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마을에서 살아가기

인류가 지구공동체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위해는 '마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과 자연을 통합된 시각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과 의식을 전환이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아이의 여정

골목을 따라가면 고양이들을 만나게 된다.
사진출처 : user32212
골목을 따라가면 고양이들을 만나게 된다.
사진출처 : user32212

가장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보면 마을이 있다. 아주 작고 오래된 마을. 미로같이 이어지는 집들 사이사이 작은 골목마다 누군가 있었다. 덕분에 작디작은 마을을 빠져나오기까지 꽤 여럿에게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뒷집에 사는 사람은 등나무 아래에서 만난다. 조금 아래에 고양이들이 지내는 골목이 있다. 맞은편 외삼촌과 외숙모 집을 지나면 하얀 솜이불이 널려있는 솜틀집 부부를 만난다. 솜틀집 앞에는 꽃과 나무가 있는 공터가 있다. 향나무 오솔길을 지나면 철도 건널목에 철길 안내원, 꽃집 겸 화랑을 운영하는 아주머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얀 강아지가 짖고 있는 목재소까지 지나고 나면 마침내 ‘보험 할머니댁 손녀’ 아닌 평범한 길 위의 아이가 된다. 그 길을 매일 지나며 모든 존재에게 인사해야만 했다. 어느 날 타이밍을 놓쳐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했다. 마을의 아이에게는 인사하는 것은 일과이자 습관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인사를 하지 않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반갑게 건넨 인사에 화답하지 않는 마을 밖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혹은 아파트에 갔다가 몇백 채 집과 수십 명 존재를 그냥 스쳐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비를 따라다니고 꽃을 따서 노는 것보다 화면 앞에 앉아서 노는 것이 더 즐거워지기 시작하면서가 아니었을까. 마을 밖의 삶과 마을 안의 삶은 꽤나 달랐다. 마을은 안전하고 편안했지만, 때로는 고리타분했고, 가부장적이었다. 마을 밖 세상은 모험적이었고, 다채로웠고 자유로웠다. 마을을 떠나면 왠지 내게 주어진 역할을 벗고 나만의 색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처음으로 살던 동네를 벗어났을 때 무척이나 즐거웠다. 드디어 보험 할머니댁 손녀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신나는 마음에 노래가 흥얼흥얼 나오는 가벼운 걸음으로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다. 새로운 풍경의 경이로움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이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익명성은 고립이 되었고, 해방은 외로움이 되었다. 평생(?)을 부대끼며 살았던 마을의 아이에게 처음 찾아온 ‘혼자됨’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마을에서 나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문제는 ‘마을’이 아니었다.

지구 마을과 인간종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마을과 공동체는 산산조각 나고 있다. 예전에 우리가 흔히 말했던 끈끈한 ‘마을 공동체’는 사라져가고 있다. 특히 도시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관심은 오지랖이 되고, 진심은 TMI가 된다. 하루가 멀다하고 인간/비인간 동물들을 포함한 생명이 고통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각자 살아남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누구를 챙기냐고. 인생은 결국 혼자라고.

그러나 어떤 존재들도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외딴 곳에서 홀로 지낸다 하여도 이미 마을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부터 그러지 못하는 부분까지 넓고 때로는 깊게 관계망은 연결되어있다. 소소하게는 내가 사는 공간과 그 주변, 소속된 모임, 크게는 지역, 국적, 거대한 자연 생태계까지. 우리는 지구라는 커다란 마을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나의 삶은 단지 인간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식물, 동물, 미생물-까지 영향을 미친다.

지구는 그 기능이 하나의 단일체처럼 통합되어 있어서 지구의 모든 국면은 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영향을 받는다. 생명체와 같은 이러한 특질 때문에 지구는 조각난 파편 상태로 생존할 수 없다.

토마스 베리 『우주 이야기』 중에서

마을을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잃어가는 이유는, 인류가 사실은 지구마을의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장류(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생명체의 완성형이라며, 홀로 존재할 수 있을 것처럼 지구를 대해왔다. 쉽게 착취하고 파괴했다. 특히 최근 300여 년 동안은 인간중심주의, 진보의 신화 아래에 스스로 생태계 순환 고리 밖에 존재한다 믿어버렸다. 지구는 순식간에 “인간과 가축의 행성:이 되어버렸다. 약 1만 년 전에는 조류를 포함한 척추동물 중 인간과 가축은 0.1%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32%, 가축은 65%이며 인간도 가축도 아닌 육상 척추동물은 불과 3% 밖에 되지 않는다. 사라지는 생물종, 기후재난, 전쟁과 사고, 계속되는 분열과 단절 속에서 인류는 지구 공동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모자라 스스로의 서식지마저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라는 마을에서 인간이라는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출처 : stokpic
우리는 지구라는 마을에서 인간이라는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 출처 : stokpic

그러나 긴 흐름의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인간이 지구와 착취적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 인류는 생태 순환의 흐름 속에서 공존해왔다. 모든 존재들과 상호 호혜적이고 상호 의존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지구 공동체의 일부로서 기능했다. 존재들의 주고받음이 명확하게 보일 때도 있었고,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지구적 차원으로 보면 그 순환은 완성되었다. 마을로 존재하고 서로 돌보았다. 그랬던 우리가 마을의 일원임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마을, 연결, 관계 맺기

다시 마을을 떠나 혼란을 겪은 이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새롭고 재미난 것이 지나고 외롭고 괴로울 때 마침내 나를 구한 것도 다름 아닌 마을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아는 사람들과 비인간 동물들도 생겼다. 새로웠던 풍경은 익숙해졌으며 그곳은 매일 찾아갈 수 있는 위로가 되는 공간이 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새롭게 마을이 구성된 것이다. 같은 공간이었지만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괴로웠다. 그러나 연결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되찾은 것이다. 열쇠는 ‘연결’이다.

지구마을의 삶도 마찬가지다. 떠날 수도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공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수많은 과정들이 있었으며, 나의 존재 또한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영향을 미치고 또 받는다. 우리는 상호 연결된 존재(Inter-being)이다.이러한 연결감 속에서 사는 삶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지구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 존재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너의 안녕은 나의 안녕이고, 너를 챙기는 것은 나를 챙기는 것이다. 그 누구의 생도 혼자 살지 않는다.

마을에서 태어나고 마을에서 자랐지만, 마을을 싫어했고 떠났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 여정 속에서 이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마을’이라는 말을 새롭게 정의할 수는 없을까? 가부장과 인간 중심 사회를 넘어서서, 지금 우리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꼭 맞는 마을의 의미를 찾고 만들어갈 수 있을까? 마을살이와 공동체란 말에 지친 모두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네가 살고 싶은 마을은 어떤 거야? 너를 살아있게 만드는 마을은 무엇이야?

○ 모든 생명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마을
○ 아름답고 신나는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는 마을
○ 마음껏 춤추고 웃을 수 있는 마을
○ 각자가 가지고 있는 빛을 마음껏 내뿜을 수 있는 마을
○ 아무도 판단당하지 않고 폭력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는 마을
○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을

효선

생명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구를 만들어가고 싶은 인간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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