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하트의 Prison Time] ④ 의례의 구성

이 글은 예일대출판부에서 정기발행하는 저널 『Yale French Studies』 1997년(No. 91)에 실린 마이클 하트의 「감옥의 시간(Prison Time)」에 대한 번역이다. 총 5회로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다. 원문은 온라인으로 다운로드 가능하다.

우리는 친근하고 살아있는 한 권의 역사책이다.
시인이라면 거기서 영원회귀의 상징을 풀어냈을 것이다.

『장미의 기적』

사건은 순수하고 살 수 없는 해방으로 감옥의 시간을 산산조각 낸다. 그것은 순수한 우연의 순간, 주사위 던지기의 순간, 카오스의 우주의 열림, 우리가 살아왔던 운명의 절대적 파괴다. 그러나 사건 자체는 정확히 말해 그것이 현실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어떠한 시간도 갖지 않기 때문에 살 수 없는 것이다. 사건은 감옥의 시간을 파괴하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시간 자체의 순수한 부정이다. 삶은 대안적 시간을, 긍정적 접합이나 현실화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생활양식, 살아있는 사물의 상태로 ‘사건을 공들여 세워’[dresser l’événement]내야 한다.1 이러한 시간적 구성의 첫걸음은 사건에서 마주침으로 옮겨가는 것이리라. 대안적 시간과의 이러한 접합이 없다면, 감옥의 시간으로부터의 우리의 탈출은 짧고 덧없는 섬광(어떤 순간조차도 아닌)에 불과하다. 우리는 여전히 삶으로부터의 추방에 갇혀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랑의 순간이 되돌아올 방식, 그것이 시간적 밀도를 표시하기 위해 부단히 반복할 방식을 구축해야 하며, 새로운 시간의 물질적 구조가 될 지속을 구축해야 한다. 사랑의 순간의 영원회귀는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짜내는 씨줄과 날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다움은 사건의 도래와 사랑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비천한 개방성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구축 역시 포함한다. 성인은 결국 그/녀의 창조력으로 정의된다. 신성함은 실존 안에서의 존재의 실현만이 아니다. 그것은 노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존재 자체의 구성을 포함한다.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말했듯이, 만일 주네가 신이라면 그의 신성함은 그의 신 놀이 즉 사적이거나 허구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피조물과 분리된 전능한 창조자의 놀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네가 실재를 구성하고 존재를 구성하는 우리의 공통적인 잠재력을 드러낸다는 데에 있다.2 창조의 힘, 즉 우리 자신의 실존을 야기하는 힘이 신인 것이다.

기쁜 마주침의 조직화는 우리의 힘의 증가, 우리의 행위할 능력과 존재할 능력의 증가이다.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의 사랑관이다. 
사진 출처: Holly Mandarich
기쁜 마주침의 조직화는 우리의 힘의 증가, 우리의 행위할 능력과 존재할 능력의 증가이다.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의 사랑관이다.
사진 출처: Holly Mandarich

존재의 구성은 시간에 대한 일관성, 연속적인 반복, 지속을 필요로 한다. 바로 이것이 주네가, 그가 사랑한 수단의 혁명가 무바라크처럼, 자신이 엄청난 스피노자주의자임을 드러내는 지점이다.3 스피노자처럼, 주네도 그의 전체 기획을 단순한 긍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여전히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노출은 우리를 완전히 신체의 물질적 평면과 사물의 힘에 던져 넣는다. 하지만 어떻게 차이나는 신체들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마주침 안에서 합성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기쁜 마주침을 되돌릴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이 기쁜 마주침 바깥에서 새로운 생활양식, 새로운 세상을 구성할 수 있는가? 하나의 사건이 우리 삶에 개입해 기쁜 마주침을 낳을 수 있다지만, 마주침의 원인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부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이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우발적인 기쁜 마주침은 하나의 선물—이것은 우리에게 특정한 기회를 준다—이다. 우리가 그러한 [마주치는] 신체와 우리 자신의 신체에 공통적인 것을 인식한다면, 즉 신체가 우리 자신의 신체와 일치하는 방식, 그래서 우리의 신체가 새로운 신체를 함께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쁜 마주침이 되돌아오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인식하는 기쁜 생활양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이다.4 그리고 사랑은 이러한 구성의 추동력이다. 기쁜 마주침의 조직화는 우리의 힘의 증가, 우리의 행위할 능력과 존재할 능력의 증가이다.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의 사랑관이다. 이러한 기쁜 마주침의 영원회귀는 존재의 구성으로, 이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움직이지 않는 동일성/정체성을 고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운동, 되기, 마주침의 궤적을 늘 열려있고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그래서 새로운 사건의 개입에 계속하게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5 기쁜 마주침의 회귀는 대안적인 구성적 시간을 엮어낼 첫 번째 실이다.

사건과는 대조적으로, 마주침은 이미 특정한 지속 관념을 제시하지만, 실제로 시간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마주침이 되돌아와야 한다. 주네의 글들은 부단한 반복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책들은 물결치며 쓰여진 것처럼 보인다. 마주침은 의례(儀禮)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결코 반란이나 불의의 감정에 지배받지 않는 나의 모험은, 무겁고 기이하며 에로틱한 의례(이것은 나를 감옥으로 이끌고 그것을 예상하게 하는 형태를 띤 의례이다)에 의해 짐이 지워지고 복잡해진 그저 한 번의 긴 짝짓기에 불과할 것이다.”6 주네의 의례는 늘 사랑의 의례이다. 의례는 기쁜 마주침의 무한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례는 결국 사건을 시간으로 이끌고 그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만든다. 따라서 이 새로운 운명의 구성은 고집스럽게 그 자신의 경직성을 유지하고, 반드시 완수되고자 한다.

주네는 그러한 시간을 버리고, 사건의 순수 잠재성 안에서, 시간 밖에서 그러한 시간을 폐지한다. 사진출처: Jeremy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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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네는 그러한 시간을 버리고, 사건의 순수 잠재성 안에서, 시간 밖에서 그러한 시간을 폐지한다.
사진 출처: Jeremy Thomas

주네는 그의 연인조차 배신하는 성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고정되거나 구성된 일체의 정체성을 배신할 것이며, 법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복종하는 경우란 주네 자신이 그것들[정체성과 법]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날 때뿐이다. 배신에 대한 그의 긍정은 모든 복종의 거부, 절대적 불복종이다. “어떠한 목적도 섬기지 말자.”7 이 일반적 배신은 특이성의 증거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주네가 “어떠한 사회성에도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8 주네는 모든 목적이나 고정된 정체성을 배신하지만 그럼에도 구성의 과정, 되기, 의례를 끝없이 추구할 것이다. “물론 의례를 고조시키는 몇 가지 잔혹한 세부사항을 떠올리지 않는 한, 당신은 이 의례에서 어떤 것도 변경할 권리가 없다.”9 의례로부터의 유일한 일탈은 그것의 구성 노선을 강화하는 것뿐이다. 누군가는 주네가 의례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의례에 대한 종속관계를 함의할 것이다. 그의 삶, 그의 새로운 생활양식은 의례의 리듬과 움직임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주네는 의례에 똑같이 몰입하거나 참여하면서 스스로(그리고 일체의 자아 관념)를 버린다. 이러한 의례는 우리가 되돌아올 새로운 시간, 기쁜 마주침의 시간의 기본 형태이다.

주네가 자신의 극(劇)에서 시간의 통일성에 관한 고전적 지시를 따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의 시간, 우리 사회의 텅 빈 감옥의 시간을 그 안에서 반복할 뿐이라면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네는 감옥의 고독과 분리 속에서, 시간을 창조하는 힘을 이미 발견했다. “감방에서, 몸짓은 매우 느리게 행해질 수 있다. 당신은 그 가운데에서 멈출 수 있다. 당신은 시간과 사고의 주인이다. … 이런 것이 감방 생활의 사치를 이루는 것이다. … 영원성이 몸짓의 곡선으로 흘러 들어간다.”10 주네가 자신의 감방에서 창조한 시간은 어쩌면 그가 무대에서 표현할 시간적 구성의 첫 번째 정교화였을지 모른다. 장막 아래 어둠에서 행해진 그의 개인적인 감옥 의례의 실험은 극장의 의례적인 집단창조의 축소판이었다. 무엇보다 연극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시간, 즉 새로운 리듬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스크린』의 제작에서, 주네가 대화의 다양한 속도와 느림에 계속해서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소임의 징후였을지 모른다. 연극 프로듀서 로저 블린에게 보낸 편지와 그 텍스트의 여백에 있는 지시사항들은 배우들이 대사를 전달해야 하는 리듬에 관한 지시사항으로 채워져 있다. “아주 빠르게”, “아주, 아주 느리게”, “아주 급하게”, “해롤드 경과 블랭켄시의 리듬을 더 활기차게” 등. 어질어질한 가속과 사치스러운 느림은 실존을 위한 새로운 걸음걸이, 새로운 보폭의 구축이다. 의례는 그것이 집단적 무리와 반복을 모으는 만큼 새로운 시간성을 창출하는데, 그것은 수 시간의 공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간으로 확장한다.

사르트르가 제시했듯이, 주네는 자신이 운명에 묶여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는다.11 그러나 이러한 공식은 이 작용의 복잡성과 그와 관련된 변형을 모호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주네는 단순히 사회가 그에게 부과한 죽고, 동질적이며, 텅 빈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도, 변증법적 투쟁으로 그것에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러한 시간을 버리고, 사건의 순수 잠재성 안에서, 시간 밖에서 그러한 시간을 폐지한다. 우리의 공통 운명인 감옥의 시간은 모든 기회를 몰아내지만, 사건은 우주적인 주사위 던지기의 순간처럼 우주의 카오스 안에서 운명을 산산조각 내면서 기회를 열어낸다. 두 번째 순간 주사위가 굴러떨어져, 정지하고, 새로운 숫자가 나타난다.12 이러한 새로운 운명의 구성은 첫 번째 순간처럼 고정되어 있긴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영원히 되돌아올 기쁜 마주침이 있다. 의례는 정확히 그것이 우리의 욕망의 반복이기 때문에 행해져야 한다. 당신이 우리의 욕망을 강화하지 않는 한 당신은 어떤 것도 변화시킬 권리가 없다. 우리는 되돌아오기 위해 그것[의례]을 의지한다. 하지만 이 의례의 시간, 이 새로운 운명은 시간 바깥에서 오는 새로운 벼락, 전체 과정을 다시 여는 새로운 사건에 의해 언제라도 산산조각날 수 있다. 사건-마주침-의례. 주네의 변형 과정은 이렇게 명확하게 규정된 구성의 궤적을 가진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시간이 바로 주네가 스스로 만든 운명인 것이다.

※ 이 글의 원문은 온라인으로 다운로드 가능하다. Michael Hardt, 「Prison Time」, Yale French Studies, No. 91, Yale University Press, 1997, pp. 64-79.


  1. Deleuze and Guattari, ibid, p. 36 and 151를 보라. [한글본] 들뢰즈‧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52쪽과 228쪽. [옮긴이주] 주석의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물들과 존재들로부터 언제나 하나의 사건을 추출해내는 것, 이는 곧 철학이 개념들, 본체들을 창조하면서 수행해야 할 철학의 과업이다. 즉 사물들과 존재들의 새로운 사건을 세우는 것, 언제나 그것들에 새로운 사건을 부여하는 것이다.” “불평과 분노가 일어나는 일에 대항하여 돌아서서, 사건을 살아있는 개념 안에서 세우고, 끌어내고, 추출해낼 수 있도록 이끄는 것.”

  2. Jean-Paul Sartre, Saint-Genet, trans. Frechtman, New York: Pantheon Books, 1963, p. 476.

  3. “내가 인정한 유일한 두목(boss)은 유대인-스피노자다.” Genet, Prisoner of Love, trans. Barbara Bray, Hanover: Wesleyan University Press, 1989, p. 296.

  4.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와 일치하는 신체와 마주칠 때, 우리가 기쁜 수동 변용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러한 신체와 우리 자신의 신체에 공통적인 것의 관념을 형성하도록 유도된다. … 그러므로 우리는 기쁜 정념의 도움으로 어떤 외부 신체와 우리 자신의 신체에 공통적인 것의 관념을 형성해야 한다. 오로지 이 관념만이, 이 공통 개념만이 적실하기 때문이다.” Deleuze,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trans. Margin Joughin, New York: Zone Books, 1990, pp. 282-283. [한글본] 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권순모 옮김, 인간사랑, 2003, 382쪽. 또, Michael Hardt, Gilles Deleuz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pp. 95-100. [한글본] 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김상운‧양창렬 옮김, 갈무리, 2004, 264-274쪽을 보라.

  5. “클리나멘은 … 이웃하는 원자와의 마주침을, 마주침에서 마주침으로의 연쇄 충돌[un carambolage]을 촉발하며,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 우리는 필연성을 우연성의 마주침의 필연적인 것-되기로 사고해야 한다.” Louis Althusser, “Le courant souterrain du materialisme de la rencontre”,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vol. 1, Paris: Editions STOCK/IMEC, 1994, p. 541 and 566. [한글본]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6, 38-39쪽. 78-79쪽.

  6. Genet, The Thief’s Journal, p. 10. [한글본] 장 주네, 『도둑 일기』, 12-13쪽.

  7. Genet, The Screens, p. 199.

  8. Leo Bersani, Homos, Cambridge/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p. 168.

  9. Genet, The Blacks, trans. Frechtman, New York: Grove Press, 1960, p. 18.

  10. Genet, Miracle of the Rose, p. 156. [한글본] 장 주네, 『장미의 기적』, 201쪽.

  11. “숙명을 피할 수 없기에, 그는 자기 자신의 숙명을 의지하고자[의지로 만들어내고자] 했다. … 그는 자기의 운명을 의지한다. 그는 그것을 사랑하려 애쓸 것이다.” Sartre, Saint Genet, pp. 49-50.

  12.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높이 올라간 손이 순간 허공을 맴돌다 손을 뒤집어 대리석 위에 숫자를, 카페 테이블 위에 숙명을 떨궈낸다. 주사위는 떨어지면서 북소리만큼 다급하게 끔찍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제 숙명은 도박꾼의 손가락이 긴장을 풀고, 테이블로 쉬러 돌아갔다고 말했다.” Genet, Prisoner of Love, p. 249.

박성진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공분야인 영문학에서는 낭만주의에, 비전공분야인 철학에서는 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에 관심이 많다. 문학과 철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연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빗발쳤던 낭만주의 시대에 쓰인 시들을 좋아하고,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상상력을 좋아한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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