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구조주의 철학에서의 기후정의] ③ 제도적 정신요법으로부터 도출된 구성적 협치와 기후정의

이 글은 2019년 환경정책평가원에서 발주된 기후정의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포스트구조주의에서의 기후정의 - 가타리의 ‘구성적 기후정의’ 개념의 구도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이다. 이 글에서는 국제사회에 닥친 ‘기후정의’(Climate Justice)라는 시급한 과제를 접근하는 방법론으로 펠릭스 가타리의 구성주의, 도표주의, 제도적 정신요법, 분열분석, 배치와 미시정치, 소수자되기, 생태민주주의, 볼 수 없는 것의 윤리와 미학 등을 적용해 본다. 기후정의의 문제는 기후위기에 책임이 거의 없는 제 3세계 민중, 탄소빈곤층, 소수자, 생명, 미래세대 등이 최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대응과 적응 방법을 찾고자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 적용되는 펠릭스 가타리의 철학 개념은, 이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하는 필사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관계망이 곧 제도

펠릭스 가타리가 창안한 제도적 정신요법은, 일단 특이한 관계망이 설립되면 따로 입법화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이미 제도화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신요법으로 ‘관계망(network)=제도(institution)’라는 구도를 드러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후정의를 정책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제도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기후정의를 직접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는 색다른 관계망으로서의 연구모임, 동아리, 소모임 등을 만드는 것도 제도이다. 더 세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어느 집을 방문할 때 노크를 하는 것도, 신발을 벗어서 가지런히 놓는 것도, 집주인과 부드럽게 대화하는 것도 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관계하는 모든 것들이 제도인데, 그동안 제도는 법제도, 행정제도, 교육제도 등 딱딱하게 경색되어 있는 사회구조와 동일시되어 왔다. 오히려 관계망을 통해서 제도를 창안하고, 관계망에 따라 제도가 변형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도외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도를 일단 완성형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과정형이나 진행형으로 볼 필요가 있다. 설령 사회제도로 수용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재특이화과정을 통해서, 영구개량(=영구혁명)의 과정 위에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도에 대한 물신화와 화석화는 사실상 ‘제도=관계망’의 연대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의 큰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요법은 관계망과 제도의 교직으로 드러나는 ‘구성적 협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핵심 개념이다. by Shane Rounce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DNkoNXQti3c
제도요법은 관계망과 제도의 교직으로 드러나는 ‘구성적 협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핵심 개념이다.
사진 출처 : Shane Rounce

제도요법은 관계망과 제도의 교직으로 드러나는 ‘구성적 협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후정의를 둘러싼 관계망과 제도 사이를 연결하는 ‘아래로부터의 협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관계망 속에서 제도 창안은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무의식으로 간주된 삶의 영역에서 의식 위로 떠오르는 제도를 추출하는 ‘의미화=모델화=표상화’의 방법에 따라 의제가 선정된다. 반면 제도의 관계망에서의 적용은 ‘의식의 무의식화’(=습관화)의 과정을 따른다. 즉 의식적으로 수립된 제도는 삶과 생활 영역에서 반복과 습관, 중복, 순환을 통해 무의식화된다. 이러한 ‘무의식의 의식화’와 ‘의식의 무의식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고, 그 결과 협치 테이블이 설립된 것이다. 우리는 제도적 영역을 차지하는 공무원이나 관료와 관계망의 영역에 있는 시민과 주민들을 끊임없이 교섭시키고 대면시키고 교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제도가 관계망을 통해서 무의식화되고, 관계망이 제도로 의식화되는 과정 자체를 시뮬레이션해야 해야 한다. ‘제도=관계망’이라는 제도요법 자체를 이상형이자 완결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지향성과 방향성으로 보면서 이를 횡단하고 통섭하는 절차와 과정을 구성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협치는 구성적 협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성적 협치는 관계망과 제도의 교직과 대면

협치에서는 전문가와 생활자, 시민들이 각각의 특이점을 차지하면서 발언하고 토론하고 숙의하는 과정에서 ‘의식→무의식’과정과 ‘무의식→의식’과정이 동시적이고 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기후정의에 대한 제도화과정은 반드시 관계망과 교직하여 동시적으로 논의에 부쳐지고 문제설정에 대한 민감도와 생활연관을 성숙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기후정의에 대한 전문가를 양성하고 모델화하고 의제화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기후정의의 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설정 자체를 끊임없이 대면하면서 제도와 관계망 사이의 간극 속에 있는 차이를 더욱 미세화하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후정의와 관련된 협치는 ‘차이를 생산하는 차이’로서의 의미, 즉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라는 1차적 차이를 통해서 제도 생산과 특이한 관계망 생산이라는 2차적 차이로 끊임없이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심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학습(學習)을 요구하는데, 학(學)으로서의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만이 아니라 습(習)으로서의 의식의 무의식화를 동시에 요구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기후정의에 대한 시급함이 요구되는 생명위기 시대의 개막은, 제도와 관계망의 동시적인 공명과 교직은 물론 상향(top-down)과 하향(bottom-up)의 시간차를 극복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구성적 협치는 실효성을 갖는다. 즉, 우리는 상향과 하향의 시간 차이에 따라서 이루어질 모니터링이나 여론의 확산, 공론장에서의 논의를 부수적으로 수행할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구성적 협치의 배치와 관계망에서 숙의되고 논의되고 실험됨으로써, 무수한 경우의 수와 생활세계 자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서 논의하는 즉각적인 과정에 따라야 할 것이다. 이는 감각지와 개념지, 직관지 등 모든 수준에서의 논의를 끌어올리는 브레인스토밍의 과정에 따라 상상력의 최대치로 향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구성적 협치의 판을 조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구성적 협치는 관계망과 제도의 교직과 대면을 의미한다. 기후정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 이슈가 되고 사회의제가 될 경우 아래로부터의 협치를 통해서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상설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설기구는 정치나 행정의 영역에서 관치, 법치, 통치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협치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들의 개입과 구성적인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구성적 협치는 문제설정 자체에 대면하여 끊임없이 논의하고 숙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갖는 혁신적인 힘에 기반한다. 다양한 직군과 역할, 생활양식 등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판 위에 올려놓고 상상력과 활력에 기반한 토론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그것이 ‘맞다’, ‘틀리다’를 따지는 경성과학에서의 반증가능성에 기반한 대화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타당한 가설이나 가정이 등장하면 이를 현실에 비추어 정합성을 판단하는 식의 가추법(假推法, abduction)에 기반한 상상력 넘치는 장과 판을 요구한다. 경성과학의 토대는 전제에서 결론으로 향하는 연역법(deduction)과 결론의 양적 확장을 통해 일반적 전제로 향하는 귀납법(induction)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다르다’를 바탕으로 한 차이와 다양성의 논의가 아닌, ‘틀리다’의 반증가능성에 집착되고 협착(狹窄)된 형태를 보인다. 양자역학이 개방한 확률론적 질서에서 가추법은 전면화되어 일단 상상력에 따르는 가설이라 하더라도 설명이 가능하면 이론으로 인정하는 학문적인 토대를 설립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구성적 협치는 다양한 상상력과 가설,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 등이 오갈 수 있는 한 판 난장을 만들어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을공동체가 갖고 있는 판과 구도를 십분 활용하고 개인 자격이 아닌 관계망 자격으로 협치의 판 위에서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절차와 과정이 요구된다.

책임성 있는 제도생산의 단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과제

구성적 협치는 생태민주주의의 하나의 방법론이며 색다른 통치형태로 부각되고 있지만, 그 속내를 보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생태계 위기 상황이나 공동체와 사회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기능정지에 빠지는 사회적 제도의 현실이 숨어 있다. 생명 위기 상황에서 책임 부위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협치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즉, 책임주체(subject)조차도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구성되어야 할 사이주체성(Inter-subjectivity)의 일부 기능과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성적 협치는, 공공영역과 공동체영역, 시장영역이 함께 어우러져 협의를 할 수 있게 된 역사적인 상황논리 역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이유는 현 시점이 ‘저항의 민주주의’에서 ‘협의의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 가장 적합한 생태민주주의의 방법론 중 하나로 구성적 협치가 지목되는 것이다.

절규, 아우성, 비판, 폭력적인 활력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저항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쁨, 활력, 생명에너지, 사랑, 욕망, 정동을 통해서 협치의 장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과정과 절차가 매우 중요해졌다. 따라서 세상을 재창조할 수 있는 활력과 상상력, 생명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만든 관계망을 어떻게 뾰족한 첨단점에 두고 이를 제도 생산, 관계망 창발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만들 것인가가 관건인 셈이다.

기후정의와 탄소불평등의 상황을 개인의 차원이 아닌 관계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공공영역, 시장영역과의 협의와 협상으로 이끄는 구체적인 로드맵 역시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 자체를 생활 속 민주주의로 발전시켜 나가고 실질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후정의와 관련된 책임성 있는 제도 생산의 단위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구성적 협치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것이 기후변화와 생명 위기 시대의 현실이므로, 기후정의라는 문제설정에 대면하여 수많은 제도 생산을 통해서 책임성 있는 단위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 다음 편에 계속

본 연구는 2019년 환경정책평가원의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정책 개선방안 연구〉라는 연구과제에 제출된 연구보고서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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