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과 타협을 발굴하다 -제주도 굿의 〈궤네깃또〉 본풀이 읽기

궤네깃또는 제주 북제주군 김녕리의 마을 수호신이다. 제주도 무가 궤네깃또 본풀이에는 궤네깃또가 신이 되는 역정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기존의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그 주인이 되는 힘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치유하는 실마리로 삼기도 하고, 어린이에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다른 값진 것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았다.

김녕리 어느 마을의 신 궤네깃또

제주 북제주군 구좌읍 김녕리, 마을 남쪽에 자그마한 굴이 있고, 굴 안쪽에는 반석으로 된 소박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굴 옆에는 큰 팽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 팽나무를 신목으로 하면서 굴에 신을 모셔 정기적으로 제의를 올렸는데, 그 신을 궤네깃또/‘궤네깃한집’/궤눼깃당이라 하고 그 신당을 궤네깃당 이라 한다. 작가 여연은 궤네깃또라는 이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궤네기또’라는 신명은 동굴을 의미하는 ‘궤’에 태생의 의미로 쓴 ‘네기’, 그리고 신(神)을 의미하는 ‘또’가 결합된 것이다.”1 궤네깃또에 대한 제의(祭儀)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올리고 지내므로 ‘돗제[豚祭]’라 하였고, 일제강점기까지는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돼지를 잡아 제단에 올리고 굿을 하여왔는데, 제주 4.3,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에 따른 미신타파 정책, 2000년 태풍의 피해로 팽나무가 부러지는 자연 재해2 등을 겪으며 소멸되어가는 대신 가정별로 매년 또는 2, 3년에 한 번씩 정월 달에 택일하여 집안에서 돗제를 지내는 경우가 생겼다고 한다.3 이에 따라 제의의 목적도 공동체가 아닌 집안의 안전과 생업의 풍요를 비는 것으로 변하여 가고 있을 듯하다. 공동체 차원에서 제의를 했을 때 제의의 일부로 심방[무당]이 궤네깃또가 궤네깃당의 신이 되어 돗제를 받게 된 유래를 설명하여주는 노래[본풀이]를 하였는데, 어느 심방이 하느냐에 따라 본풀이의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그 차이는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할 수는 있는 정도의 차이였다.

다음은 김헌선이 본풀이를 정리한 것이다.

“제주도의 알손당[下松堂里] 고부니물에서 솟아난 소천국과 강남천자국의 백모래밭에서 솟아난 백주또가 부부가 되어 송당리에서 살았다. 아들 다섯을 낳고, 여섯째 아이를 임신 중일 때 백주또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편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사냥만 하던 소천국은 부인의 권유에 따라 피씨 아홉 섬지기나 되는 밭을 갈고, 백주또는 남편의 점심으로 밥도 아홉 동이, 국도 아홉 동이를 차려놓고 돌아왔다. 이때 어떤 중이 지나다가 점심을 달라고 하므로 소천국은 점심 놓아둔 곳을 가리키며 먹으라 하고는 계속 밭을 갈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이 모조리 먹고 도망가 버린 것이다. 소천국은 할 수 없이 밭 갈던 소를 잡아먹었는데, 이것으로도 모자라 이웃 밭의 소 한 마리를 더 잡아먹고 나서야 겨우 요기가 된 듯하여 배로 쟁기를 밀어 밭을 갈고 있었다. 점심 그릇을 가지러 온 부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남의 소까지 잡아먹었으니 소 도둑놈이 아니냐, 살림을 분산하자.”라고 화를 내므로 소천국은 헤어져 나와 수렵생활로 돌아갔다. 얼마 있어 백주또가 여섯째 아들을 낳으니, 이 아들이 곧 ‘궤네깃한집’이다. 아들이 세 살이 되자 소천국에게 업고 가니,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 앉아 아버지 수염을 뽑고 가슴팍을 치곤하므로 아버지는 불효 자식이라 하여 아들을 석갑에 담아 동해에 띄워버렸다. 석갑은 동해 용왕국에 들어가 산호수 가지에 걸리게 되고, 용왕국의 막내딸에 의하여 내려져 용왕을 뵙게 되었다. 석갑 속의 아이가 장차 천하 명장이 될 것임을 안 용왕은 곧 막냇사위로 삼았다. 그런데 이 사위가 식성이 하도 좋아서 날마다 소와 돼지를 잡아 통째로 먹어 삼키니 머지않아 용왕국이 망할 듯하므로 용왕은 사위 부부를 석갑에 담아 다시 바다에 띄워버렸다. 석갑은 강남천자국에 떠올랐고, 궤네깃한집은 천자를 뵙고 강남천자국의 세변(世變)을 막으러 왔다고 하였다. 마침 세변으로 고심하던 천자는 이들을 정중히 맞아들이고, 변란을 평정하여 주기를 간청하였다. 곧, 억만 대병을 거느려 남북 적을 평정하여 주니, 천자가 크게 기뻐하여 후한 포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천자가 내어주는 억만 군사를 거느리고 전선(戰船)을 타고 제주도 소섬으로 올라와 옛날에 자기가 태어난 송당리를 찾아갔다. 이를 본 아버지는 겁이 나서 알손당 고부니물로 도망가 죽어 그곳 당신이 되고, 어머니는 웃손당 당오름에 도망가 죽어 그곳 당신이 되었다. 여섯째 아들 궤네깃한집은 노루·사슴 등을 잡아 아버지 영혼에 제사를 지낸 뒤, 방광오름에 가서 군사를 돌려보내고 좌정할 곳을 찾아 김녕리로 내려왔다. 김녕리는 지형과 풍치가 좋아 그의 좌정처로서 일품이었다. 궤네깃한집은 차일을 치고 7일 동안을 앉아 기다렸으나, 누구 하나 대접하러 오는 자가 없으므로 단골[信仰民]들에게 재해를 내렸다. 단골들이 이 사실을 알고 모여와 당신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식성을 물어보고는 “가난한 백성이니 소는 잡지 못하고, 가가호호에서 돼지를 잡아 위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여 매년 돗제를 지내는 신당이 되었다고 한다.”4

다음은 신동흔이, 해설과 비평을 적절히 삽입하며, 본풀이를 요약한 것이다.

토르의 망치도 결국 죽임이 아닌 살림의 도구이듯, 궤네깃또의 초상화에서 궤네깃또가 들고 있던 칼도 살림의 도구라고 하였다. 사진출처 : Eden, Janine and Jim

“궤네깃또는 제주섬 고부니마루에서 솟아난 소천국과 강남천자국 백모래밭에서 솟아난 백주또 사이에서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존재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 그 수염을 잡아당기고 가슴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타고난 반골성일 수도 있고,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궤네깃또는 무쇠석갑에 갇힌 채로 동해바다에 띄워지는데, 영웅의 일대기의 둘째 단계인 ‘버려짐과 죽을 위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로서는 버려짐이라기보다 큰 세계로의 여행에 해당하는 과정이었다. 바다를 흘러다니던 중 동해용왕 막내딸이 석갑을 열었을 때 옥같은 모습으로 책을 한 상 가득 받고 앉아있었다 하니 그야말로 여유만만이다. 막내딸과 짝을 이룬 뒤 궤네깃또는 날마다 소와 돼지를 통째로 먹어치워서 용궁 창고를 거덜낼 지경에 이른다. 바다를 내 세상으로 삼아 풍요를 마음껏 누린 일이다. 그렇게 그는 바다를 평정한다. 바다와 대륙을 평정한 궤네깃또가 천자의 제안을 뿌리치고서 행한 일은 백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향땅 제주로 돌아온 일이었다. 화려한 귀환! 그가 거제도 남해도 진도 완도를 거쳐 제주섬에 상륙하자 소천국과 백주또가 놀라서 달아나다가 죽어서 각기 알송당과 웃송당에 좌정한다. 일컬어 구시대의 종언. 궤네깃또는 부모를 제사한 뒤 백만 군사를 흩어 보내고 제주섬을 널리 둘러보다가 김녕리 궤네기를 마음에 드는 처소로 선택하고서 신으로 좌정한다. 해마다 큰 돼지 검은 돼지 흰 돼지를 제물로 받고서 마을을 보살펴준다. 평안하게, 그리고 풍요롭게.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일이다.”5

스스로 행하는 문학치료의 소재가 되어줄 수 있는 영웅

김헌선은 이 본풀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 본풀이는 영웅서사시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의 불화를 배경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이 바다에 버려져 곤란을 겪다가 아내를 구하고 다시금 버려진다. 그 후 강남 천자국에 가 그곳에서 괴물을 퇴치하고 수훈을 세운 뒤 고향으로 되돌아와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판도를 차지하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한다. 아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판도를 통해 전체 서사를 구성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판도는 겹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다른 곳에 가서 연마하는 영웅의 고독은 장차 자신의 판도를 개척하기 위한 필수적 단계이다. 남을 정벌해야 자신의 고향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영웅서사시의 근본적 문법이다. 영웅적 행위의 핵심 요소는 카마(Kama)와 다르마(Dharma)이다. 카마는 애정으로 여성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고, 다르마는 정의로 집단이나 인류의 적대자를 물리치는 것이다. <궤눼깃당본풀이>에도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나타나는데, 개인의 고독이 집단의 숭앙으로 바뀌게 된다.”6

신동흔은 궤네깃또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고 용왕국을 헤집어 놓았으니 바다를 평정한 셈이고, 강남천자국에 들어가 천자의 절을 받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니 대륙을 평정한 셈이다. 바다와 대륙을 동시에 평정한 존재였으니 그야말로 영웅이라는 이름이 부족하지 않다.”7

신동흔은 또한, ‘귀한 혈통과 비정상적 출생 – 버려짐과 죽을 위기 – 구출과 성장 – 공적 성취와 개선 – 박해자와의 투쟁과 승리 – 영광의 구현과 이례적 죽음’ 등으로 이어지는, 신화 분석과 스토리텔링에 널리 적용되는 서사 모형을 가지고 궤네깃또의 본풀이를 이해할 수 있음을 시사8하였는데, 이는 최원오가 궤네깃또의 삶의 여정을 ‘기아(棄兒) – 구조 – 결혼 – 무공(武功) – 귀환 – 좌정’으로 압축하고 이것이 영웅의 일대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한 것9과 마찬가지로 궤네깃또의 본풀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동흔은 토르와 궤네깃또를 비교한다. 신동흔은, 북유럽 신화 속 토르 같은 신이 생사의 경계를 넘어 초월적 세계에 진입하는 모습이 극히 인간적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그 신들의 모습이 열악한 환경이나 자연적 제약에 맞선 인간적 투쟁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신동흔은 토르가 손이 아닌 망치로 천둥을 일으킨다는 점 또한 인간적 문명성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신동흔은 토르의 망치도 결국 죽임이 아닌 살림의 도구이듯 궤네깃당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궤네깃또의 초상에서 궤네깃또가 들고 있었던 칼도 살림의 도구라고 하였다.10

자기가 든 것은 책뿐, 망치와 칼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내 삶의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든 다른 한 손에 궤네깃또의 칼이나 토르의 망치를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진출처 : As Dnyaneshwar

신동흔은 초상 속 궤네깃또 앞의 ‘한 상 가득한 책’에도 주목하였다. 책은 소 돼지를 통째로 먹고 괴물 장수들을 제압하는 장군 신 이미지와 안 맞아 보이는 요소지만, 이 신화 속 문화적 상징의 중핵을 이룬다는 것이 신동흔의 생각이다. “대륙을 제압하고 바다를 평정하는 일은 자연에 맞선 투쟁적 삶을 표상한다. 척박한 땅 거친 바닷속에서 힘들게 삶을 일궈온 제주사람들의 내력이 거기 담겨 있다. 책은 그들의 또 다른 도전이고 투쟁이라 할 수 있다. 버림받은 변방의 피지배자로서 겪는 차별과 소외를 공부와 지식으로 극복하겠다는 것. 궤네깃또가 책을 가득 안고서 큰 세상으로 나아간 데는 제주사람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밤을 밝히며 글과 씨름해서 스스로를 지키고 세워온 분투의 역사. 그것이 제주의 역사를 넘어 한겨레의 문명사라고 하면 시골구석에서 태어나 공부 하나로 길을 열어온 사람의 주관적 편견일까?”11 이러한 생각은 다소 비약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신동흔은 이런 생각을 ‘문학치료의 관점에서 내 안의 영웅서사를 돌아보기’12와 연결한다. 신동흔은 자신의 청년기를 회상하면서 그것이 낯선 도시로 던져져 열악한 환경에서 이어온 책과의 씨름은 힘든 투쟁이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에게 새 길을 열어주었지만, 자기가 든 것은 책뿐, 망치와 칼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내 삶의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든 다른 한 손에 궤네깃또의 칼이나 토르의 망치를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13

공존과 타협을 바라는 마음에 힘을 보태주는 이야기

궤네깃또의 본풀이를 영웅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궤네깃또를 보며 자기의 청년 시절을 돌아보고 스스로 내면을 치료하고 미래의 삶의 방향을 가늠해 보려 한 신동흔의 기획은 본받을 만해 보인다. 궤네깃또 본풀이를 다듬어서, 넓은 세계 여기저기를 누비며 다양한 세계상과 생활방식들을 접하고, 자신의 바람을 지혜로우면서도 거침없이 이루어내는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교육적으로 해볼 만한 일일 듯 싶었다. 그런데, 앞에 열거한 것들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궤네깃또 본풀이 속에는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새삼 되새겨 볼 만한 다른 요소들도 있는 것 같았다.

김헌선의 정리를 보면, 부모가 버린 여섯째 아들이 온갖 역경을 겪고 금의환향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버지는 겁이 나서 알손당 고부니물로 도망가 죽어 그곳 당신이 되고, 어머니는 웃손당 당오름에 도망가 죽어 그곳 당신이 되었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아버지 소천국은 육식을 주로 하는 대식가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소천국과 궤네깃또 사이의 긴장관계가 수렵문화로부터 농경문화로의 이행과정을 보여준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던 듯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아들 궤네깃또가 아버지 소천국을 완전히 이기고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고 본 듯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역사가 그렇게 되어왔으며, 그렇게 되는 것이 세계가 보다 나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아마도 부친살해[patricide]라는 개념이 이러한 생각과 관련되어있을 것이며, 역사를 논할 때 이는 패륜으로 평가되기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그 주인이 되는 것으로 평가되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지금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낡아보이는 것을 좋아하고자 하는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 덕에 인류는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편리와 효율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궤네깃또 본풀이에 보이는 궤네깃또와 그 아버지 사이의 갈등에서 궤네깃또가 그 아버지를 깨끗하게 대신하게 되는 것으로 정리하고 그 정리를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역사의 진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정을 어린이들이 잘 이해하게 되어야 미래의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 이런 생각을 그대로 둔 채, 김헌선의 정리를 다시 들여다보면, 도망가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죽긴 하지만 각각 알손당 고부니물과 웃손당 당오름의 당신(堂神)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아들 궤네깃또가 금녕리의 새로운 신이 되긴 하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도 각각 다른 동네에 가서 신이 된 것이다. 금녕리 주민들이 무당의 본풀이를 듣다가 이 대목을 들었을 때 반응이 어땠을까? ‘에이! 부친살해가 완성되지 못하였으니 진보가 완성된 건 아니군’ 하면서 아쉬워하였을까? 그러지 않고, 이리된 상황을 별 생각없이 흘려보냈을까? 어쨌든 지금 이 이야기를 바라보니 한 가족 구성원이 세 신이 되어 공존[coexistence/cohabitation]하는 모습도 보였다. 어찌보면 궤네깃또 본풀이는 부친살해 이야기라기보다는 공존으로 마무리된 갈등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김헌선의 정리를 다시 보면, 궤네깃또가 제주도로 돌아와 좌정할 곳을 찾는 대목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부분이 보인다.

“김녕리는 지형과 풍치가 좋아 그의 좌정처로서 일품이었다. 궤네깃한집은 차일을 치고 7일 동안을 앉아 기다렸으나, 누구 하나 대접하러 오는 자가 없으므로 단골[信仰民]들에게 재해를 내렸다. 단골들이 이 사실을 알고 모여와 당신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식성을 물어보고는 “가난한 백성이니 소는 잡지 못하고, 가가호호에서 돼지를 잡아 위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여 매년 돗제를 지내는 신당이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보면, 돌아온 궤네깃또와 금녕리 인민 사이의 ‘밀당’이 보인다.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트기 위해서 대륙간 탄도탄을 쏘듯 궤네깃또는 일단 인민이 아닌 단골들에게 재해를 내린다. 그러자 단골들은 자신들이 인민들을 대변하는 양 나서서 궤네깃또와 회담을 한다. 단골 즉 동네무당들이 인민들을 잘 대변하였을까? 금녕리 인민의 불만이 터져 나올런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단골들은 ‘제사 때마다 돼지[돗] 한 마리’로 협상을 마무리한다. 관대해 보이는 것이 필요했던 것인가? 재해를 내리기까지 하면서 협박성 투정을 부린 데 비하면 궤네깃또는 크게 손해보는 협상 결과를 꽤 쉽게 받아들인 셈이다. 이런 면을 보면, 궤네깃또 본풀이는 배제와 절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타협[compromise/consensus]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세계에는 영웅이 필요하였던 듯하다. 세계는 지금도 끊임없는 ‘진보’에 의해서 지속가능한 듯하다. 사람들이 아직도 부친살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진보’가 간절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 공존과 타협은 어떤가? 현재와 미래의 세계에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 ‘기존의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그 주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할까? 상대적으로나마 공존과 타협에 강조점을 찍게 될까? 아직 오래된 방식의 진보가 우선되긴 하지만, 새로운 공동체에 관한 논의도 없지 않은 상황에 처하여 있다보니, 판단과 선택이 쉽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궤네깃또 본풀이 속에서 공존과 타협이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은 아무도 이런 발견을 하지 못하였을까?


  1. 여연, 〈[제주신화산책] 바다로 나아간 산신 궤네기또-1 ;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 ⑩부모에 버림받고 바다와 내륙을 평정한 영웅〉, 《제주투데이》, 2020-10-09

  2. [네이버 지식백과] ‘궤눼깃당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집필: 김헌선] 참조.

  3. [네이버 지식백과] ‘궤네깃당 [─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네이버 지식백과] 궤네깃당 [─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신동흔, 〈힘이나 지혜만 있다고 영웅이 되는건 아니다〉, 《한겨레》, 2022-01-27 15:09

  6. [네이버 지식백과] ‘궤눼깃당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집필: 김헌선]

  7. 신동흔, 〈한라의 신, 한라의 영웅〉,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 2006, 188쪽.

  8. 신동흔, 〈힘이나 지혜만 있다고 영웅이 되는건 아니다〉

  9. [네이버 지식백과] ‘궤눼깃당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 [집필: 최원오]

  10. 신동흔, 〈힘이나 지혜만 있다고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11. 신동흔, 〈힘이나 지혜만 있다고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12. 신동흔, 〈힘이나 지혜만 있다고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13. 신동흔, 〈힘이나 지혜만 있다고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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