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정의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세대차별의 부분이다. 스웨덴의 16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unberg)의 청소년 기후행동 등에서도 논의되었듯이, 현존 문명이 기후변화 시대에 직면하여 미래세대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기후정의의 핵심적 문제이다. 자본은 미래투자전망을 상실하여 찰나의 이득만 취하려는 단기투기성 자본으로 전락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고, 현존 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미래세대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현존 문명은 기후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금융자본주의에서 플랫폼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통해 이자(interest)에서 지대(rent)로의 약탈과 추출, 채굴전략을 이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타리와 함께 이론작업을 했던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협동조합, 제 3섹터, 사회적 경제가 전망을 상실한 자본에 대해서 집합적 리더십을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미래라는 시간을 무정형적인 미지의 시간으로 보면서도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인 것으로 본 것은 망상적이기까지하다. 자본주의적 진보, 즉 성장주의의 최종결론은 지구와 자연과 생명을 파괴한 자본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전망조차도 상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자본은 행성 지구를 떠나 화성이나 우주로 향하겠다고 할 정도로 지구를 살리고 돌보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단기투기성 자본은 이미 지구인이기를 포기한 화성인이나 외계인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1972년 발간된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는, 자원 측면에서도 미래의 시간은 무한한 자원 약탈의 가능성을 가진 지평이 아니라, 유한성, 한계, 끝을 가진 시간임을 밝히고 있다. 즉, 신, 국가, 아버지 등의 구조가 영원하리라는 망상을 가진 예속집단과 달리, 한계, 유한성, 끝을 응시하며 불안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주체집단의 지평이 개방된 셈이다. 물론 자원으로서의 생명과 자연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존재들이 연결되고 접속하는 과정에서 무한성이 가능하다는 점에서의 내발적 발전(Endogenous Development) 전략의 유효성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활동으로서의 무한성을 의미할 뿐, 자본의 영원성의 차원이 무한하리라는 보증수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미래세대가 직면할 상황이 현재의 문명이 만들어내고 있는 차원으로부터 벗어나 기술혁신이나 놀라운 발명에 의해서 갑자기 개선될 여지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이미 나와 있는 재생에너지나 적정기술을 대대적으로 적용하기를 회피하면서 혁신적인 기술이 성장을 약속하리라는, 4차 산업혁명과 같은 담론들은 사실상 미래적 전망을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오히려 기후위기를 유발하는 성장에서 찾으라는, 미래세대에 대한 현존세대의 주입식 교육인 셈이다. 특히 기후변화의 시대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탄소배출을 과도하게 하면서 현재를 흥청망청 소진하고 있는 현존 세대의 삶의 대가로, 미래세대가 직면할 상황의 심각성과 열악함은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미래세대가 직면한 취업, 연애, 결혼, 육아의 포기, 성공하고 자립할 기회의 소멸, 미래 가능성의 소진, 건강, 위생, 운동 등 신체 잠재력의 고갈 등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상황은 성장을 더 지속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생명의 한계와 유한성이 급격히 드러나고 있는 기후변화 시대, 즉 생명위기 시대가 개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거대한 기후정의의 문제설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기성세대들이 취하는 논점은, 결국 미래세대를 위해서 성장을 더 해야 한다는 위선적인 발언으로 점철되어 있다. 만약 단기투기성 자본의 맥락이나 현존 문명의 맥락을 그대로 둔다면, 미래세대가 직면할 기후위기의 상황은 실로 심각하기 그지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계 위기에 대한 정면 대응으로서의 탈성장 전략이 필요한 현실이다. 탈성장 전략은 현존하는 저성장 상황과 같이 수동적으로 현재의 위기상황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생산의 전략에 따라 보다 능동적이고 실천적으로 전환사회를 맞이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탈성장 전략은 기존의 허울 좋고 하나마나 한 얘기를 했던 무대를 걷어치우고, 실질적인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자원과 기회의 고갈에 대응하는 방법론일 수 있다. 즉, 개인적인 빈곤을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공동체적인 방향성은 ‘더불어 가난’으로 향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앞에는 보이지 않는 미래세대의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탈성장사회는 정동과 활력이 더욱 활성화된 상태를 의미할 것이며, 기성세대의 위선적인 금욕주의가 아닌 정동의 해방, 욕망해방의 사회를 의미할 것이다.
가타리는 페테르 파르 페르바르트(Peter Pal Pelbert)의 「볼 수 없는 것의 생태학」을 그의 책 『세 가지 생태학』(2003, 동문선)에 수록하면서, ‘볼 수 없는 것의 윤리와 미학’의 관점에서 미래를 사유하였다. 소수자되기를 넘어서 ‘지각불가능하게 되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취를 많이 남기는 삶이 아니라, 자취를 적게 남기고 심지어 투명인간되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장주의 시대의 성공주의, 승리주의, 자기계발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박수를 남기는 청중이 되고, 정의(definition)를 내리는 지식인이 아니라 소음, 잡음, 웅성거림이라고 여겼던 소재와 재료라고 간주된 근거(ground)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한성, 끝, 죽음, 한계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좌표를 점차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도래할 시간과 자원, 생명의 한계를 수용하면서 문명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가시적이고 실물적이고 외양적이고 양적인 척도가 아니라, 비가시적이고 관여적이고 내포적이고 질적인 척도에 따라 삶을 설계해야 하는 방향성으로 향하는 것이 제도 생산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환경도 심원한 변화를 거쳐야 할 상황에 있다. 이는 성장주의 시대처럼 성공하고 승리하고 자기 관리가 잘 된 사람만을 드러내고 과시했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관계로부터 풍부하고 성숙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남겼던 사람들로 이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볼 수 없는 것의 윤리와 미학이라는 관점에서의 기후정의는 볼 수 없는 공기에 대한 윤리에 기반하고, 볼 수 없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에 기반하고, 주변에서 볼 수 없는 난민과 제 3세계 민중들에 기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볼 수 없는 것의 윤리와 미학에 따라 미래세대에 대한 기후정의를 고려한다는 것은 결국 미래에 대한 지속가능성의 입장에서 현존 생활양식(Lifestyle)과 문명의 삶의 수준을 재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장주의 시대가 갖고 있는 미래의 시간관을 극복하고, 미래세대에게 최소한의 기회와 자원의 필요를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미래가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드는 기후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적 진보, 즉 성장주의 극복과 탈성장사회로의 전환에 달려 있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