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이 돼라. 사이에 머물러라 – 『천개의 고원』을 읽고

8개월 동안 수업의 느낌을 돌아보며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노마드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한다. 영토화와 탈영토화, 패인 홈과 매끈한 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끈한 홈은 과연 불가능한가? 차이와 거리가 없어지고 시간과 공간이 붙어있는 현재에 대해 고민한다. 애도에 대해 생각한다.

1. 천개의 고원

들뢰즈・가타리 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3)
들뢰즈・가타리 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3)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들어온 생각은 일단 ‘어렵다’ 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어렵다’였다. 그 다음 바로 든 생각은 ‘그래도 뛰어난 사람이 이렇게 어렵게 글을 쓸 때는 이유가 있겠지. 열심히 따라가 보자’였다. 6개월 즈음 수업의 막바지에 이르러 가지게 된 생각은 ‘왜 이렇게 어렵게 썼을까’였다. 현재, 모든 수업을 마치고 감상문 아닌 감상문을 쓰는 지금은 ‘조금 더 쉬운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가득하다.

이렇듯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한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감탄한 지점은 수많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면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분야와의 결합과 통찰이었다. 유목을 단순히 부동산에 묶어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결하고 분해하고 재결합했다든지, 국가기관이라는 권위에 맞서는 전쟁기계라는 설정이라든지 이런 과정을 통해 『천개의 고원』이 단순하게 읽혀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여러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읽는 사람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향에서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다.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갖고 있지 않다.’

『천개의 고원』, p678

유목에 대한 그의 견해가 뛰어남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쟁기계가 국가내부의 기관이 아닌 외부에 존재하는 기관이라는 견해는 탁월하다. 국가가 없으면 전쟁도 없고 국가가 있더라도 내부의 방향이 아닌 외부의 방향으로 작용하기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전쟁기계의 정체성을 유목에서 찾은 점도 독특하지만 수긍된다. 유목과학에 대한 부분 또한 마찬가지다. 과학이라는 예시를 통해 주류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고 소비되며 재생산되는지 설명하며 유사과학 혹은 주변과학이 주류로 편입되기 위한 과정을 통해 유목이 필요함을 설명하고 있다.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갖고 있지 않다. (『천개의 고원』, p678)’ 사진 출처: Christine Roy,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갖고 있지 않다. (『천개의 고원』, p678)’
사진 출처: Christine Roy,

하지만 때때로 다른 부분에서 그들의 통찰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특히 전쟁기계를 도구와 무기로 예시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아쉽다. 무기의 본질이 외부성이고 속도성임을 이야기하면서 투척으로의 거리성이 빠진 것은 왜일까. 거리는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가 아닐까. 물론 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거리에서 시간이 발생하며 시간은 모든 차이의 시작이다.

도구는 대상과의 거리가 맞닿아있다. 상대하는 대상물을 개량하거나 이용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야기하는 내적인 힘의 작용과 같다(원심력). 무기는 대상과의 거리가 멀다. 목적물까지 도달하는 데 시간이 발생한다. 그래서 속도가 중요하다(구심력). 힘의 방향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외부의 물질을 변화시키려는 작용이다. 즉 도구든 무기든 상대를 예속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힘의 작용이 외부를 향하고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본질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계속 얘기하던 유목과는 확실하게 다르게 보인다.

‘금속은 물건이 아닐뿐더러 유기체도 아니라 기관 없는 몸체이다.’

『천개의 고원』 p.790

여기에서 나는 대장장이에 주목하게 되었다. 도구와 무기를 설명하고 유목하는 전쟁기계를 설명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목한 것은 광산이고 대장장이였다. 여기에서 그들의 통찰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똑같은 대장장이가 같은 방식으로 만든 도구와 무기를 다르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기관 없는 몸체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대장장이다. 그의 책에서 진정으로 유목하는 자는 전쟁기계가 아닌 대장장이가 아닐까. 유목민이 아닌 그들 곁에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대장장이가 진정한 유목하는 자로 보임은 왜일까.

2. 노마드, 순간과 영원

내가 『천개의 고원』 그 중 노마드를 통해서 주목한 것은 탈영토성이다. 노마드를 이야기하며 단순하게 영토성에 묶여 정주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야기했다. 우리는 정주가 아닌 모든 다른 방식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주가 아닌 다른 것은 이동인가?

아니다. 노마드를 이야기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장기와 바둑이야기를 했다. 바둑의 유목성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보자. 탈영토성이라기 보다는 어디서나 순간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순간성이었다.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순간적 이동이며 거리를 극복하는 힘, 즉 탈시간성이다. 탈시간성에는 순간 외에 또 하나가 존재한다. 영원이다. 영원과 정주는 비슷하지만 명백하게 다르다. 정주는 머물러 있으나 소멸하면 본질도 같이 소멸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는 바위산과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순간과 영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맞닿아있다. 우리는 인터넷과 그 인터넷이 연결된 모바일기기를 소유함으로써 모든 세상과 동시에 연결될 수 있는 탈공간하며 탈시간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시대는 순간과 영원이 공존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는 우리는 그곳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억지로 스스로를 지우는 노력을 해야만 영원성을 소멸시킬 수 있다. (물론 진짜 전부 지워진다고 가정하자.)

순간과 영원이 공존하는 세상, 이전 세대 어느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3. 패인 홈과 매끈한 면, 가장자리와 사이, 자유와 도주

‘억압이 문명을 만든다.’

2강 교안, p4

문자와 숫자가 인류의 가장 커다란 발명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관리하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것 또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듯 문명은 지배논리를 발생시킨다. 그것은 이미 발생되었고 발동되었다. 우리가 과연 저 거대한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문자와 숫자가 없는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피할 길이라고는 없는 한없이 막힌 홈 패인 공간. 
사진 출처: Damir Babacic
피할 길이라고는 없는 한없이 막힌 홈 패인 공간.
사진 출처: Damir Babacic

문명이 홈 패인 공간이고 비문명이 매끈한 공간이라는 이분법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를 정의하기 위해 문자를, 숫자를, 문화를, 예술을, 전쟁을,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학문을, 과학을, 문명을, 국가를, 공동체를 이용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수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에는 그 해법이 보이질 않는 것은 아닐까.

주변인이 되라. 사이에 머물러라. 패인 홈과 매끈한 공간 사이에 존재하라. 사이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이 생길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이미 우리에게는 주어진 진정한 자유는 없다. 자유를 이야기하며 예속 받으려 하고 도주하며 자유를 꿈꾸는 우리는 매끈한 홈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많은 이가 홈 패인 공간을 손가락질하며 매끈한 면에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 혹은 매끈한 면은 없다며 패인 홈에서 안정적으로 살라고 타이른다. 나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과연 전적으로 패이기만 홈이 있기는 한 것이며 한없이 매끈하기만 한 면이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어떤 것이든 공간이든 행동이든 양가적, 아니 삼가적, 사가적, 무한가적의 다양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애도의 방법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애도의 마음이 너무 커 자신의 존재성 자체를 거부한다.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길로 글쓰기에 커다란 의문을 표시하나 결국 그녀에 대한 글을 남김으로써 애도한다. (『애도일기』, 롤랑바르트)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애도 방식에 대한 논란은 너무나 아쉽다. 모두가 강박적으로 패인 홈으로 다른 이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죽어간 곳을 상기하라. 인간의 문명이 총집합된 갇힌 장소, 좁은 골목길, 답답한 그곳, 피할 길이라고는 없는 한없이 막힌 홈 패인 공간.

우리는 다만 그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데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가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에게 감사한다. 그가 남긴 글은 인터넷 공간이 아닌 현실에도 영원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밝은 방』, 『사랑의 단상』, 『애도일기』)

노지훈

누구나 찾아와 기댈 수 있는 공원의 작은 벤치 같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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