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토론회 특집] ⑥ 생태조례 제정과 생태도시 조성, 그 접근법과 핵심원리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탈근대적・탈인본주의적인 새로운 법사고/법언어가 필요하다. 그 사고와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지구 안의 누군가를 순수히 보호되어야만 하는/자기 이익을, 그 이익에 관한 순수한 권리를 “보유한” 단일 주체로 보는 시각에서 해방됨으로써 구상 가능하다.

「탈성장 전환에서의 생태헌법 정신 – 주민주권, 지구법, 생태조례」의 발표자(김영준)는 발표문 에서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이해되는 세 가지 개념인 주민주권, 지구법, 생태도시 조성을 서로 연결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발표자의 최종적인 초점은 생태조례 제정을 통한 생태도시 조성으로서, 과천, 순천, 대전 사례가 발표문 후반부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요는, 지역 차원에서의 의사결정 참여라고 하는 주민주권의 원리와 지구/자연을 공존적 주체, 법적 권리 주체로 보는 지구법(학)의 정신에(주민주권의 원리를 바탕으로 지구법을 현행법형식에 적용한다면 그 법형식은 조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입각해 생태도시 조성을 위한 생태조례를 주민 주도로 제정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본 틀거리가 아니다. 이 발표문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마련되고 계획될 생태도시 조성의 중심 원리로서 발표자가 “경계를 넘어서는 아름다움의 힘”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발표자는 이 가치의 구현 주체일 공공예술을 제시한다. 그것은 발표자가 보기에 “공공예술은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을 연결시키는 통합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짐작되는 바로는 대전시의 경우, 이러한 지역민 통합 행동[행위]으로서의 공공예술을 공적 프로젝트로 삼는 한편,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생태조례를 주민발의로써 제정할 예정인 듯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에 깔고, 다음의 질문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논평자는 이 자리를 보다 활기찬 토론의 자리로 만들기 위해, 또는 토론회 이후 각자 각자의 자리에서 곰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려는 의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콜로키움 참석자들께 던지고자 한다.

1. 아름다움과 생태도시의 관련성에 대하여

발표자는 발표문에서 유기체로서의 생태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계를 넘어서는” 아름다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힘을 지닌 아름다움이 왜 생태법률 제정, 생태도시 조성의 원리가 되는 것인지에 관한 소상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있는 느낌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힘”에서의 “경계”란 아마도 시민집단 간 (계급적, 직업적, 문화/기호적, 세대적, 젠더적, 지적) 경계인 듯하다. 그렇다면 시민 모두에게 호소력 있을 가치인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조선시대에 “사회를 통합하는 예술의 원리”였던 “악(樂)”처럼 그 아름다움을 생태도시 디자인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말일까?

이러한 발상은 소중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생태적 처참지경을 아름다움이라는 렌즈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음미하지는 못할 듯하다. “사회를 통합하는 예술 원리”로서의 아름다움은 분명 필요한 것이지만, 현 문명(도시)의 반생태성을 성찰하고 생태적인 문명(도시)을 구상해야 하는 우리에게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은 아름다운 것/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각/시야가 아닐는지.

예컨대, 태평양을 떠도는 플라스틱 폐기물은 아름다운 것인가, 추한 것인가? 지하에 매장된 석유 그 자체, 즉 원유는 아름다운 것인가, 추한 것인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을 태운 결과로 생산되어 공급되고 있는 이 전기는 아름다운 것인가, 추한 것인가? 성탄절이면 등장하는 수많은 (플라스틱으로 된, 또는 석유화학 제품을 주렁주렁 단) 크리스마스 트리는 아름다운 것인가, 추한 것인가? 지구 안의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 것인가?

알도 레오폴드에 따르면, “어떤 것이 생명 공동체의 온전성, 안정성, 아름다움을 보전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옳다/적합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틀렸다/적합하지 않다.” 윌리엄 모리스는 “자연과 조응하고, 자연에 도움이 되면 아름다운 것”이고 “자연과 어긋나며 자연에 방해가 되면 추한 것”이라고 했다. 화이트헤드는 “만물의 존재 목적이 자기 미의 지속”이라고 했다. 추와 미의 경계가 붕괴하고 만, 아름다운 듯한 추함이 인간과 지구를 압도하고 있는 현 시대엔, 새로운 도시와 산업과 문명의 구성/구축 원리로 이들 현자들이 말한 아름다움이 깊이 재고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의 해체-재구성이 지금, 너무도 절요하다.

2. 자연에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의 법개정 (생태적 법률 제정) 접근법은 과연 바람직한가?

2022년 12월 7일~19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15차 UN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COP-15)’ 결과 채택된 문서인 「쿤밍-몬트리올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Kunming-Montreal Global biodiversity framework」은 총 23개의 (생물다양성) 보존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어머니-지구, 자연의 권리와 관련해서 중요한 대목도 보이는데, 예컨대 이 프레임워크는 “자연의 권리, 어머니 지구의 권리를 포함한 다양한 가치 체계와 가치 개념들을 본 프레임워크의 성공적인 실행의 필수 부분으로서(…) 인정한다”(섹션 C(9))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프레임워크는 19번째 목표에서 “어머니 지구 중심적 행동”을 포함한 행동 계획안과 생물다양성을 위한 국가 전략들을 실행하기 위해 2030년까지 최소 2000억 달러의 자금 조성을 요청하고 있다.

발표자 역시 지구상의 공존적 주체를, 지구를 법적 주체로 보는 것이 지구법이라면서, 지구와 자연을 법적 주체로 보고 그 권리를 법에 명기하는 (지구법적) 접근법을 바람직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논평자가 보기엔, 탈인류세에 필요한 지구를 생각하는 생태적인 법전환 또는 비인간 물질 포괄적인[포용적인] 법전환이라는 과제는 우리에게 ‘권리-의무/이익-손해’ 개념을 기축(基軸)으로 한 기존의 법언어, 법사고 프레임에 관한 보다 심원한 성찰을 요구한다. (법적) 권리-의무는 대상과 분리되는 주체를 전제로 한 근대적 (법) 개념이며, 그 권리의 세속적 구현형식인 이익, 그 반대물로서의 손해 역시 이익을 보는 자, 손해를 보는 자라는 고정된, 이익과 손해를 마치 물건을 보유하듯 보유했다가 말다가 할 수 있는 개별 주체를 전제로 한 근대적 개념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런 프레임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이를 지속시키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 프레임을 유지하는 가운데 비인간 물질(비인간 자연물 포함)의 복리를 법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 결론은 딱 하나, 즉 ‘법적 주체’의 범위를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확대하자는, ‘법적 권리’ 부여 대상을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확대하자는 주장일 수밖에는 없다.

발표자는 인간을 법적 권리주체로 보고 비인간 물질을 법적 권리객체로 보는 근대법을 문제시하면서 모두가 법적 권리주체가 되는 지구법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권리주체’의 보편적 확대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주체-집착적 접근법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모더니티에, 인본주의(인간중심주의)에 강하게 결박돼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탈근대적인, 탈인본주의적인 새로운 법사고, 법언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 사고와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지구 안의 누군가(음바페, 해파리, 구상나무, 시아노박테리아, 변이 코로나바이러스, 북한산, 오봉의 다섯 개 바위, 석유…)를 순수히 보호되어야만 하는 자기 이익을, 그 이익에 관한 순수한 권리를 “보유한” 단일 주체로 보는 시각에서 해방됨으로써 상상 · 구상 가능할 것이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주체는 이 지구상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 중 그 어떤 개인도 순수히 보전되는 것이 옳은 자기 이익을 보유하지는 않는다. 자기 생명의 보존이라는 개인의 (개별생물로서의) 이익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익조차 (지구적 시각에서는)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데, 첫째 그 생명 보존 과정이 숱한 파괴와 피해 상황에 다리를 걸치고 (그 파괴와 피해를 일정하게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 보존 과정이 숱한 비인간물질의 항시적 돌봄/도움을 통해서만 (돌보고 돕는 비인간물질들이 이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어떤 개체의 이익 확보도 언제나 자기 아닌 다른 물질의 자기지속성/자기지속의지를 훼손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이익은 순수한 보호 대상이 될 수 없다. 탈취를 수반하지 않은 채로 가능한 (개별 생물의) 이익은 지구 안에는 없다. 즉, 순수히 보호되어야만 하는, 개별자(이 개별자가 유기체이든 무기체이든)가 보유한 단일한 이익은 이 지구에는, 온생명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지구 안의 개별자는 어떤 자기 이익을 본래 보유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익은 (지구적 시각에서는) 언제나 비순수한 이익, 즉 순수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이익이다. 그리고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이익/손실 프레임, 나아가 권리/의무 프레임을 유지하는 가운데 지구의 생명질서, 물질질서에 적실히 부합하는 법언어를 구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의 권리를, 어머니-지구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밑깔려 있는 근대 비판적 정신과 태도는 존중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정신과 태도를 온전히 살려내면서도, 동시에 근대법의 언어를 기반 삼는 권리론적, 주체-집착적 접근법에서 벗어나 지구의 질서, 지구의 문법에 맞는 새로운 법언어를 상상하고 구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지구/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위상에 관한 범인류적 차원의 새로운 관점(인간관) 확보와 공유가 필요하다. (이런 인간관이 확보된다면, 지구에[도] 권리가 있다는 발화/언표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지구의 구성원들/물질들을 각자가 처음부터 보유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 나선 개별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뒤엉켜 있고, 교차하고 있고, 교환하고 있고, 각자가/상대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호의존 속에서 자기를 존속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경우엔 상호돌봄을 실행하기도 하는 상호감염적 행위자들/행위소들로 인식하는 범인류적 차원의 새로운 물질관 확보와 공유가 필요하다. 이런 관점이 상식으로 대두하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탈인류세에 걸맞는 새로운 법언어를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비인간물질이 인간물질에게 자꾸만 딴지를 거는 인류세라는 거대 위기의 시대엔, 새로운 물질의 철학이 지금 요청되고 있는 법전환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3. 대전시에서 생태조례를 제정하려는 주민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대전시의 공공예술 운동, 그리고 생태도시 조성 프로젝트와 어떻게 연결되나?

발표자는 발표문 후미에서 대전시가 2023년 아르코 공공예술 사업에 응모했고, “이를 통해” “자연의 권리 조례를 대전시에 제정하고자 한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논평자가 보기에, “이를 통해”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글이 쓰여 있다. 다시 말해, 공공예술 사업, 자연의 권리 조례 제정, 생태도시 조성, 이 셋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지 못하다. 따라서 발표자께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설명을 요청 드린다.

아울러, 그 설명을 듣기 이전에, 관련하여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논평자의 생각에 도시를 생태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공공예술 프로젝트와 유의미하게 연관되려면, 생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하는 종래의 고착된 인식틀에서 해방됨이 가장 중요하다. 도시의 행정관료, 도시계획의 주체, 건축가,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주체, 이 모두에게 이것이 생태도시 조성 참여에 필요한 선요조건이 되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생태적 도시 조성과 도시 전체의 공공예술화가 사실 동일한 것임을 깨달은 채로 첫 회의석상에 앉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선언적, 원론적, 이론적 수준의 이야기일 뿐이고, 이제껏 공공예술 또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된 것들이 지구의 물질에 관한 사려 깊은 접근법과 태도에 입각한 것들이 아닌 경우가 태반이었음을 깨닫는 시간이 이런 원론 수준의 인식전환에 개입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 앞서 말한 윌리엄 모리스적 관점에서의 공공적 아름다움의 증대에 기여하는 것을 가치 있는 예술로 인정하는 정신(새로운 미관, 새로운 예술관)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존의 요구가 치장의 요구를 압도하는 이 시대에는, 근대적 자연관에 물들어 있던 종래의 예술관, 예술감각도 붕괴될 필요가 있다.

둘째, 생태조례를 제정하는 것도 좋고,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생태도시를 조성하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행동에서 가장 긴요한 것은 그런 것을 하려는 자들, 즉 주민-관료[민관] 자신의 인간전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지금껏 삶을 살아온 인간[탄소 근대인]으로서, 군림하는 호모 종으로서 더는 살아가면 안 되는 실로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진지하고 뼈저린 인식이 먼저 필요하지 않은가. 인간은, 살기 위해서라도, 탈인간(Post-Human)화되어야만 한다. 인간이라는 거죽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 새로운 지구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언어로 계속 말하지만, 그 발화내용물은 지구의, 땅의, 바다의, 생명공동체의, 비인간 물질 개개의 생각을 함께 구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새롭게 말하는 자가 그 모든 제정과 조성의 주체가 될 때, 그 제정과 조성을 향한 일체의 노력이 가치 있게 되지 않을까. 시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주 차원에서.

우석영

철학자. 작가. 탈근대전환 연구자.
출판 & 연구 공동체 산현재 대표.
생태적지혜연구소 학술위원.
환경철학회.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 제주미래디자인포럼 등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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