’가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노귀굿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굿이다. 그래서인지 사령(死靈)굿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씨끔굿’·‘오구굿’·‘망묵이굿’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지노귀굿에서 무당이 구연하는 노래 가운데 자신의 몸에 모신 신의 내력을 설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부분을 따로 구분하여 ‘바리공주’라 부르고, 이를 구비문학 연구에서는 서사무가(敍事巫歌)로 분류한다. 이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주로 굿을 통하여 구비 전승되는데, 구연자와 전승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는 공통성도 상당히 강한 이야기들이 전국 각지에서 전승되어오다가 20세기 들어 채록되고 연구되어 이야기 ‘바리공주’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리공주의 ‘바리’는 ‘버리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며, 한자로 ‘捨姬公主’ 또는 ‘鉢里公主’ 라고 적기도 한다고 한다. 죽은 지 49일 안에 한다는 것 때문에, 불교에서 사후 49일 만에 올리는 49재와 유사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두 의례의 중심 사상과 절차는 확연히 다르다.

사회정치적 갈등, 실존적 성장, 가족애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바리공주’ 항목에서 집필자 서대석은, 이 여러 가지 ‘바리공주’ 이야기들을,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

① 옛날 국왕 부부가 딸만 계속 일곱을 낳는다.

② 왕은 일곱째로 태어난 딸을 내버린다.

③ 버림받은 딸은 천우신조로 자라난다.

④ 왕은 병이 든다.

⑤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신이한 약물이 필요하다.

⑥ 만조백관과 여섯 딸이 모두 약물 구하는 것을 거절한다.

⑦ 버림받은 막내딸이 찾아와 약물을 구하겠다고 떠난다.

⑧ 막내딸은 약물 관리자의 요구로 고된 일을 여러 해 해 주고 그와 혼인하여 아들까지 낳은 뒤 겨우 약물을 얻어 돌아온다.

⑨ 국왕은 이미 죽었으나, 막내딸은 신이한 약물로 아버지를 회생시킨다.

⑩ 그 공으로 막내딸은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 ‘바리공주’를 다룰 때,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5단 구성에 따라 그 구조를 설명하고, 이 구조가 곧 영웅 설화의 ‘탄생-버려짐-고난-목적 달성-신이 됨’의 구조이기도 하다고 보면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중등교육 수준에서 이야기 ‘바리공주’가 논의될 때는 이 5단 구성에 따라 논의가 전개되는 듯하다. 이때 이야기 읽기는 사회정치적 갈등과 실존적 성장의 간접체험이 될 듯싶다.

한편 인터넷 daum백과 《초등문학사전》의 ‘바리데기[바리공주]’ 항목에서, 집필자 신동흔이 제시한 자문자답과 예시들은 초등교육 수준에서 이야기 ‘바리공주’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바리데기에 대해 더 생각해보기

* 바리데기를 만난 길대 부인[바리데기의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 버린 딸을 되찾아서 기쁘면서도 딸에게 미안하여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 바리데기를 만난 오구대왕[바리데기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 버린 딸을 되찾아서 기쁘면서도 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자신이 죽고 나면 바리데기가 아내인 길대 부인을 잘 모시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이 만약 바리데기속 인물이라면 어떠한 행동을 하였을지 말하여 보기

* 내가 ‘바리데기’ 속 인물 중 길대 부인이었다면, 오구대왕이 아이를 버리라고 하여도 버리는 척하면서 몰래 다른 곳에서 아이를 잘 키웠을 것입니다.

* 내가 ‘바리데기’ 속 인물 중 바리데기였다면 이야기 속의 내용처럼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약수를 찾으러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신동흔은, 초등 학령 수준에 한정하여, 이야기 ‘바리공주’를 가족애를 의식화할 수 있는 계기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향유하는 개인 혹은 집단에 따라 이야기는 다양하게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서대석의 설명도 다양한 자리매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풀이, 모심, 또 다른 의미의 풀이

서대석이 간추려놓은 것에서 볼 수 있다시피, 바리공주는 죽은 아버지이자 왕 달리 말하자면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 그러니, 그런 바리공주가 깃든 몸을 가진 무당에게서, 사랑하는 망자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을 법도 하다. 서대석도 사령제에서 ‘바리공주’가 구연되는 것이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산 사람의 희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부활이 아버지를 살려낸 효(孝)이며, 왕을 살려낸 충(忠)임도 덧붙여 주장하였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는 신이 깃든 몸을 가진 무당이 병든 자를 치유해 줄 것을 기대하는 풍조도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죽은 자를 살린 바리공주는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 될 만도 하였고, 이야기 ‘바리공주’의 끝부분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이 실현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무당은 굿을 하면서 이러한 바리공주 이야기가 들어있는 무가를 불렀다. 이는 곧 자기 몸의 주인인 신의 내력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서대석은 ‘주신에 대한 본풀이’라고 하였다. 이 풀이[푸리]는 무당의 몸에 깃든 신에 대한 설명이다.

모든 사람의 죽음을 관장함이 바리데기에게 더하여지니, 이야기 ‘바리데기’는, 개인에서 집단으로, 다시 인류 전체로, 숭앙의 범위가 확대되는 원리를 보여주는 서사로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Prashant Gupta

무당은 왜 이런 설명을 하는가?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면, 신을 굿판에 등장시키는 일을 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를, 입장을 바꿔서, 무당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신을 무당의 몸 안에 모심으로써 무당이 굿판에서 신의 언행을 재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풀이는 곧 모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풀이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여볼 수 있겠다. 서대석에 따르면, 동해안 오구굿에서는 바리공주가 저승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많은 원령(怨靈)들을 천도(薦度)[죽은 사람의 넋이 정토나 천상에 나도록 기원함]하는데, 이는 곧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구천(九泉)을 떠도는’ 혼령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怨)의 뜻은 “원망하다·슬퍼하다·한탄하다·미워하다‘ 정도로 풀이한다. 이에 비하여 원(冤/寃)의 뜻은 ”원통하다·죄 아닌 죄“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두 글자는 엄밀히 하자면 구분하여 사용하여야 하나 혼용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원령은, 이루지 못한 바가 있는 상태에서 죽은 까닭에 이승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영이거나, 죄 아닌 죄로 벌을 받아 죽은 자의 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상사를 살펴보면 이런 원령이 발생할만한 죽음은 분명히 있을 듯하고, 아직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 민감한 자들은, 그 원령의 원망하는 힘이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법하다. 이때, 무당이 자기 몸에 깃든 바리공주 같은 신의 힘을 빌어[반대로 말하자면 이승과 저승을 다 가보았으며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 바리공주가 무당의 몸과 마음을 부려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구천(九泉)을 떠도는’ 혼령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일 또한 풀이라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무속에서 풀이[푸리]는 중의적이면서도 지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이렇듯, 신을 설명[풀이]하고, 신을 모시고, 구천을 떠도는 혼령을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 혼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억울함을 해소[풀이]함에 더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의 죽음을 관장함이 바리데기에게 더하여지니, 이야기 ‘바리데기’는, 개인에서 집단으로, 다시 인류 전체로, 숭앙의 범위가 확대되는 원리를 보여주는 서사로 볼 수 있다고, 서대석은 설명하였다.

알고 보면 모두가 억울하다

그런데, 옛부터 지노귀굿을 행한 사람들은 몇몇 죽음에만 억울함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지노귀굿이 모든 죽음과 관련하여 행하여질 수 있었던 것이었던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노귀굿을 한 사람들은 모든 죽음에 억울한 구석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죽음에 억울함이 있다는 것은 곧 삶에 억울함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결국 예로부터 지노귀굿을 행한 사람들은 한 점의 억울함이 없는 삶이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니 옛 사람들의 삶에 대한 생각과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대한 생각을 비교하여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남 탓한다’는 말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이 꽤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다가 나를 돌아보니, 나 또한 때로는 남 탓하는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남 탓한다는 것은 스스로 져야하는 책임이 있는데도 그것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 혼자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 아닌 불행이나 불이익 또한 없을 수 없을 듯하다. 억울함이란 그런 불행이나 불이익이 발생했을 때 느끼는 감정일 듯하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왜 그런 불행이나 불이익, 그런 억울함은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 된 느낌이 느껴지는 것일까? 혹시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여서인가? 억울함을 토로한다는 것은 자기의 실패를 광고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스스로 실패를 드러낸다는 것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 스스로 퇴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억울함에 관심 가져줄 만한 여유가 없는 공동체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사진 출처 : Aamir Suhail

어떤 사회, 어떤 공동체가 더 나은 것일까? 모든 사람이 각각의 억울함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고 지노귀굿이 꽤 널리 행하여지는 공동체가 더 나은 공동체인가? 공동체 전반을 긍정의 분위기가 감싸고 있으며 각 개인도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각자 독립적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는 한편, 실패가 용인되지 않으므로 실패의 기미라고 할 수 있는 억울함을 각 개인이 애써 숨기는 경향이 강한 공동체가 더 나은 공동체인가?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일 것이다. 다만 이런 와중에도, 억울한 일은 전혀 겪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런 만큼 누군가의 억울함에 관심 가져줄 만한 여유가 없는 공동체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주 열심히 산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원 없이 살다 가셨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빈소에서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었음에도 해주지 않았거나 해주지 못한 것을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은 나의 미흡함이 그로하여금 작은 것일지라도 아쉬움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하진 않았는가 하는 데에 미치게 될 듯하다. 원 없는 삶은 지극히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면서도 지노귀굿은 싫다면, 해원(解冤) 즉 쌓인 원을 풀어서 상생(相生) 즉 서로를 살리는 다른 방도라도 모색하는 공동체가 더 나은 공동체일 듯하다.


[인용·참고 자료 출처]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바리공주’ 항목 (집필: 서대석)

인터넷 《daum백과》〈초등문학사전〉 ‘바리데기’ 항목 (집필: 신동흔)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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